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70
마탑 소속이라는 걸 어필하고, 적당히 친절한 말을 덧붙이면 홀랑 넘어올 줄 알았는데 상대방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심지어 남자는 윙보트를 처음 만진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하게 하늘을 날아올라 부유섬 군락지로 날아가 버리기까지 했으니.
옆에서 놈의 행적을 감시하면서 기회를 엿보려던 바이젠의 노력도 물거품이 된 셈이다.
“마음이 살짝 급했어요. 실수했군요.”
바로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순순히 넘어오는 기색에, 성급하게 본심을 드러내 버렸다.
닉스의 휘장.
듀리스 공방에서 생산된 최고급품의 아티팩트. 이제는 생산이 중단되어서 다른 보유자에게 넘겨받지 않는 이상 가질 수도 없는 물건이다.
손에 넣을 수만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바이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성을 앞서는 탐욕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만약 바이젠의 말 때문에 남자가 그 휘장이 상당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만큼 짜증 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 일련의 대화과정이 철저하게 레녹의 손안에서 주물러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바이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수틀렸다면 지금 당장 손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딘가 인상이 희미한 마법사의 말은 일견 합리적이다.
휘장을 가지고 있는 레녹이 한번 바이젠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시 기회를 노리기는 쉽지 않을 테니.
하지만 바이젠은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봅시다. 자치령의 땅은 한정되어 있으니 기회는 또 오겠죠.”
“흠…….”
보기 힘든 귀물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앞서고 말았지만, 바이젠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아직 자치령의 초입. 부유섬 군락지에 제대로 입성하지도 않은 상황이다.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가는 괜히 휘장도 갖지 못하고 역으로 자치령에서 추방당할 위험이 있었다.
성급하게 행동했다가 두가지 목적을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탐해서는 안될 터.
방금 레녹에게 놀아나기는 했지만, 바이젠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만큼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화염초를 찾는 일에 집중합시다. 저쪽도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이곳을 찾았을 테니, 자치령을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마주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도록 하죠. 고생하셨습니다.”
친한 듯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이 마법사 놈도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지만, 바이젠은 억지로 감정을 누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레녹이 가지고 있던 그 아티팩트가, 닉스의 휘장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 바로 이 놈이었으니까.
보아하니 아티팩트를 알아보는 안목이 상당한 모양인데, 같이 돌아다니다 보면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르지.
바이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100만 셀을 던지듯이 청년의 손에 내려놓고 윙보트의 운전대를 잡았다.
곧이어 두 대의 비행선이 부유섬을 향해 날아오르고, 뒤이어 자욱한 안개가 절벽을 보이지도 않게 만들었다.
* * *
우우우우웅!!
윙보트의 운전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새벽의 어둠이 가시고 이제 막 해가 밝아오는 순간.
안개와 구름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며 온 하늘이 따스한 정광으로 밝게 빛났다.
수십 개의 부유섬을 따라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윙보트를 타고 내려앉는다.
“후우…….”
차가운 공기를 그대로 맞고 있으니 연초가 피고 싶어진다.
구름을 가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분은 레녹으로서도 신선한 경험이다.
비행선의 크기가 다른 만큼 지구에서 비행기를 타본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어디부터 갈 생각인가요?]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같이 그 풍경을 구경하던 다비가 물었다.
“일단 자치령을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알아두는 걸 목표로 할 생각이야.”
레녹은 마약왕의 금고가 어디 있는지, 또 차기 등대지기가 어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필레놈 자치령에 ‘등대’가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막상 그 장소 역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비처에 숨겨져 있었으니.
자치령에 속하는 부유섬은 크게는 발칸의 한 영역에 해당하는 것부터, 작게는 간신히 발 디딜 땅까지 수백 개가 넘는 터라 그 모든 섬을 일일이 둘러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니가 건네준 자료를 통해서 자치령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문서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의 차이는 극심할 터.
일단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덩치가 큰 부유섬을 돌아보면서 이곳의 분위기와 환경을 체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혹시나 저쪽에서 무언가 반응이 있는 것 같다면 곧바로 알려줘.”
[알겠습니다.]굳이 지금까지 다비를 소환해 놓고 있는 이유도, 학회 당시 그랬던 것처럼 등대지기가 보낸 전령을 다비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치령을 돌아다니다 보면 먼저 저쪽에서 연락을 취해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장 가까운 부유섬을 향해 운전대를 틀었다.
