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85
무림대회 (6)
“가휘.”
“어?”
“우리, 친구 맞지?”
“아, 왜 또. 무슨 말하려고.”
조금 전 대기실로 찾아온 녀석이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너도 알다시피 본선에 음공 배운 애들이 하나도 못 올라가서 우리 라희 체면이 요즘 말이 아니야. 실적이 있어야 학관에서도 계속 써줄 게 아니냐.”
“잠깐만, 그러니까 네 말은···.”
“결승전 때 금 한 번만 들고 올라가주면 안 되냐? 아니, 잠깐, 잠깐. 일어나지 말고 들어봐. 연주는 안 해도 된다니까? 그냥 들고 올라가서 옆에 두기만 하면 돼. 아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 때 그 놈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럼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나지도 않았을 텐데.
“화화공자가 금을 들었다!”
“와-!”
“암! 화화공자에게 풍류가 빠질 순 없지!”
“화화, 저 새끼 지난 학기부터 맨날 방에 여자들 불러서 연주 들려줄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문 앞에 지나가다 다 들었다고!”
“단 소저, 조심하시오! 놈이 사용하려는 건 최면금이라는 사술이오!”
최면금은 또 뭔데···.
객석 여기저기에서 날아드는 유언비어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우희와 약빈, 두 아리따운 여인과의 공개 입맞춤은 객석에 수많은 안티를 양성했다.
취급만 보면 색마가 따로 없는 수준.
그래도 이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관객들의 외침이 짓궂긴 해도,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즐거움의 빛으로 가득하니.
내 한 몸 희생해서 무림대회의 흥행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단예지는 아니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다.
금 하나 덜렁 들고 등장한 나를 어찌나 싸늘하게 노려보는지 무서워 죽겠다.
“설마 그걸 들고 싸우려는 건 아니겠죠?”
“아··· 그게··· 맞는데요.”
“당신···!”
그런 상황에서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존명이의 전음이 들려온 것이다.
짜증이 안 나고 베기겠어?
-친구. 이왕 들고 올라간 김에 한 곡만 뜯어주라.
-미친놈아, 분위기 안 보이냐? 그리고 비무 중에 전음 걸지 마!
-부탁이다, 친구야!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나, 라희한테 진심이다!
아니, 그렇게 진심이면 지가 열심히 수련해서 출전할 것이지. 자기들은 맨날 어디 으슥한 객실 대실해가지고 할 거 다 하면서 어렵고 쪽팔린 건 나 시키고···.
구시렁, 구시렁.
그래도 미운 정이 들었는지 결국에는 마음에 약해지는 나다.
그래, 진짜 음공으로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대충 수업 때 배운 악곡 하나 결승전 오프닝 이벤트로 보여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야, 알았으니까 전음 그만 보내. 정신없어.
-오오! 너밖에 없다!
난 존명이의 보챔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금 앞에 사뿐히 앉아 자세를 잡았다.
곧 심판의 준비-시작 소리가 들리고, 다음 순간 지난 일 년을 함께 해온 정든 금이 내 눈앞에서 무참히 터져나갔다.
꽈직!
“악! 내 금!”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금마를 향해 외쳤다.
“너무하잖소, 소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너무한 건 당신이야! 이 대회가 장난 같아요?”
-가휘야, 퉁소는 안 가져갔냐?
“몰라, 새끼야!”
“뭐라구요?”
“헉, 소저께 한 말이 아니오.”
“볼수록 무례한 자···. 오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어요!”
그렇게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쐐액!
“헉!”
“도망가는 건 쥐새끼처럼 잽싸네요.”
“소저, 잠시만 진정.”
“설마 음공에 조예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제가 결승전 상대의 성명절기도 안 알아봤을 것 같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난 그냥 오프닝 무대만, 으앗!”
방금 전까지 얼굴이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검면을 놀라서 바라보는 순간,
-가휘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노래라도···.
아오, 저 징그러운 새끼.
난 진저리를 치면서도, 녀석의 전음이 지겨워서 지난 학기 동안 연습해온 비장의 카드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츠박츠.”
“······뭘 한 거죠?”
엇, 이게 아니었나?
설마 대회에서 비트박스 쓸 줄 모르고 몇 주 연습을 빼먹었더니 감을 잃었나보다.
“붑- 풉-. 풉-?”
“······?”
“빈틈!”
“비겁한!”
나도 이러기 싫어!
