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34
934화 족히 십만 리는 되어 보인다고
진양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대장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영감님도 참. 오랜만에 천천히 담소나 나눌까 했더니. 그냥 가버렸네.”
진양의 시선이 가희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이곳저곳에 명령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기운은 계속해서 강력해지고 있었다.
법신 경지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진양이 이곳에 남아서 할 일은 없다
‘슬슬 돌아가 볼까?’
해안에 가득 차 있던 힘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니 불안함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탕을 마시고 기이과를 먹어 어느 정도 회복을 하긴 했지만, 기존에 쌓여있던 힘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허공에서 한참 지시를 내리던 가희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녀의 기세도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그게 끝에 아니었다.
이번에는 위가 아니라 옆으로 넓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경지의 차이를 두 개로 줄여놓았더니,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세 개의 차이로 벌어진 것이다.
‘법신 최고봉에서도 멈추지 않더니. 이대로 도군까지 갈 생각인 건가?’
문득 예전에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황족 내에서 봉호도군이 될 만한 재목은 대제희뿐이다.’
이제야 이런 소문이 돌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은 온갖 개고생을 해서 간신히 도궁 경지에 올랐는데!
심지어 만들어진 도궁조차 폐허에 불과했는데!
가희는 이미 도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은 발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들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숨을 죽인 채 놀란 얼굴로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희의 몸에서 흘러나온 힘은 붉은 기운을 띈 황금빛 바다가 되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적금색의 불새가 고개를 쳐들며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이어서 녀석은 스스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처럼 가희의 주변을 맴돌았다.
바다와 같은 힘이 실체화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든 호흡과 행동마다 자신만의 길이 녹아있었다.
이것은 입도(入道)의 경지였다.
아홉 개의 경지를 수련하며 완전히 자신만의 길을 갖게 된 것이다.
이도에 몰려든 대영 신조의 힘은 이미 거대한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가희에게 흘러드는 힘의 양은 배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운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여전사의 기질에서, 단아하지만 사람의 영혼과 이성을 단숨에 압도하는 그런 기질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수직으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병목 따위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세 시진이 흘렀을 무렵.
몸 밖으로 흘러나온 방대한 양의 힘은 불바다가 되어 이도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 전체가 불타오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이미 밤이 되었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대낮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흘러나왔던 힘의 바다가 번쩍이며 가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모든 이상 현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남은 건 허공에 떠 있는 가희 한 사람뿐이었다.
마치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진양은 그 어떠한 기운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진양은 멍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도군이 된 건가?”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차이가 이리도 크게 날 수 있단 말인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더 이상 그녀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완전히 다른 층을 돌파했다.
진양이 느낄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그녀가 완벽하게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순간.
실력이 부족한 자들은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자격조차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린 채 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일생을 살아가며 한 강자가 도군으로 승급하는 걸 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그게 대영 신조의 신임 대제라니.
이 정도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며 안줏거리로 삼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현재 가희 정도의 수준이라면 봉호도군과도 비등하게 맞설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가희의 실력은 대영 신조 범위 내에선 무적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진양 역시 대영 신조 내에서는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게 된다.
기분이 좋아진 진양은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기록해두던 소책자를 꺼냈다.
‘어디 보자. 어떤 녀석에게 먼저 복수를 해 볼까…….’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대영 신조 내에는 더 이상 복수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남은 건 전부 대영 신조 밖의 녀석들이었다.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도군으로 승급한 가희는 경지를 온고히 다지기 위해 궁성으로 돌아갔다.
진양도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무지를 벗어나 농땡이를 피운다고 해도 지금만큼은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대놓고 자리를 뜨는 진양의 모습에 위흥조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외에 어사대의 어사들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뭐라고 하진 못했다.
나량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 펼쳐졌었던 모양이구나. 진 대인의 외모에 변화가 생긴 걸로 봐선 수명까지 불태우신 것 같은데. 이미 극도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버티신 것만으로도 쉽진 않으셨겠지…….”
모두들 서로를 쳐다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 누구도 나량이 낯짝이 두껍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나량과 같은 경지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아부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돼지 녀석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달려들었다.
“대인,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도궁에 입성하셨군요. 이제 봉호를 받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요.”
진양은 귀찮다는 듯 녀석을 밀어냈다.
