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마음을 비우다
진양은 갑자기 큰 부담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흑구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사람을 속여오면서도 털끝만큼도 발각되지 않았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말인가?
그 누구도 흑구가 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나올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요왕이 따라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진양은 아무래도 흑구를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무 정령 역시 아쉽긴 하지만 자신을 따르든 아니든 녀석의 선택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인연에 맡겨보는 수밖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훨씬 더 편해졌다.
더 이상 나무 정령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추후에 녀석을 어떻게 꼬드겨 선초(仙草)를 키워달라고 말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마음에 걸리는 장애물이 모두 사라지자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진양은 을목정기 결정 하나를 꺼내 혀 아래 머금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태원 경지에선 이 공법만큼 적절한 수련 공법은 없을 것이다.
일목성림육법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온양(溫養, 천천히 기운을 쌓다)이다. 그리고 태원 경지에서 추구해야 할 것 역시 같은 온양이다.
온양을 잘 해낼수록 태원 경지의 수련 경지 역시 점점 더 좋아진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삼원기는 초급 경지 중에서도 마지막 경지이기 때문이다.
양기, 축기, 삼원, 이 과정을 지나면 수도사는 진정으로 초범(超凡, 예사로움을 초월하다)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푸른빛이 진양의 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농후한 생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진양의 육신을 적시기 시작했다.
진양의 수련이 시작되자 꾸벅꾸벅 졸던 나무 정령이 일어나 흑구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짧은 다리로 지면의 잡초를 헤치며 진양에게 다가갔다.
진양에게 다가간 나무 정령은 진양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진양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고, 그대로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해가 떠오르자 진양의 몸에 흐르던 푸른 기운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진양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흑구의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흑구의 시선은 진양의 품에 고정되어있었다.
진양은 흑구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으려는 것인 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러나 흑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느새 자신의 품속에서 몸을 돌돌 만 채 잠들어있는 귀여운 나무 정령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은 피식 웃으며 흑구를 쳐다보았다.
“크르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흑구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한편 나무 정령을 바라보던 진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매번 진양이 건네주는 을목정기 결정을 먹어 치우기 무섭게 흑구에게 쪼르르 달려가 숨어버리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진양을 신뢰하게 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나무 정령이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나무 정령은 졸린 눈을 비비며 미소를 짓는 듯싶더니 이내 진양의 상의를 타고 어깨로 올라갔다.
그리고 어깨에 잠들어있는 고양이의 등을 밟고 진양의 귀에 올라가 놀기 시작했다.
진양은 흠칫 놀랐으나 다행히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무 정령이 귀에 매달려 노는 건 그다지 크게 상관이 없었기에 진양은 그대로 놔두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무 정령은 매우 민감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진양이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진양이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악의와는 별개로 진양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 하진 않았던 것이다.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진양은 이미 완전히 미련을 버리고 해탈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선초에 대한 미련도 버렸고, 나무 정령과의 관계도 앞으로의 인연에 맡기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느낀 나무 정령은 그제야 진양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진양은 지금까지 나무 정령에 대한 전설이나 소문은 많이 남아있었어도 누군가 나무 정령을 길렀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한 결코 나무 정령의 환심을 살 수 없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든 처음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가도 나무 정령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보게 된다면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도사라면 더더욱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흑구가 없었다면 진양은 결코 나무 정령의 환심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흑구가 나무 정령을 데리고 도망쳐준 덕분에 진양은 완전히 미련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오히려 흑구 덕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하다 보니 상당히 웃기면서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무 정령을 이용할 생각은 이미 마음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뿐만 아니라 득과 실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내려놓았다.
이제 모든 건 단순히 운과 인연에 달려있었다.
나무 정령이 을목정기 결정을 원한다면 그저 나눠주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진양을 따라올지는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진양은 을목정기 결정을 꺼내 나무 정령에게 쥐여주었다.
나무 정령은 활짝 웃으며 잽싸게 을목정기 결정을 먹어 치운 뒤 진양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채 흔들거리며 놀았다.
