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59
59
전의가 피에 흐르는 고블린
현은 이성철이 있는 지붕에 힐긋 눈길을 주었다. 끼어들기엔 늦었다. 이성철은 오지 않는다. 현은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다회차 회귀자. 현은 이성철의 회귀가 어떤 형식인줄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수많은 회귀 중 하나일수도 있다.
마지막이라면 그 동안 모은 기연 때문에라도 모험을 꺼릴 것이고, 회귀 중 하나라 하더라도 위험에 뛰어들긴 꺼려질 것이다. 회귀란 능력은 만능이 아니다. 시간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며, 회귀자의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다.
세이브 로드 능력을 가진 시즈는 위원회에서도 알아주는 망나니였다.
너무 많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고, 너무 많은 죽음을 지켜본 그는 미쳐버렸다. 시간이 영원할지라도 시간 속에 있는 인간 정신은 영원하지 않았다.
이성철이 얼마나 미쳤으며 그에게 남은 기회가 몇 번인지 현은 모른다. 그래도 회귀자에게 한 번의 목숨이 가지는 가치는 다를 것이다. 그들은 기연을 얻어야 하고, 찾아야 하며, 과거를 짊어지고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지켜봐야 한다.
남들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도박이 그들에겐 필승의 승부가 될 때도 있고, 남들은 눈 딱 감고 해볼 도박도 그들에겐 절대 해선 안 되는 도박이 되기도 한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현은 이성철에게 목숨을 걸라고 했다. 하지만 이성철에겐 목숨을 걸만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행동을 촉발할 가치는 없었다.
‘자기 선택이지.’
초월자라고 불리는 길은 억지로 끌고 간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가 필수였고, 그게 없다면 현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이 선택으로 그는 당분간 답보하겠지만, 그건 그의 선택이었다. 현은 싸움에 집중했다.
고블린의 활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싸움을 시작했을 때부터 계속 빨라졌으며, 빠른 속도에 어색해하는 모습도 없었다. 이게 저 고블린의 진짜 실력이었다. 현은 고블린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평범한 요원이 부대로 달려들어도 저건 이길 수 없다. 저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무리였고, 저기서 권능까지 쓰면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저 고블린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약점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약점이지만, 현은 그걸 노릴 자신이 있었다.
현의 영역이 점점 줄었다. 두 수 앞을 읽고 움직여도 고블린은 그보다 빨랐고, 공격을 계산이 아닌 본능으로 피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여유가 생긴 고블린은 희열에 웃었다. 대등하던 사냥감이 몰려간다. 사냥감 둘은 이제 서로 등을 맞대고 방어에 급급했다. 고블린이 처음으로 태도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는 왼손에 있는 염주를 굴렸다. 따르륵. 들릴 리 없는 염주 굴러가는 소리가 마력 파동에 섞였다.
저주이며 권능인 염주 소리는 상대의 반응을 느리게 만든다. 속도가 장기인 고블린에게 딱 맞는 능력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권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자신을 단련했다. 그는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이었다. 피와 싸움을 사랑하며 무엇보다 승리를 갈구하는 종족의 일원. 권능에 맞춰 자신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재앙의 권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소수다. 고블린은 이 권능과 자신의 속도를 이용해 개인과 단체를 가리지 않고 항상 승리해왔다. 투신의 사도라는 직위에 충실했다.
피를 잔뜩 머금은 태도가 번뜩였다.
타타탁. 연속으로 허공을 딛으며 하늘로 솟구친 고블린은 태양을 등지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팡! 태양 빛과 함께 고블린이 낙하했다. 길게 뻗은 태도가 현의 두개골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느려진 반응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다. 단 한 번 빼고 실패한 적 없는, 고블린이 자랑하는 필살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격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칠흑의 강기를 감은 주먹이 보였다.
‘어…?’
그게 고블린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아앙! 고블린의 머리,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현이 있던 자리에 에이네가 7성 공력을 담은 주먹을 날렸다. 명중한 건 머리지만, 주먹에 담긴 힘은 고블린의 상체를 없애버렸다. 뻗어 나간 검은 강기가 급류처럼 물결치며 전방을 헤집었다.