비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선율과 검광이 오가는 근사한 대결을 기대했는데 금이 박살나는 바람에 다 망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존명이 때문이다. 존명이쉑.
주위를 둘러본다.
객석의 분위기는 이미 난장판이다.
다들 배를 잡고 폭소하는 것이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지만, 결승전다운 장엄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제 분위기 잡기는 글렀어.
지난 약빈이와의 싸움에선 어떤 도발이 오가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사화조차, 지금은 도끼눈을 뜨고 날 쫓아다니고 있으니 말 다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건가요!”
“안 쫓아올 때까지!”
아··· 이렇게 가벼운 시합이 될 줄이야!
물론 시청자들 입장에선 이런 개꿀잼이 없겠지만.
[폴리페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pmk4919 : O튜브각] [2시간소설 : 미궁 연주해주세요 연습했잖아요] [으ㅁ으 : 퉁소는요?]시퍼런 검날을 가까스로 피하며 외친다.
젠장, 정말 존명이놈 말대로 퉁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관객들의 폭소와 사화의 분노한 눈빛 속에서, 난 얼마 전 두 여인에게 공개 입맞춤을 당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순간의 기분을!
정신···나갈 거 같아.
내가 바로 무림 바드다.
난 오프닝만 장식하려고 했는데 예지 소저가 거부한 거예요.
비뚤어질 테다. 이렇게 된 이상 시청률이라도 잡아주마.
[주베 : 포기했어ㅋㅋㅋ] [ㅇㅈㅅ! : 오수철의 먼 훗날] [나쵸요괴 : 바꾸는 girl]곧 수많은 신청곡이 도착했다.
새 창에 해당 노래의 영상을 띄운 나는, 한쪽 눈을 감고 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하지 못하겠어요!”
음공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이곤 : 사화 표정 당황한 거 봐ㅋㅋㅋㅋ] [백우 : 아ㅋㅋ 비무대인줄 알고 올라왔더니 밤무대였고ㅋㅋ]그래봤자 미천한 음공 실력에 입만 나불거릴 수는 없었다.
단예지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 내가 얄미운지 주둥이만 연신 노렸고, 난 입이 찢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답답하고 짜증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
사화와 손속을 겨뤄보니 단박에 알겠다.
쉽사리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기본기는 탄탄했고, 워낙 다양한 무공을 익혀서 그런지 임기응변 또한 훌륭했다.
그렇다고 우희 때처럼 상성을 이용한 꼼수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초식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지금 이상으로 내공 일으키는 것뿐인데···.
그러자니 이틀 전에 본 벽려군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이 이상 실력을 냈다간 그녀가 오늘 밤에라도 진실을 캐내려 숙소로 쳐들어올 것 같다.
뭔가 달리 좋은 방법은 없을까?
휘몰아치는 검풍을 요리조리 피하며 고민에 잠긴 그 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매니저님의 슈퍼챗을 확인한 시청자들 또한,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비굴링 : 와 제압술 아시는구나] [선우6134 : 사화랑 나려타곤 해줘! 실수로 키스 갈겨줘!] [나도몰라잉 : 시시해서 눕고 싶어졌다 ㄷㄷㄷㄷ] [펭귄드림 : 매니저가 방송을 아네ㅋㅋ] [양뽈락 : 키스해! 키스해!]난 정색하며 대꾸했다.
시청률 올린답시고 단예지한테 키스를 하는 순간이 내 제삿날이요, 무림공적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려타곤까지는 허용범위 아닐까?
처음 보는 기술이면 사화도 당황할 테고.
아, 위험해.
뭔가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어.
그 순간 매니저님이 또 한 차례 쐐기를 박았다.
[제압술은 벽려군도 잘 모르잖아.] [100,000] [뽀미님이 후원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뽀뽀하고 노래도 했잖아.] [100,000] [뽀미님이 후원했습니다.]듣고 보니까 그래.
어차피 수천 명 앞에서 바람둥이로 낙인찍힌 데다 학예회 수준의 비트박스까지 했는데 그깟 나려타곤 쯤이야.
난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다는 아담과 이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함 망가져보자!
다음 순간, 난 감정까지 실려 강맹하게 들이닥치는 사화의 장법을 부드럽게 흘려보내며 역으로 그녀의 몸을 잡아당겨 태클을 걸었다.
이게 바로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리!
