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7
7. 아첼레란도 (Accelerando, 점점 빠르게) -2
두 천재와 바보 하나를 한 자리에서 만난 것도 솔직히 놀라웠는데, 자리를 비웠던 정석 선배가 데려온 인물에 나는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마에스트로 마주혁
현 M스튜디오의 원장이며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그가 내게 직접 M스튜디오에 들어오길 권했다.
나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 사실을 지휘자 마주혁과 정석 선배만 있는 원장실에서 털어놓자 그는 말했다.
“그럼 이성현 학생이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그냥 연습실에 방문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나와보세요. 그리고 돈 문제는 이 원장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무려 M스튜디오를 연습실처럼 생각해도 된다니···.
이 정도까지 편의를 봐주셨는데 또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날, 나는 곧바로 저녁상에 모인 부모님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혼자 예고를 준비하고 있던 것.
M스튜디오에 방문했던 일.
그리고 등록금 일부까지 교장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말했다.
처음에는 미묘해 보였던 부모님들의 표정은 금세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날 밤.
드디어 나는 정식으로 미향예고에 입시원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
딩, 띵!-
쇼팽의 ‘흑건’을 가뿐하게 완곡한 나는 조용한 연습실을 쭉 둘러보고는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M스튜디오에 처음 방문했던 날이 열흘이나 지나 벌써 찬바람이 불어오는 날씨가 되었다.
최고 속도로 연주하려면 있는 힘껏, 손가락이 다 저리도록 무리해야 했던 흑건.
하지만 열흘 사이 손가락에 자리했던 피딱지가 사라지고 얇은 굳은살이 베여 이젠 손 풀이용 곡이 되어버렸다.
무려 10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매일 M스튜디오에 나와 피아노를 연습했다.
서서히 잡혀가는 몸과 팔의 근육.
아직 전성기와 비교하면 볼품없는 몸이었지만,
이 정도면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쳐 왔던 아이들과 얼추 비슷하게 윤곽이 잡혔다.
예대에 다닐 때, 4년간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던 경험이 다시 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똑똑,
내가 열심히 팔을 주물럭거리며 성장을 확인하던 찰나, 짧은 노크와 함께 내 개별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연습은 안 하고 뭐 하니?”
그 한마디와 함께 고개를 빼꼼 내미는 사람은 최지은이었다.
“어어, 팔이 조금 결리더라고. 그래서 주물러주고 있었어.”
여중생에게 이상한 아저씨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받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변명 같은 걸 내뱉었다.
이틀 전에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가 싸늘한 시선을 받아본 터라 더 그랬다.
2030년에는 진짜 유행하는 조크였는데···.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제 나와. 30분 뒤에 원장선생님 레슨이야.”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어?”
나는 지은의 말에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향하는 곳은 1층의 레슨실.
널찍한 공간에 강의실형 의자가 다닥다닥 놓여있고, 발목까지 오는 턱을 넘어서면,
곧바로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연주하기 위한 좌석이 준비된 구조였다.
“여기 앉아있어.”
“어디 가는데?”
“몰라도 돼.”
익숙하게 가방을 의자에 툭 내려놓고 앞문으로 나가는 최지은.
그녀는 M스튜디오 소속 다른 교수님에게 주기적으로 레슨을 받다 보니 이 장소가 익숙한 것 같았다.
그녀 말고도 김민호와 박은호 역시 담당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는다.
나만 가끔 얼굴을 비추는 정석 선배에게 짧은 지도를 받을 뿐, 담당해주는 교육자가 없었다.
뭐, 나야 21년간 쌓아온 노하우가 있으니 큰 상관은 없었지만.
“자. 아직 20분 넘게 남았으니까. 이걸로 찜질 좀 하고 있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최지은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아이스팩을 감싼 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만들려고 나갔던 거야?”
“아니,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김에 덤으로.”
내가 갑작스러운 친절에 놀라자 새침하게 잡아떼는 최지은.
