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05
505화 계획대로 가면 됩니까?
어느새 진양의 옆에는 꽤 많은 종이가 쌓여있었다.
진양은 글씨가 완전히 마르자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표지에 ‘십팔명기’라는 커다란 글씨를 적으며 마무리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은 뭘로 하면 좋을까?’
진양의 본명을 쓰자니 너무 알려진 이름이라 애매했고, 그렇다고 계무도라는 이름을 쓰기에도 다소 난감했다.
‘아니면 그냥 필명을 쓰는 건 어떨까?’
문득 떠오른 필명이 하나 있었다.
‘불방심유조(不放心油條) 저(著)’
그러나 막상 쓰고 나니 별로 마음에 드는 필명은 아니었다.
진양은 종이를 북 뜯어버리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씨익 웃으며 글씨를 써 내려갔다.
‘장정의 저(著)’
“좋아.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이름만 봐도 왠지 작가가 비판적인 태도로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며 써 내려간 책이라는 느낌이 들잖아. 비록 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붓을 내려놓는 순간.
뒤쪽에서 바람이 휑하고 불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다가온 천천소가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대략적으로 책을 훑어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훌륭하군. 이 장정의라는 사람 꽤 훌륭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구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잔본보다도 훨씬 더 나은 수준이야. 무도, 어쨌든 다 나을 때까진 편하게 쉬면서 요양하시게나. 길 상가는 내가 꽉 잡고 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천천소는 진양의 책을 품속에 챙겨넣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다시 머리만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여인들은 기예만 팔고 몸은 팔지 않네만, 혹여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다면 살짝 얘기해 주시게나. 그래도 모두들 무도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거든. 자네가 신호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도 꽤 있어.”
진양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신호요? 무슨 신호 말입니까?”
“어허, 다 알면서 물어보긴. 자네 사형처럼 선비 노릇은 그만두시게나. 난 다 알고 있거든.”
천천소가 웃으며 자리를 떠나자 진양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문틈 사이로 진양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 * *
같은 시각.
진양이 길 상가에서 두 다리 뻗고 자고 있을 때.
바깥세상은 뒤집히는 중이었다.
진천고를 울린 자가 형부를 나서기 무섭게, 그것도 형부의 대문 앞에서 암살 시도를 당했다.
그야말로 형부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형부의 관리들은 크게 분노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이미 철저한 봉쇄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이제 막 이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안명이 맡아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안명은 은거울을 꺼내 널브러진 시신을 비추었다.
예상대로 새까만 화면 모습만 나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꽤 많은 흔적을 남겼다.
지면 곳곳에 부서진 법보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던 것이다.
그것을 주워서 조사해보니, 형부의 법보에서 떨어져나온 조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형부 내부에서도 조사를 했고, 정말로 법보 몇 가지가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무리 과거를 거슬러볼 수 있는 흔적이 모두 지워졌다곤 해도 모든 증거가 형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형부 상서 엽건중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멀리 선 채 사건 현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모함에 빠졌다는 표정이었다.
한안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수십 년 동안 잠잠하더니 왜 갑자기 사건이 몰리는 거냐고.’
지면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시신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조급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누가 봐도 헌국공이 형부를 모함하려고 꾸민 짓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현장에는 천천소도 함께 있었다.
살인멸구의 기회 따위는 노려볼 틈도 없었다.
수도사의 세계에서 법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건을 조사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때.
정천사의 한 하급 관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한 대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간에 경비대의 한 교위(校尉)가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취를 감췄다기에 조사를 해보니, 혼등이 꺼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외에는?”
“사라진 자의 이름은 해관난이고 그동안 적지 않은 군공을 세운 자라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로 태평살전을 익히며 이도 경비대로 전임되었다고 합니다. 십 년 전, 그를 직접 등용하여 교위 자리에 앉힌 것이 바로 헌국공이라고 하더군요.”
“해 가의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환술을 싫어하던 자였는데, 어릴 때 가주의 미움을 받아 가문에서 축출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자도 계무도 암살 사건에 가담했단 말인가? 시체는?”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체도 못 찾았고요. 찾은 시체는 현장에 널브러진 것들이 전부입니다. 이 외에도 주위를 샅샅이 뒤졌으나 해관난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안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엽건중에게 향했다.