“시끄러워. 그건 그렇고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진양은 흑옥 신문을 꺼냈고, 삼 장 높이의 문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문을 열고 돼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너, 이런 상황 본 적 있어?”
돼지는 넋이 나간 듯 입을 쩍 벌렸다.
“대, 대인……. 그러니까 이게 대인의 도궁이란 말입니까?”
“맞아. 다른 사람이랑은 다르게 조금 크지. 이런 거 본 적 있냐?”
“당연히 없죠…….”
진양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에는 검둥이를 불렀다.
“검둥아, 넌 어때? 이런 거 본 적 있어?”
검둥이의 눈앞에 끝없는 폐허가 펼쳐졌다.
한참 뒤.
검둥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양, 아무래도 넌 부군께서 전생한 건 아닌 것 같아. 여기 이 폐허, 재건만 잘한다면 과거 부군의 도궁보다도 훨씬 더 큰 수준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
전설에 따르면 과거 부군의 도궁은 팔만 리 넘는 혈해 위에 세워져 혈해를 완전히 압도했었다고 하지. 그런데, 지금 네 폐허 도궁은 족히 십만 리는 되어 보인다고.
그리고 한 가지, 신문 이후에 도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이 폐허만 도궁이 아니라는 거지. 이 정도라면 전성기 시절의 내가 가지고 있던 힘을 다 쏟아붓는다고 하더라도 도궁을 전부 세우는 건 불가능할 거야.
장담하는데, 상고를 통틀어 도궁 강자들 중엔 너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거다.”
진양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마수의 힘을 수십 리 크기의 폐허 속으로 주입시켰다.
힘없이 무너져있던 폐허가 들썩이며 재건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일 다경 정도 흘렀을 무렵이 되어서야 큰 구멍이 간신히 하나 막혔다.
진양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재건이라면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재건에 천문학적인 양의 힘이 들어갈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양이 무한한 힘을 저장할 수 있는 해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해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도궁 재건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자. 적어도 신문을 개방하는 것보단 훨씬 더 희망이 보이잖아.’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바로 아직 백옥 신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백옥 신문을 열었는데도 이런 상태라면 상황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적당히 기회가 생길 때 백옥 신문을 박살 내버릴까?’
진양은 흑옥 신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여전히 멍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돼지 녀석을 뻥 차버렸다.
“가서 탕 안 끓이고 뭐 하고 있어?”
돼지는 곧장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대인, 하지만 이건 절 완전히 탕으로 만드셔도 부족하다고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겁니다. 아마 제가 백 마리는 더 있어도 부족할 거예요. 이 정도라면 선초를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진양은 의자로 돌아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힘이 더 필요하다라…….’
사실 진양에겐 비장의 수단이 남아있다.
진양은 성낙진판에 끼워둔 자색 잔월 꺼내 흑옥 신문에 넣었다.
잔월은 진양이 완전히 연화시킨 법보인 만큼 진양에게 속한 힘이다.
잔월이 하늘 높이 떠오르며 맑은 빛이 폐허로 가득한 허공을 비추기 시작했다.
진양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벽에 가 있던 실금이 점차 스스로 복구되는 모습이 보였다.
매우 느리긴 했지만 어쨌든 복구가 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잔월의 빛이 폐허 전체를 비추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크게 낙담할 수준은 아니었다.
진양은 기분 좋게 다시 신문을 거둬들였다.
그리곤 돼지에게 한마디 했다.
“네 녀석이 뭘 원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걱정할 것 없어. 능력만 된다면 곧바로 봉인을 풀어줄 테니까.”
진양은 탕을 한 그릇 쭉 마신 뒤, 눈을 감고 수련을 시작했다.
일전에 해안에 넣어둔 검은 번개를 연화시키다 보니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윤제의 팔을 성불시키며 얻은 기능서가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당시엔 더 급한 불을 꺼야 했고, 무엇보다 파란 기능서였기 때문에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진양은 기능서를 꺼내 살펴보았다.
뇌사인(雷蛇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법(印法)이었다.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살초 공법이었다.
그런데, 기능서를 모두 살펴보고 난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뇌사인은 뇌벌진경과 함께 사용하는 평범한 위력을 가진 공법으로,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그 위력이 결정된다.
그러나 뇌사인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위력에 있는 게 아니다.
뇌벌진경을 익힌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부(虎符)로 만들어져있던 것이었다.
아마 윤제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