일단 숙소를 잡고 연락망을 새로 트는 것이 우선이다.
도시 간 통신, 특히 발칸과 필레놈 사이 통신은 지금 시국에서 어렵지만 또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제니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새로운 땅에 홀홀 단신으로 도착했으면서도 레녹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게만 보였다.
자치령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부유섬 군락지 (2)
“자자, 술사님들에게 꼭 필요한 부적들이 여기 많습니다!”
“마시면 머리를 맑게 해주는 총명주가 왔습니다요!”
“한번 보고가시면 절대 후회 안하실 겁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어느 부유섬.
레녹은 불을 붙이지 않은 연초를 입에 물고 시장 한복판을 거닐고 있었다.
한때는 거대도시 발칸과의 치열한 대립에 휘말렸던 지역이지만, 전쟁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치령의 거리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술사들에게 환영받는 지역이기 때문일까.
자치령에서 보이는 마력사용자들은 발칸의 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밀도가 높았다.
절대 인구로만 따지자면 그 숫자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커봤자 구역 하나 정도의 섬 몇 개를 둘러싸고 아웅다웅하다 보면 싫어도 몸을 부대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연스럽게 자치령의 상권이나 시장 역시 외부인, 특히 술사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발달해 있었다.
지금 레녹이 들린 시장에서도 평범한 민간인보다는, 술사들을 대상으로 한 호객행위가 주를 이룰 정도.
물론 그중에서 레녹의 눈에 찰 만한 고급품은 극소수였지만, 레녹도 신기하게 생각할만한 기발한 물건들은 꽤 많았다.
예를 들면, 정령에게 입혀줄 수 있는 영성을 가진 모직으로 만든 옷이라던가, 아니면 소환수가 좋아하는 간식 같은 물건도 있었고.
사령술사들을 위한 시체보존제, 저주술사들을 위한 인조모발이나 안구같은 물건들은 레녹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괴했다.
“마력조작을 연습하는데 도움이 되는 큐브입니다! 하나 보고 가시죠!!”
“…….”
잠깐 걸음을 멈췄던 레녹의 손에는 싸구려 수정으로 장식된 큐브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력을 주입하면 떠오르고, 주입한 마력의 강약변화에 따라 큐브가 이리저리 회전하며 색깔을 바꿔간다.
마력과 부유능력이 큰 관계성을 가지는 이곳에서만 활용 가능한 장난감인 셈이다.
잘칵, 잘칵.
몇 번 돌려보고 나자 곧바로 감이 온다.
레녹의 손 위에서 움찔거리던 큐브가 이내 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회전하더니 순식간에 색깔을 맞췄다.
어깨 위쪽에 띄워놓고 심심풀이 삼아 큐브를 돌려가며 계속 거리를 거닐었다.
자치령에 도착한지 어느덧 사흘째.
이제는 이 난잡한 풍경에도 익숙해졌지만, 의외로 레녹이 얻은 소득은 크지 않았다.
자치령이라는 이름답게 이 부유섬 군락지는 최소한의 규칙을 제외하면 거주민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춰서 다양한 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체계화된 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곳 필레놈 자치령에 존재하는 부유섬의 가짓수는 크기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족히 수백 개가 넘는 섬이 분포해 있는 데다, 이해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자욱한 안개 때문에 그 섬들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아예 작은 부유섬을 통째로 하나 사들여서 온갖 보안술식과 은폐술식을 걸고 위치를 감추기도 한다고.
마약왕이 자신의 금고를 이곳에 숨긴 이유는, 단지 약재를 보관하기 용이한 환경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요 며칠간 다양한 정보들을 듣기 위해 일부러 사람 많은 곳을 골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매입할 수 있는 부유섬은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비좁은 섬에 한한다.
두번째, 부유섬을 사유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치령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세번째, 자치령에서 약재를 보관하기 위해서는 특수제작한 금고가 필요하며, 그 금고를 제작하는 장인은 자치령에 단 한 명뿐이다.