첫 만남 이후 나와 마주칠 때마다 뾰로통한 얼굴이 되는 최지은이었지만, 역시 남을 곧잘 챙겨주는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도 막차 타고 돌아갔다면서?”
“엉? 어 그랬지. 으으 차가워라.”
나는 그녀가 준비해준 수건으로 몸 이곳저곳을 냉찜질했다.
“스튜디오는 몇 시에 왔는데?”
“아침 8시쯤? 그저께부터 교장 선생님이 입시가 코앞이라고 학교는 계속 빠져도 좋다고 해주셨거든.”
“그러면 이틀 전부터 계속 밤 11시까지 연습만 했다고? 너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잖아”
요 일주일간 버스비랑 시간을 아끼느라 하루 두 끼니를 삼각김밥으로 해결하고 있긴 했다.
근데 그건 얘가 어떻게 안데,
내가 정석 선배랑 친해서 질투하는 중 아니었나?
“너 그런 식으로 계속 무리하면 실기 날 후회할걸.”
최지은은 눈썹에 잔뜩 힘을 주며 무슨 무서운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 말했다.
그 앳된 얼굴로 인상을 써도 그다지 무섭진 않았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
“걱정한 거 아니야.”
그래서 나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최지은은 더 얼굴을 꾸깃꾸깃하게 만들며 답했다.
드르륵,
그리고 마침 그때 뒷문이 한 번 더 열리며 박은호가 들어왔다.
그는 딱 한 칸 떨어져 앉은 나와 최지은을 잠시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반대편 의자에 착석했다.
이윽고 마에스트로 마주혁과 그의 제자인 김민호가 함께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오늘의 입시 레슨이 시작되었다.
“학생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미향예고에 가면, 교사진과의 피드백뿐만이 아니라 학생들끼리의 피드백도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레슨 시작부터 미향예고의 가장 특색있는 지점을 짚어주는 원장님.
미향예고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연주만 잘하면 만사가 능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의 연주를 듣고 그에게 적합한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가.
그런 동기 피드백, 선후배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점수에 반영하는 것은 미향예고의 전통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미향예고에서 도태되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피드백이기도 했다.
취미로만 피아노를 치던 사람에게 타법과 악보를 분석해보라고 하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 후로도 마에스트로 마주혁은 미향예고의 특징들을 하나, 둘 짚어주었다.
아예 답안지를 읽어준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로 마주혁 원장님이 짚어주는 부분들은 실제 미향예고 생활을 기억하는 나보다도 정확하고 자세했고 아주 짧은 1시간이었지만, 나는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강의를 마치고 퇴장하는 원장님과 김민호.
나는 방금 들었던 부분들을 잊지 않도록 그 열심히 메모하는 중이었다.
“여, 우등생 앉은 자세가 꽤 깔끔해졌다?”
“어? 정석 선, 생님!”
어느새 다 나갔는지 홀로 레슨실에 있던 나를 찾아온 정석 선배.
마침 메모도 끝나가던 참이었다.
선배는 밥을 먹자며 나를 데리고 나갔고 인사 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정석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오늘은 좀 색다른 레슨을 해볼까?”
“색다른 레슨이요?”
“그래. 성현이 너 요즘 매일 12시간 이상 연습실에만 있다면서.”
“그게 실은요. 연습이고 뭐고 그냥 재미있어서 그랬어요.”
미소를 지으며 그리 답하는 나.
그래,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입시 고사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냥 내가 즐거워서 피아노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그래. 내가 아는 너라면 그럴 것 같긴 했어. 크흠. 그런데 성현아 연습도 물론 좋긴 한데 혹시, 라이벌이 어떻게 연습하고 있는지 한번 보고 싶지 않니?”
그런데 놀라운 제안을 내놓는 정석 선배.
“예. 그래도 돼요?”
연습하는 모습을 허락 없이 엿보는 건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이다.
하물며 라이벌의 연습을 관람하다니.
내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자 정석 선배는 주차장에 있던 차에 오르며 말했다.
