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19
219
재앙은 재앙인 이유가 있다.
과학에게 권한을 빼앗기긴 했지만, 해킹을 통해 에이네는 과학의 관측 기기들을 쓸 수 있었다. 과학의 성인이 진짜 그녀의 접속을 막으려 했다면 에이네는 자신이 만든 나노 머신의 통제권마저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의 성인은 그녀가 만든 기기에 간섭하지 않는 건 물론 에이네가 인공위성을 해킹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허락했다.
과학의 성인이 작정하고 그녀를 막으려 했다면, 에이네가 다른 과학의 시설을 해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죽음과 이어지는 문에서 도망친 에이네는 추격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운 위성을 해킹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를 과학의 성인이 허락한 시간은 보통 30초에서 1분 남짓. 그거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인공위성에 달린 카메라의 시야를 빌린 에이네의 한쪽 눈에 비친 건 근원 세계를 향해 다가오는 운석군이었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다른 한 눈은 죽음과 이어지는 문이 있던 자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에이네는 신체를 유지하던 권능을 잃고 오물이 된 시체들과 죽음의 사도인 유령,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검은 남자를 보았다.
판단에 편견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생산 과정에서 상식을 주입받지 못한 에이네도 저 검은색이 뭔지는 알았다. 저건 상식보다는 생존지식, 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지식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10초. 에이네는 위성이 수신하는 다른 전파를 확인했다. 전파를 따라간 곳에서 그녀가 본 건 움직이기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지네였다.
땅 아래서 천천히 땅을 파고들기만 하던 지네가 직선운동이 아닌 수평운동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아직은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건 여태 기록된 행동과는 완전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두 언데드의 이상 행동에 에이네는 검은 남자의 정체를 비로소 확신했다. 그것과 동시에 위성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에이네가 자리에 멈췄다. 그녀의 머리에서 두 가지 언데드가 가져올 영향이 계산되었다.
“와…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에이네가 난감한 얼굴로 목을 긁었다. 다른 사람들도 도망치길 멈췄다. 현이 에이네에게 물었다.
“왜?”
“죽음의 성인이 나타났고, 하늘에선 운석이 비처럼 떨어지고, 땅에선 지네가 판을 부수려고 하는데?”
“… 그건 또 뭔 소리야.”
에이네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설명했다. 현은 첫 번째 설명의 중간쯤에서 알아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첫 번째 설명이 끝날 때 즈음 에이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두 번째 설명은, 듣고도 그 말을 믿지 못한 사람들의 재질문에서 나온 거였다.
언데드 운석과 대륙을 쪼개버릴 수 있는 거대 지네. 현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던 것들이다.
엘로렌이 이마를 짚었다. 근원 세계 태생인 그녀는 운석의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운석의 위험을 체감할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지네의 위험을 느끼는 데는 경험도 지식도 필요 없었다. 그 압도적인 덩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다. 저런 재앙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그리고 자신이 그 존재를 몰랐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은 받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의 권능은 밈이다. 만능처럼 보여도 밈의 근원은 계승되는 정신이다. 계승되지 않는 정신, 알려지지 않은 지식은 그녀가 아무리 용을 써도 볼 수 없다. 그 예로 운석군에 대해서는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천문관찰은 주술사도 법술사도 필수적으로 행하는 일이고, 그들이 발견한 운석군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엘로렌은 저 운석군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았다.
저것들이 땅에 직격하면, 세상에 살아남는 생명체는 초월자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가 이렇게 쉽게 망할 수 있는 거였나요?”
“쉬운 건 아니지. 죽음은 이 한 방을 위해 수만 년을 기다렸으니까.”
현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에 가려 아직은 보이는 게 없었다. 에이네의 말대로라면 머리 위에서부터 천천히 종말이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죠?”
엘로렌이 현에게 물었다. 현은 두 가지 언데드의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도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근 1년 동안 엘로렌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김우현이라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았다. 계획이 틀어지면(그 엉성한 것들을 계획이라 부를 수 있다면.) 당황하기도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망설임 없이 도망친다.
고금제일의 정령사라는 인간 같지 않은 밈과 달리 김우현이라는 인간은 꽤나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인간은 세계의 위기 앞에서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봐. 너희 셋 몇 살이야? 많아도 40은 안 넘겠지?”
“엘로렌은 28, 로한은 38. 나는 45이다.”
젭크가 말했다.
“이 세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 사실이 숨겨지고 있을 뿐이지. 이제 와서 멸망한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없어. 극히 일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서… 멸망을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요?”
“아니, 지금부터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엘로렌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황당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에이네를 뺀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휘헌이 양자폰을 꺼냈다. 파손이나 분실 우려, 그리고 움직일 때 느껴지는 은근한 거치적거림 때문에 현과 에이네는 양자폰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는 일이 많다. 그러나 휘헌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과학이 전해주는 프로만 리슈타인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행동해야 했다.
“또?”
“과학은 이럴 때마저 프로만을 잡고 싶은가 봐요.”
에이네가 코웃음 쳤다.
“이럴 때일수록 잡고 싶겠지. 그리고 이 행성이 망한다고 과학이 망하는 것도 아니야. 과학의 주력은 우주에 있으니 그놈들 입장에선 땅이 어떻게 되든 좋겠지. 아마 프로만을 잡는 것보다 그놈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질 기술들을 걱정하고 있을걸?”