“후우…… 힘들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에이네가 주저앉았다. 방금 일격은 그녀가 가진 모든 마력을 사용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보는 대로, 땅이 뒤집어졌고 강기의 물결이 스쳐 지나간 본청 건물 한편이 가루가 되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피한 거야? 그 명령은 또 뭐고.”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현이 그녀에게 한 명령은 아주 쉬운 것이었다. 살기가 느껴지면, 뒤를 향해 주먹을 질러라. 서로 등을 맞댄 상태에서 한 명령이었다. 에이네가 힘을 장기로 한다지만, 파워에서 나오는 순간 속력은 현과 비슷하거나 현보다 빨랐다.
그녀는 미약한 살기가 느껴지는 순간 뒤를 향해 7성 공력을 담은 주먹을 질렀고, 우습게도 그 일격에 갈려나간 건 고블린이었다. 트롤이나 오크라면 버텨냈을지 모르나, 상대는 속도를 무기로 한 고블린이었다. 극강의 강기를 휘감은 에이네의 주먹을 버티지 못했다.
“이거.”
현은 탈골되고 강기가 파고들어 넝마가 된 팔을 보여주었다. 현의 팔을 칭칭 감은 강기의 실은 본청 건물의 큰 기둥에 묶여 있었다. 강기에 조여진 기둥은 금이 가고 기울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상대가 나를 노린다는 걸 안다면, 나는 피할 준비만 하면 된다. 쉽잖아?”
고블린이 일격을 노린다면, 죽일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에이네보다는 강한 한 방이면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자신을 노릴 것이다. 그런 계산으로 현은 단 한 번만 확실하게 피할 준비를 했다.
고블린의 저주는 뛰어났다. 동작은 물론 인식 속도까지 둔화시키는 저주는 마치 고블린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 공격이 올 것을 안다면, 그리고 공격을 피할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면 반 박자 늦게 반응해도 상관없다.
대가로 팔 하나를 희생하긴 했지만, 투신의 사도를 상대로 팔 하나면 싸게 먹혔다. 거진 공짜였다.
현은 포션을 부어 팔을 치료했다. 치이익. 뼈가 드러난 상처가 아물어갔다. 전투의 흥분이 남아 있어 고통은 크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 정도로는 아팠다. 현은 이 몸이 고통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이 몸으로 중상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
“미친놈.”
찡그리며 상처를 치료하는 현을 보며 혀를 찬 에이네는 신기한 감각으로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모아왔던 마력과 고블린에게 빼앗은 마력까지 합친 모든 마력을 압축한 주먹이 고블린의 머리를 날려버릴 때, 고블린의 상체를 먼지로 만들어 버릴 때 들었던 것은 후련한 해방감이었다. 그 손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감각이 8성의 문을 열어줄 열쇠라고 느꼈다.
“끝났으니까 내려와.”
현의 말에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이성철이 내려왔다. 속도에 치중한 고블린의 특성 탓에 싸움의 여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여파로 치면 마지막에 에이네가 날린 일격이 가장 큰 피해를 만들었다.
“미안하다.”
이성철의 고개가 내려갔다. 합리적으로 따지면 그가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이성철은 현과 함께 싸운다곤 말한 적 없다. 이성철이 현과 다니는 것은 운명 때문이었다. 시간의 재앙이 남긴 실체조차 파악되지 않는 무언가가 이성철이 현의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이성철이 두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의무는 없으며, 그는 이 싸움이 자신에게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해 끼어들지 않았다.
“미안하긴 무슨. 여긴 근원 세계다.”
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리고 현에게는 별일 아니기도 했다.
여긴 근원 세계다. 어제까지 등을 맡기던 사람이 등에 칼을 꽂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 이성철이 가만 있어 준 것도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이성철이 고를 수 있었던 방법 중에는 고블린과 함께 현과 에이네를 죽이고 운명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있었다.
그게 가능하냐는 미뤄두고, 완전한 근원 세계 사람인 이성철에게는 분명 그런 선택도 있었다.
“그래, 근원 세계지.”
