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90
190
짐승들
통상 총탄을 쏴봐야 미사일급 구경을 가진 물건이 아니면 9급 몬스터의 가죽에 생채기도 못 낸다. 그러나 본능의 성인의 마력으로 정제한 총알은 그 질이 달랐다. 밀도 높은 마력이 몬스터의 가죽을 꿰뚫었다. 대형 몬스터는 총알을 몸으로 버텼고, 중형과 소형은 각자 마력을 사용해 총알과 포탄을 막고 피했다.
같은 9급 몬스터라도 생김새에 따라 전투법은 천차만별이었다. 다양한 투사체가 날아가는 가운데, 투사체와 섞여 본능의 성인이 질주했다. 허공을 밟으며 연신 가속하는 그녀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총알을 앞지르고, 포탄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수염이 파르르 떨리며 입체적인 공감각을 제공했다.
그림은 머리에 그려졌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사뿐, 그러나 매섭게 걸음 했다.
아즈란은 순식간에 소림승의 앞에 도착했다. 9급 몬스터의 반응 속도조차 웃도는 속도였다. 반응한 것은 소림승 옆에 있던 검은 짐승 하나. 그것도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 아즈란이 이빨 사이에 끼워둔 보석을 강하게 깨물었다.
보석이 깨졌고, 그 안에 있던 시간의 권능이 힘을 발휘했다.
그녀조차 인식하지 못할 찰나의 시간이 지났고, 그녀와 소림승, 그리고 9급 몬스터는 색이 없는 세계에 있었다.
쏟아지던 탄환들도,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도 없었다. 무한히 펼쳐진 회백색 세계에 셋만 남겨졌다.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세계에 아즈란이 감탄했다. 그녀가 원한 건 대상을 일정 시간 동안 확실하게 가둬둘 수 있는 결계였다. 시간의 성인이 내준 건 그녀의 예상을 두 단계는 웃도는 물건이었다.
기껏해야 공간 격리 결계나 내줄 줄 알았는데, 이건……
‘시간의 세계.’
시간의 화신과 시간의 성인에게만 허락된 세계.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과 이어진다는 시간의 특이점.
아즈란도 이름을 들어본 게 다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거의 확실할 것이다.
본능의 성인으로서 그녀가 깨달은 본능의 목적은 이성이 없는, 본능만이 존재하는 동물들의 세계다.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목적이 있다.
시간의 목적은 시간의 절대성의 실현. 절대적인 시간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밀어낸다. 절대성이 실현된 세계에서 상대성은 없다. 우주가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세계. 시간의 목적이란 곧 우주의 정지였다.
시간이 원하는 세계 그 자체의 모습을 한 이 공간이 시간의 세계가 아니라면 달리 뭐라 표현할까.
감탄은 짧았다. 그녀의 권능이 최대한으로 발휘되었고, 쓱싹하고 머리에 그림이 그려졌다. 아즈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림에 있어선 안 되는 인물이 있었다.
“수지가 안 맞다 했지.”
이 나이에 애까지 돌보게 되었다며 아즈란이 한숨을 푹 쉬고는 몸을 날려 저 멀리 산꼭대기에 멀뚱히 있는 이성철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반항하려는 이성철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이런 소린 못 들었는데?”
“따질 거면 시간한테 따져 애송이.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뒤에서 그림자가 솟구치는 듯한 연출과 함께 검은 짐승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몬스터를 짐승이라 칭하는 건, 저 몬스터의 모습이 짐승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눈이 여섯 개고 꼬리가 백 개가 넘는다는 것만 빼면 늑대나 이리와 비슷하게 보였다. 물론, 덩치는 몇 배나 됐다.
“네가 따라쟁이를 대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근원 세계에서 불가능을 논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지.”
이성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즈란의 머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성철이 그려졌다. 탐욕스럽다. 이성철이 가진 탐욕을 그녀의 귀와 수염이 모두 잡아냈다. 이글거리는 열망이었다.
“직관을 믿어라. 때로 직관은 감각을 초월한다. 낫다 못하다가 아니다. 말 그대로 초월해 뛰어넘어 감각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닿는다. 그게 네가 따라쟁이를 대성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직관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거지. 그리고 너는 그보다 더한 죽음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러니 가능할 거다.”
아즈란이 이성철을 집어던졌다. 공중에서 이성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검은 짐승이 이성철을 낚아채려 했으나, 아즈란의 마법이 짐승의 꼬리를 튕겨냈다.
검은 짐승이 아즈란을 보며 낮게 울었다.
“힘의 차이에도 이를 세우나? 본능을 거부하고 자기 인생을 직접 결정할 줄 안다면, 그건 이미 몬스터보단 사람에 가까운 것.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궁금한데.”
“쉽지 않을 거다. 짐승의 왕이여.”
아즈란의 그림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붉은 물감은 번지지 않고 점으로 남았다. 3차원으로 그려진 모형에 공 하나가 생겼다. 검은 짐승이 앞발로 흙을 파냈다. 당황, 그리고 분함. 그 행동에 담긴 뜻을 읽은 아즈란이 짐승을 비웃었다.
“왜? 쉽지 않아?”
연원을 알 수 없는 기술들이 검은 짐승을 덮쳤다.
소림승 앞에까지 날려온 현은 낙법도 취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땅을 굴렀다. 아즈란이 그를 던지며 걸어둔 회전 때문이었다.
이성철은 입안 가득한 흙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법복을 입은 소림승이 있었다. 소림승은 합장을 한 채로 조용히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성철은 소림승의 기세를 읽었다. 초월자는 아니다. 레벨로 치면 800대 초중반. 하지만 레벨이 표현하는 건 마력 총량과 육체 강도의 총합이다. 저 승려를 같은 레벨의 다른 사람과 같이 취급하면 안 된다.