“아무튼, 가봐야겠어요.”
휘헌이 스크롤을 꺼냈다. 평소라면 이럴 때 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아니면 현도 스크롤을 꺼냈다. 그러나 이번에 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가지 않으실 건가요?”
현이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저거에 볼일이 있어서.”
프로만을 놔둔다고 세계가 망하는 건 아니지만, 저 운석을 방치하면 생물이 멸종한다. 몇 날 며칠 장마처럼 떨어질 운석군을 드래곤이 모두 막을 수 없다는 건 현도 알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위원회가 문제야.’
그 기형적인 집단 때문에 전부 엉망이다. 세계가 자생 능력을 잃었다.
“그럼 난 헌이 하고 갈게. 대신 그거 붙이고 있어.”
언니, 라고 중얼거리며 휘헌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고, 현은 알았다며 손을 휘저었다.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한 에이네와 휘헌이 사라졌다.
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패치를 꺼내 귀밑에 붙였다. 패치가 피부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에이네가 뇌충의 형태를 참고해 만든 통신 기구로, 간단한 정보밖에 전달하지 못하지만 양자 통신 기술을 사용해 과학의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구였다.
이어서 현은 주섬주섬 마석과 보석을 무더기로 꺼내 땅에 늘어놓았다. 현이 사용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마법 중에서도 이건 특별한 마법이었다.
-네가 연락을 할 때가 다 있군. 평생 조용히 살 거라 생각했는데.
“괜찮냐?”
-나는 드래곤 로드다. 어설픈 권능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하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통신 자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뤼필을 습격한 드래곤 중에는 마법의 사도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는 초월자가 몇이나 있었고, 현이 인지하지 못한 과학의 카메라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루트로든 로드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부탁하려는 게 뭔지도 알겠지?”
-마법진 위에 서라.
현이 마법진 위에 서자 마법진을 통해 역류한 마법이 현의 몸에 스며들었다.
-드래곤들이 널 보기 전에 먼저 피해갈 것이다. 드래곤과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고맙다.”
-네가 연락하지 않았으면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다.
붉은 책의 존재는 현과 드래곤 모두에게 해로웠다. 현은 여차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드래곤의 힘을 빌릴 수 없었고, 바깥에 나온 드래곤이 우연히라도 현과 마주치면 낭패였다. 운석과 지네 때문에 밖으로 나올 일이 많아진 드래곤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현이 운석을 막기로 결정한 이상 드래곤과 마주치는 건 거의 필연이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드래곤들이 저걸 보고만 있을 리도 없었다.
로드의 마력을 버티지 못한 마석들이 깨졌다. 마석과 보석으로 구성되던 마법진도 효력을 잃었다.
“정말 운석을 막을 생각인가요?”
“하는 데까지는.”
“초월자라 하더라도 바다와 육지를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운석을 모두 막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초월자도 아니죠. 그냥 도망치는 게 어때요? 드래곤 로드가 사는 땅은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난 뭘 하면 되지?”
“살아남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성미에 안 맞아. 수백억의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두고 볼 순 없지.”
“오지랖치곤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전혀. 아니면 너희끼리 도망가던가.”
“바벨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저는 당신을 따라다녀야 해요.”
“그럼 알아서 해.”
말릴 새도 없이 현이 사라졌다.
로한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허공에 도끼를 붕붕 휘둘렀다. 도끼의 풍압이 마치 작은 태풍 같았다.
“우라질!”
세상을 뒤집는 건 자신들이어야 했다. 난데없이 터진 자연 재해여서는 안 됐다. 로한은 자신의 무력함에, 그리고 엿 같은 세상을 향해 도끼질했다.
“그만해.”
엘로렌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 책을 들고 세계의 끝에 가기만 하면 그녀의 여정은 끝난다. 현이 드래곤 로드와 연락하는 순간 희망이 보였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로한과 젭크에게도 설명하지 않은 바벨을 무너뜨리는 방법이었다.
멸망 앞에 섰다는 절망과 계획 실패의 낭패감이 그녀에게서 힘을 쏙 빼갔다. 일단, 하고 엘로렌이 말을 이었다.
“따라가자. 아직 세상이 망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젭크.”
“간다.”
젭크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자 그를 중심으로 공간이동 마법이 사용되었다. 마력 소모가 심해 스크롤을 쓰고 싶었지만,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도끼를 휘두르는 미친놈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공간이동 마법이 세 사람을 감쌌다.
***
목적지에 도착한 휘헌을 맞이한 건 귀를 때리는 폭음과 폭발의 섬광이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커다란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수인들이 역병과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수인들의 복장을 본 휘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팽팽하던 전장의 균형은 급격히 기울었다. 전선에서 생화학 폭탄 몇 발이 터졌고, 수인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생물에게 치명적인 역병의 권능과 튼튼한 몸이 자랑인 수인은 상성이 좋지 않았다.
에이네가 휘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병사들의 옷에 달린 문양, 저거 거금국의…….”
“백모왕, 제 할아버지가 왕으로 있는 나라의 문양이에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에게 붙었다는 역병의 사도의 존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언니,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거면 충분해요.”
지독한 역병이 뒤섞인 공간으로 휘헌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