“응. 괜찮아. 민호가 자기는 상관없다고 하더라고.”
바로 언급되는 이름 김민호.
그걸 듣자마자 나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민호 정도면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일 테니까.’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익숙하게 선배 차 조수석에 올랐다.
“자 그럼, 뭐 먹고 싶니?”
“치느님이요.”
나는 선배의 질문과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또? 라고 하면서도 크게 웃었다.
***
정석은 레슨을 받는 민호의 바로 옆에서 역동적인 박자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녁을 다 먹자마자 민호의 밤 레슨을 관람하게 된 성현이.
그 아이는 착실하게도 레슨실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연주에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앉았다.
그리고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김민호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무슨 연예인을 구경하는 팬 같아서 좀 재미있었다.
“김정석 선생님이 웬일로 레슨 참관을 하세요?”
그때 정석에게 말을 걸어오는 여선생님.
원장님이 없을 때마다 민호를 맡아주는 레슨 교사였다.
“성현이가 민호의 연주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 궁금해서요.”
“아. 저 아이요? 근데 정말로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었대요? 다들 신기해하더라고요. 무슨, 오래 피아노를 친 사람처럼 연주한다고.”
“저도 솔직히 그게 궁금하긴 해요. 대체 어떻게 취미로만 연주했다는 아이가 그렇게 치는지.”
“정말로요.”
여선생님은 정석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다시 민호의 연주를 집중해서 들으며 한숨을 픽 내쉬었다.
“그나저나 우리 민호가 걱정이에요.”
“예? 민호한테 걱정이요?”
“네, 그게 우리 민호한테 좀 나쁜 습관이 있어서요.”
나쁜 습관이라, 정석은 여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집중해서 다시 들어봐도 ‘역시 김민호’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연주는 완벽했다.
“피아노는 깔끔한데요?”
“아니, 선생님 잘 봐보세요. 음. 지금이요.”
“예?”
정석은 당황하면서도 여선생님의 말에 맞춰 민호를 바라보았고,
그제야 슬며시 아주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눈에 밟혔다.
“애가 손가락이 워낙 길어서 그런지. 손목을 써야 하는 부분도 그냥 손가락만 움직여서 연주하더라니까요?”
손목 스냅은 피아니스트에게 있어 일종의 무기다.
연주 자체는 나무랄 부분이 아예 없을 정도로 완벽했지만, 손목 스냅을 타고난 손가락의 길이로 커버해 버리니 훗날 그게 불가능한 곡을 만났을 때, 반응이 느려질 수도 있다.
“저도 2년이나 애를 옆에서 지켜보고 나서야 알았고 자기 말로는 원장님에게 몇 번 지적을 받았다는데, 연주에 몰두하면 습관이 나오더라고요.”
“흠, 그러네요. 굳이 다양한 무기를 쥘 수 있는 손으로 하나만 고집하는 건 손해죠.”
“그렇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선생과 정석은 머리를 모아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당장 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때 레슨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민호를 관찰하던 성현이가 보였다.
그래서 잠시 생각도 환기할 겸 여선생님과 정석은 성현이에게 향했고
“그래 성현아. 민호의 레슨을 본 소감은?”
“음.”
성현이는 연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일 테니 정석은 별 기대 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는 성현이.
“완벽했어요. 연주는 완벽했는데 그으, 몸을 움직이는 부분이 좀 정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 더 음. 그래요. 손목을 더 움직였으면 연주가 더 편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방금까지 자신과 여선생님이 고민하던 민호의 ‘나쁜 습관’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성현이.
“왜요? 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성현이 눈에 띄게 당황할 정도로 정석과 여선생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딩-
심지어, 그 목소리를 멀찍이서 들은 김민호 본인마저 연주를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과 성현이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흔쾌히 성현이에게 레슨 관람을 허락해줬던 민호는, 그 바로 다음 날부터 성현이가 자신의 레슨을 구경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11월의 입시 고사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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