그 몸에 깃든 마력과 무공은 소림의 것이다. 천마와 무신이라는 두 명의 절대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공의 상징으로 불리던 성지의 무공.
상대는 두 가지 권능까지 가지고 있다. 차라리 초월자가 낫다고 생각되는 전대미문의 상대였다.
“역시 찾아오셨군요.”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
“제게 미래를 읽는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을 최근 한 명 만났죠. 그 사람의 이름은 아벨이라 합니다.”
아벨. 권능 정신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되는 자. 그 이름에 이성철의 투지가 조용히 커졌다.
“그가 뭐라고 했지?”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를 이기면 가르쳐 드리도록 하죠. 이런 시련도 뛰어넘지 못해서야 저나 당신이나 목표로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시야 구석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거품이 부풀었다. 본능의 권능에 당했다는 걸 깨닫고 이성철은 마력으로 권능을 떨쳐냈다.
이성철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가 한 일은 권능을 떨쳐낸 게 전부인데 몸은 십 수 미터를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장인이 찍혀 있었다. 손바닥 모양으로 파인 땅에 남아 있는 마력의 잔재는 차분하지만 무거운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소림 무공의 근간이 되는 것은 불교다. 차원마다 교리도 다르고 계율도 다르지만, 불교라는 하나의 이름에 묶이는 만큼 종교의 추구점은 같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인간의 몸으로 깨달은 자가 되는 것. 불교는 본능을 누르고 누른다.
참는 것이 삶인 불가의 무공은 무거우며 가볍다. 평생을 참으며 살아왔기에 무거웠고, 번뇌를 벗으며 집착에서 벗어났기에 가볍다.
소림승이 어깨에 걸친 실의 숫자는 8개. 46개의 번뇌에서 벗어난 소림승의 무공은 소림 무공의 정수를 고스란히 안에 담고 있었다.
소림승의 눈에서 빛이 쏘아졌다. 이성철은 그렇게 느꼈다. 회귀자의 삶은 이성적인 삶이다. 다음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사후까지도 생각한다. 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버린다.
내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걸 버리고 억눌러 참는다. 회귀자의 삶은 수도자의 삶과도 닮은 점이 있다. 이성철은 한 번도 본능에 몸을 맡긴 적이 없었다.
소림승의 눈에서 쏘아진 보이지 않는 빛이 몸에 닿았다. 이성철이라는 인간을 유지하던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슴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본능의 권능은 정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능이었다. 본능의 신자가 적에게 권능을 사용하는 경우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하나였다.
이성을 빼앗아 상대를 본능만 남은 동물로 만든다.
전조 없이 상대에게 바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능의 권능은 단순하면서도 위협적인 권능이었다.
이성철은 권능에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에 억눌려 있던 본능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목에 걸린 시간의 회랑이 잘게 떨렸지만, 이성철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가슴에서 부풀어 오른 거품이 몸에 퍼졌다. 그건 독처럼 뜨겁고 마약처럼 달콤했다. 수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본능이 폭발했고, 몸이 의도치 않게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한 발에 소림승의 공격이 옆구리를 스쳤고, 뒤이어 후퇴한 두 발이 거대한 장인을 피하게 해주었다.
소림승이 눈을 부릅떴다. 본능의 권능에 당한 사람은 약해진다. 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이성을 빼앗으면 사람은 판단 능력을 잃고 한 마리 짐승이 된다. 그러나 저건 무엇인가.
권능이 풀린 건 아니었다. 권능은 제대로 사내의 이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본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사내의 움직임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일반적인 무공보다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본능의 신자들이 본능에 몸을 맡겼을 때나 보여주는 특유의 동물적인 행동이 사내에게서 보였다.
소림승이 연달아 무공을 사용했다. 이성철은 모든 공격을 본능에 힘입어 피했다. 합장한 소림승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미지에서 나오는 공포가 소림승의 어깨에 달린 수실을 흔들었다. 소림승은 급히 권능을 풀었다.
몸에 가득하던 거품이 가라앉는다. 부글거리던 고양감이 사라지고 정신이 돌아왔다. 이성철은 아쉬움을 담아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뭐가 보일 것 같았는데. 하지만 성과가 없진 않았다. 단초는 잡았다.
“한 번 더 걸어줘도 되는데.”
진심이 담긴 도발은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갈!”
사자후가 터지며 소림승의 등 뒤로 아수라상이 나타났다. 거대한 아수라상은 여섯 개의 팔에 각각 무기를 들었고, 세 개의 얼굴이 눈동자를 돌려 이성철을 노려봤다.
소림의 무공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강기로 이루어진 아수라에게서는 두 번째 벽을 넘은 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패기가 느껴졌다.
‘아수라가 있다면, 천수관음도 실재 한다는 건가.’
얼핏 들은 소문을 떠올리며 이성철도 싸움을 준비했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조커 하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방금 막 새로운 기연까지 얻었다.
부글.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끓는 거품이 심장을 쥐어짰다.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몸으로, 전신으로 퍼졌다. 아까보단 덜했지만, 처음치곤 만족스러웠다.
아수라가 무기를 휘둘렀다. 여섯 개의 궤적이 각각 분리되어 지척에 달했을 때는 면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성철이 손바닥이 마주쳤다. 심장을 감싼 거품에, 본능에, 직관에 몸을 맡겼다. 마력을 통제하지 않고, 마력이 스스로 움직이게끔 방치했다.
속은 뜨거웠고, 겉은 차분했다. 이성철의 등 뒤로 희미한 아수라상이 나타났다.
소림승의 평정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