배신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현은 왜 그런 당연한 것에 미안해하냐는 것 같았다. 이성철은 죄책감이 드는 한편 한기가 뼈에 스몄다. 옆에서 고래고래 떠드는 에이네까지는 아니지만 질책을 당할 각오는 했다. 그런데 현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대체 어떤 경험을 해왔으면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당연하다고 느끼는 걸까.
저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쯤 하면 위령 기업은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다고 봐도 되나?”
“또 찔러보면 반응이 있겠지.”
“찔러봐?”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대로.”
“그럼 한다?”
에이네는 위령 기업의 서버에 접속했다. 그리고 위령 기업이 가진 모든 자료를 삭제하고 기기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위령 기업의 서버가 전자적,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저장 매체에 저장된 영상도 지워졌다. 보관소에 따로 보관해오던 것들까지 싹 다.
“그럼 가자.”
셋은 공간이동 스크롤을 이용해 이동했다. 위령이 지배하는 도시라 도시 이름도 위령이었다. 에이네에게 좌표를 받아 이동한 도시는 그냥 도시였다. 특별할 것 없는 도시. 현은 정령을 불러 도시를 탐색했고, 에이네는 김 교수의 도움을 빌렸다. 김 교수는 미리 준비해놨다는 것처럼 가까이 있던 인공위성 하나를 도시 위령의 위까지 대령했다.
“분주하긴 한데, 그것 말고 다른 건 없는데?”
위령 기업 소속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달리 보이는 건 없었다. 그건 도시 깊숙한 지하에 지어진 투기장도 마찬가지였다. 현이 관찰한 바도 에이네와 다르지 않았다. 그 고블린처럼 비정상적인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가자. 위치는?”
“저거.”
에이네가 도시에서 가장 높은, 유일하게 벽면이 유리로 된 건물을 가리켰다. 현은 건물로 향하며 물었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은, 죽일 놈들이야?”
“투기장의 핵심 인력이 다 저기 있어.”
“투기장?”
에이네는 여태 투기장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음을 깨닫고 두 사람에게 투기장에 대해 설명했다. 현과 이성철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아, 그건가.”
“영상 판매까지 시작한 건 처음 보는군. 괜찮은 수입 모델이야.”
“……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혹시 말로만 들어서 실감을 못 하는 걸까. 에이네는 머리카락으로 소형 프로젝터를 만들어 두 사람에게 투기장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둘은 한 차례 호기심을 보였지만, 여자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영상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미친 것들…….”
에이네가 날선 혐오감으로 둘을 도려내려했다. 현은 그 순수한 반응이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씁쓸했다. 이런 인간적인 영상에 분노하기에 그는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멀어 영상이 전달하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현은 먼 영상을 보며 하나만큼은 확실히 판단했다.
‘이놈들은 죽여도 되는 놈들이다.’
멀어 보이지 않는 영상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그게 다였다.
“유전 발현이 문제야? 아니면 살아온 삶이 문제야? 대체 뭘 봤으면 이걸 보고 그런 반응이 나와?”
“레벨 700 이상…… 아니지. 용병 또는 그 엇비슷한 일로 근원 세계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사람 중 레벨 500이 넘는 사람을 붙잡고 아무에게나 그 영상을 보여줘 봐라. 다들 비슷하게 반응할 거니까.”
이성철이 말했다. 그 또한 멀리 온 사람 중 하나였다. 현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영상을 보고 판단하지 않았고, 무엇도 보지 않았다. 먼 영상은 그에게 멀어 보이지 않는 영상이었다. 앞길이 바빠 구분할 시간도, 필요도 없는 영상.
“……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글쎄.”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었다. 에이네가 아닌 김 교수에게. 마력 이론 하나 주입하지 않았으면서 에이네에게 윤리와 도덕을 주입한 건 그의 의지인가, 주입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 순수성과 높은 공감 능력과 윤리를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은 에이네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타고 났다면 왜 없애지 않았나. 유전자 정도는 가볍게 조작할 수 있는 과학이.
마력 동력로를 탑재한 최초의 안드로이드이자 열한 번째 최후의 안드로이드. 과학의 성인은 과학의 존재를 근본 부정하는 A11를 통해 무엇을 관찰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