제대로 된 한 수 없이 요리조리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내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자, 분노로 평정심이 흔들리던 그녀는 잠깐의 당황을 수습하지 못했다.
“아앗!”
마냥 폭소를 터뜨리며 웃던 관객들과 교관들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보여준 수법에 눈을 빛낼 정도였으니.
“과연··· 저 가벼운 모습조차 상대를 방심시키는 허초였다는 건가?”
“유능제강이라···.”
그런 의도까진 아니었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인 것을!
나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제압술을 시전하며 사화의 움직임을 봉했다.
힘이 강할수록 그 반동은 더 큰 법.
순식간에 역전된 힘의 균형에 그녀의 몸은 맥없을 정도로 쉽게 바닥을 뒹굴었다.
털썩-!
“저, 저런!
“와-!”
“화화가 사화를 자빠뜨렸다!”
뭐하는 관객인데 어휘력 저렴한 거 보소!
내 밑에 깔린 사화도 객석의 외침을 들었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서역에는 이런 공격법도 있다 하더이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레슬링 모르시오, 레슬링.”
“읏, 어째서··· 이거 풀어···.”
우희와의 잦은 제압술 훈련으로 상대의 반응이 얼추 예측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내 기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사파도 결국 무림인인건 매한가지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나려타곤을 공격으로 써먹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못했겠지!
그렇기에 단예지를 속박하는 건 속된말로 껌이었다.
이거 의외로 굉장히 쓸 만하잖아?
한편, 발버둥치는 단예지의 목소리는 급격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어, 어딜 만져요.”
“왜 이리 호들갑이오? 팔밖에 안 닿았구만.”
“이익!”
“아이, 쫌 가만히 좀 있어보시오.”
결국 힘겹게 저항하던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염문이나 뿌리고 다니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바보였어요.”
“이제 그대도 그 염문의 중심에 서게 된 것 같소만.”
덩달아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제압을 마친 나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그녀의 혈도마저 짚은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선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외침들이 들려왔다.
“이 놈! 사파의 꽃에게 무슨 짓이냐!”
“껄껄, 잘한다! 사파놈들, 맨날 비겁한 수만 쓰다가 역으로 당하니 우리 심정을 알겠느냐!”
“새끼들아 봤냐! 이게 꽃의 주인 화화다!”
이거, 뭔가 정사가 뒤바뀐 거 같은 반응인데···.
그래도 상관없다. 내겐 든든한 시청자들이 있으니까.
[뽀미 : ㅋㅋ 하란다고 진짜 하네 노빠꾸 인생]뽀미님?
“후··· 이제 어쩌지?”
점혈 당한 단예지를 눈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수치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악적···.”
음적도 아니고 악적이라?
약빈이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고인물 시청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채팅창은 갑자기 추억에 잠기는 분위기가 됐다.
[깨툭 : 그땐 그랬지] [YouCC : 생각해보니까 깐휘는 원래 싹수가 노랬음] [원퉁사 : 손이 곱네요 본방으로 본 1인] [네손잡이 : ㄷㄷ 윗님 나이가?] [누가혼12 : 이제 사화도 플래그 꽂힘ㅋㅋ] [구시렁입 : 공략 완료!]기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니 저도 좋네요. 하.하.
아, 갑자기 현타 온다.
이거 수습이 되긴 하는 건가?
“당신, 지금 당장 혈도를 풀지 않으면!”
“아, 아혈을 깜빡했네요.”
“잠···!”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 분한가보다.
난 다시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후··· 항복하시겠소? 항복한다면 일단 아혈은 풀어주겠소. 알겠으면 눈을 한 번 깜빡이시오.”
깜빡.
“그럼 믿고 풀어주겠소.”
툭툭-.
아혈을 풀어준 순간, 그녀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응, 이거 욕하려는 거다.
“이 똥···!”
“똥?”
다시 아혈이 점해진 그녀 앞에서 한쪽 눈을 찡긋 감는다.
[이어홍 : 저요저요 똥물에 튀겨 죽인다는 거 아님?] [RigE : 아ㅋㅋ 무협 단골멘트지] [은태양 : 아혈 풀고 누구 똥인지 물어봐요 빨리] [strichkode : 누구 똥인지 알아서 뭐하게 ㅋㅋㅋ] [근뎅 : ㅋㅋㅋ채팅창에 미친놈이 있네]언제나 상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시청자들의 정신 나간 드립에 피식 웃던 그때,
투툭-.