큰소리로 깔깔거리며 웃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상당히 좋은 듯했다
심지어 은연중에 진양에게까지 나무 정령이 가진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수한 기쁨, 순수한 행복.
이러한 마음은 진양까지 기분 좋게 웃게 만들었다.
진양은 가볍게 나무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곤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곳에 을목정기 결정을 가득 채운 뒤 흑구에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이 녀석을 한동안 먹이고도 충분할 거야. 지금 내가 가려는 곳은 너희들이 가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야. 날 따라오지 않아도 되니까 이만 녀석을 데리고 떠나도록 해.”
현재 진양이 가려는 곳은 일도협이었다. 이곳은 나무 정령뿐만 아니라 흑구에게도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었다.
한편 나무 정령은 진양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진양의 손가락을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진양을 바라보며 말이다.
“이만 흑구를 따라가도록 해. 나중에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자.”
진양은 나무 정령을 흑구의 등에 올려 태워주곤 자신도 나귀에 올랐다.
그리고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뒤에선 흑구에 등에 탄 나무 정령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멀어지는 진양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구는 고개를 떨구며 진양이 주고 간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멀어져가는 진양을 바라보았다.
흑구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무 정령을 보고도 아무런 욕심조차 없는 인간이 존재할 것이라곤 도저히 상상조차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진양은 아무 미련 없다는 듯한 모습으로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이는 미련이 없는 척을 한 게 아니었다. 진양은 진심이었다. 진양은 결코 나무 정령을 강제로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무 정령에게 을목정기 결정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선물로 준 건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작은 선물인 셈 치기로 했다.
지금 진양에게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일도협으로 가서 볼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두르지 않았던 건 지난달이 마침 일도협에 매년 찾아오는 가장 위험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예전에 일도협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다가 알게 된 내용이었다.
일도협에 사는 수많은 독충들은 이 시기에 번식기를 가지게 되는데, 암컷 독충은 새끼를 모두 낳은 뒤 수컷 독충을 공격한다고 한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날마다 격렬한 싸움이 일상처럼 벌어진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일도협에 발을 들이는 건 그냥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물론 이건 일도협 외곽에서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다.
심층부에 대한 기록은 없었기에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진양은 이미 수많은 위협을 겪어왔다.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해본 덕분인지 진양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심지어 꼴 보기 싫었던 고양이까지 너그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 * *
그렇게 진양이 일도협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만영상호의 사람들은 뒤늦게 비밀창고에 사고가 터진 것을 발견했다.
대장거인 이신은 이장거가 며칠간 외출을 하는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일을 꾸미기 시작했었다.
그러다 마침 큰 손님과 거래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비밀창고로 들어가 보물을 꺼내오려고 했었다.
대장거는 진법 금제로 겹겹이 둘러싸인 지역을 지나 만영상호의 중심부에 있는 가산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석판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서 비밀창고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한 대장거는 신분 영패를 꺼내 발동시키며 석문을 향해 들이댔다.
그러나 석문은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두 번이나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석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대장거는 그제야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꿀꺽-
대장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석문을 밀어보았다.
그러자 굳게 닫혀있던 석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점점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석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보소 석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어서 눈앞에 참혹한 폐허가 펼쳐졌다.
물건을 얹어둔 선반은 전부 박살이 나거나 넘어져 있었다. 한쪽 벽면은 크게 파여있었으며, 그곳에서 떨어져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돌조각이 비밀창고의 삼분지일을 뒤덮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대장거 이신은 눈앞이 하얗게 변하게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다.
영기에는 거의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도 않는 흑요석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비밀창고가 이런 꼴이 된단 말인가?
이 정도 수준으로 흑요석을 박살 내려면 강력한 실력을 지닌 이가 아니고선 결코 불가능했다.
대충 살펴본 이신은 더 이상 비밀창고 안으로 들어가 볼 의향이 없는지 미련 없이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이신은 굳은 얼굴로 엽전 한 닢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엽전의 중앙에 진원을 주입한 후 그것을 허공으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