이쯤 되니 대충 알 것 같았다.
형부 대문 앞에서 벌어진 소동의 주동자가 헌국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한시라도 빨리 계무도가 죽길 바라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증이 없었다.
추측 하나만으로 이 모든 화살을 헌국공에게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실마리가 하나 풀렸다.
해관난.
그는 헌국공이 직접 등용하여 경비대 교위에 앉혀놓은 인물이었다.
그가 헌국공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이곳에 나타났던 그는 현재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더 생각할 것도 없다.
분명 헌국공이 보낸 자들이 한발 빠르게 움직여 시신을 가져간 것이 틀림없었다.
해관난은 무려 태평살전을 수련한 연체 수도사다.
웬만해선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육신을 가진 그가 죽었다.
그런데 어찌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실마리를 찾긴 했으나 아직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어떻게 조사를 하냐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국공이 연루되어있는 사건인 만큼 그가 직접 조사하는 건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알아낸 것만이라도 상부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자.’
그는 현장을 정리하라는 뜻으로 부하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곤 엽건중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했다.
“엽 대인, 직접 보셔서 알겠지만 수많은 물증이 형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 없다는 점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형식적인 질문이 이어지긴 했으나, 한연명은 이미 용의선상에서 형부의 사람들을 제외시킨 상태였다.
누가 봐도 형부의 사람들이 저지를 만한 사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형부 사람들이 뭐하러 자신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리는 일을 벌이겠는가?
“한 대인, 염려치 마시고 조사할 내용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시지요.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엽건중은 개의치 말라는 듯 몸을 가볍게 숙여 예를 갖추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안명은 예를 갖추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바로 형부의 사람들을 심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사라져도 크게 영향이 없을 조무래기 녀석들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벌인 일이 틀림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한안명이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조사한 것들을 숨김 없이 그대로 상부에 보고했다.
뒷일은 더 이상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
형부 깊은 곳에 위치한 엽건중의 서재.
엽건중은 차분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그의 부하가 그에게 올릴 차를 우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
엽건중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관난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내 실수다. 다른 연체 수도사라면 몰라도 오행산 출신의 연체 수도사는 결코 얕잡아보아선 안 됐었는데. 산겸의 문하로 들어갈 만한 자라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을 것을…….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다니.”
그의 푸념에선 씁쓸함이 느껴졌다.
“대인, 이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해서 계획대로 가면 됩니까?”
부하가 엽건중의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아니, 이렇게 된 이상 계무도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천천소 그 귀찮은 녀석이 계무도에게 붙은 것도 골치 아픈데 해관난까지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바꾸는 게 맞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계무도 그 녀석이 범상치 않은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오행산에서도 이번 일을 상당히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어서 호신용으로 강력한 법보를 쥐여 보내줬을지도 모른다.”
엽건중은 씁쓸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던 우리는 딱 한 번만 더 움직일 수 있다. 성공한다면 그에 따르는 걸로 하지만, 실패한다 해도 나쁠 건 없다. 계무도 그 녀석, 헌국공을 무너트릴 생각인 것 같은데. 이 기세를 몰아 우리도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게다.
그리고 해관난은 자객이 아니다. 그저 이번 작전을 위해 임시로 투입된 것뿐이야. 그러니 정천사에서도 언젠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엽건중의 시선이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부하에게 향했다.
“가서 해관난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트려라.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소문이 형부에서부터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다 알 테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환해 일족에겐 반드시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거라.”
“대인, 해관난은 이미 오래전에 환해 일족으로부터 축출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이런 소식을 전하는 건…….”
부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엽건중에게 물었다.
“그 의도가 너무 뻔하다는 거지? 그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항상 조용하게 움직일 순 없는 법. 때론 양지로 나와 당당하게 걸을 필요도 있는 법이다. 헌국공이 날 함정에 빠트리려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어느 정도 반응을 보여야겠지. 해관난이 환해 일족으로부터 축출된 것은 단순히 그가 가주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오직 극소수만이 그가 가주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저 소년 시절에 환해 일족의 금기를 범하며 축출된 것뿐이다. 그러니 아무나 그의 생명을 거두어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엽건중은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자신의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