무언가 내 어깨를 찌르고 지나갔다.
“엇?”
웃는 모습 그대로 내 몸이 덜컥 멈췄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두 눈을 깜빡이는 내게 서늘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역전인가요?”
아혈이 점해졌을 단예지가 어느덧 두 눈을 이글거리며 내게 이죽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팔다리까지 전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답은 하나다.
“설마 스스로 혈을 해제할 수 있소?”
“이런, 아혈을 빼먹었네요.”
“잠…!”
읍읍!
이렇게 복수를 하시겠다?
그러나 눈을 부라리던 나는 이어진 말에 겁먹은 강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백도무림과 원수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중원 여인들을 위해 그대의 아랫도리를 베겠어요.”
아, 아 잠깐만. 그것만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
미친 듯 두 눈을 깜빡였지만 그녀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주워 돌아온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 다리 사이로 검을 휘두른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가, 도울게요!
-휘 랑!
얘들아, 괜찮아. 나한테는···.
쐐액-!
“단전 리프레쉬!”
“뭣! 앗! 이 남자 또? 앗?”
투닥, 투닥.
다시 한 번 같은 과정을 거쳐 사화의 혈도를 점한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꼼꼼히, 신투표 특제 점혈법을 사용해서.
“후···.”
확실히 제압을 마친 뒤에야, 난 이마의 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더워서 난 땀이 아니라 잘릴 뻔해서 난 땀이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헐레벌떡 비무대 근처까지 왔다가 주의를 받고 돌아가는 우희와 약빈이가 보였다.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누구보다 쉽게 점혈을 풀 수 있는 주제에 점혈만 믿고 방심하다니.
아무리 그녀의 감정적인 허점을 파고들었다고는 하나, 그녀 또한 사파의 제일가는 기재다.
간담이 서늘해진 나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사화를 번쩍 안아들고 비무대 가장자리로 향한다.
이번에는 언제든 다시 점혈을 걸 수 있도록 그녀의 혈도 위에 손가락까지 올려둔 채로.
“이놈! 사화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화화가 사화를 납치한다!”
일부 관중의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비무대 가장자리까지 일직선으로 걸어간 나는,
“본의 아니게 실례 많았소. 그리고 이건 빈아의 복수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비무대 밖으로 떨어뜨렸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본다.
“조가휘, 승!”
“이게 무슨 결승전이야!”
“으하하, 속이 다 시원하구나! 체면 차리기에 급급한 비무만 보다가 간만에 재미있었다!”
“저런 놈이 어째서 정파에!”
가지각색의 함성 속에 비무대를 내려와 우희와 약빈이에게 향한다.
그 때까지도 사화는 장외에 멍하니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해혈은 그녀를 던지는 순간 이미 마쳤음에도.
충격이 크겠지.
나 같아도 그럴 거다.
약빈이와 준결승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싸워놓고 이런 결말이라니, 얼마나 허무할까.
하지만 곧 내 코가 석자임을 깨닫는다.
“가가. 내가 다른 여자한테 제압술 쓰지 말랬죠.”
“조가휘, 죽을래?”
난 서늘한 웃음과 함께 다가온 두 여인에게 옆구리와 엉덩이를 포함해 여기저기를 꼬집혔다.
뭐지, 이 상처뿐인 승리는?
···그래도 이걸로 벽려군의 의심이 더 커지는 건 막았으니까. 그럼 된 거지.
그것이 크나큰 착각임을 깨달은 것은 우승자 피로연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뒤였다.
“···응?”
[홍(紅)]우편함에 들어있던 서신에는 하오문주의 딸, 홍서현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성된 비밀 서신에는, 액괴다루 사업의 근황 외에도 한 가지 소식이 더 담겨 있었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이.
[검후 여협께서 말씀을 전하셨어요.] [은공께 급히 전할 말이 있어요. 계해일 유시(17~19시)에 평소 만나는 다루에서 기다릴게요. 은공께서 오실 때까지···. -려군]···젠장?
그토록 피하고 싶은 사태가 결국 발생했다.
이럴 거면 결승전에서 비트박스는 왜 했고, 거기는 왜 잘릴 뻔했단 말인가!
뒤늦게 억울함이 몰려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조가휘한테 온 게 아니라 신비고수 석율한테 온 거니까.
그나저나 계해일이 언제지···?
잠시 날짜를 계산하던 내 얼굴이 사색이 됐다.
“오늘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