고작 이것만으로는 마약왕의 금고를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레녹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금고를 제작하는 장인이라면 틀림없이 그동안 제작한 금고들에 대해 기록장부를 남겨놓았겠지. 일반적으로 금고 장인들이 자신들의 제품에 일련번호를 붙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사범위를 좁힐 수 있다.’
기록장부의 일련번호를 통해 금고 제작을 의뢰한 날짜와 자치령 정부에서 부유섬 매입을 허가받은 날짜를 대조하면 숨겨져 있는 섬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섬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사유지로 사용되며 약재 저장 금고를 지닌 섬의 개수를 특정해 낼 수 있을 터.
‘이해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상승기류가 뻗치는 범위를 재단하고, 섬과 섬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들을 계산하면 수색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물론 마약왕이 자치령의 규율 따위 무시하고 아무 섬이나 골라잡아 자신의 금고를 숨겼을 가능성도 존재하겠지만, 레녹은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위장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함 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가명이나 가짜 신분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을 굳이 룰을 어겨가면서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도 그리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그나마 탐색 범위를 좁힐 수 있는 방안 중 하나일 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같다.
은폐술식을 떡칠해놓았다고 하더라도, 레녹의 마력감응력이라면 이상을 눈치챌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진 다음의 일일 터.
결국 윙보트를 타고 자치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 시간과 방법이 없다면 이런 식의 반복작업을 통해서라도 후보를 색출해야겠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녹은 계속해서 자치령 곳곳을 돌아다니며 더 나은 대안을 물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마스터.]“아직도?”
[네. 아직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그가 자치령에 도착한 직후부터 따라붙기 시작한 시선을 제외하면.
“흠…….”
레녹은 근처의 과일가게의 벽면에 슬쩍 등을 기댄 뒤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전히 그의 마력감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비가 그 시선을 명확하게 느끼고 있다면 상대는 하나뿐이겠지.
차기 등대지기.
그녀는 자치령에 도착한 순간 레녹의 존재를 인지했으면서도 그에게 접근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먼저 저쪽을 찾아오기를 바라는 건가?”
[어쩌면 아직 마스터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그럴 리가. 등대지기가 가지고 있는 천견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군.”
마드레아 팔시어와 차기 등대지기의 격차를 생각하면 레녹의 변장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얼굴과 체형,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마력패턴까지 통째로 변조하는 알지 못한다면 정작 저쪽에서 레녹을 혼동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면…….]“아니, 일단 내버려 둬.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저번에 등대지기가 보냈던 독수리 형태의 전령은 다비를 본 적이 있으니, 그녀가 변장을 풀고 새끼여우 형태의 모습을 드러내면 알아보겠지만 당장은 그럴 이유가 없다.
감지권에 잡히지 않는 텅 빈 감각을 뒤로하고 레녹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거대한 초원. 섬의 일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한 면적에 자리 잡은 약초밭.
자치령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해서 자라는 몇몇 특이 약재들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하는 거대한 플랜트 시설.
크기가 큰 부유섬은 발칸의 영역 하나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주홍빛 노을이 바다 아래쪽을 비추며 천천히 가라앉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의 입장에서는 노을이 아래서부터 얼굴을 비추는 셈이다.
쉽사리 볼 수 업는 경관 속에서 레녹은 다른 이들과 함께 약초밭 플랜트 시설 앞에 섰다.
괴팍한 인상을 가진 늙은 여인이 나와 사람들을 죽 둘러본 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이 노친네를 찾아주신 분들이 이렇게 많다니 일손이 부족할 일은 없겠구려.”
“…….”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이들이 보일 정도.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두드리면서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밭을 가리켰다.
“사전에 이미 다 알고 오셨겠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하도록 하지.”
“동북쪽 플랜트에서 관리하는 야월생목은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지는 이 시간에만 꽃이 피는 아주 특이한 식물이네. 이 꽃은 인간의 감각계를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선천적인 마력감응력을 키우는데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
“다만 야월생목의 꽃을 떼어내는 순간 정밀한 마력조작을 통해서 생명력을 붙들지 않는다면 바로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바로 이 일에 뛰어난 술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요.”
“이 노친네를 도와 야월생목의 꽃을 일정량 이상 채취한 술사분께는 약속대로 플랜트에서 관리하는 약재 중 원하시는 샘플을 구매할 기회를 드릴 테니 부디 힘내주시길.”
말이 길었지만, 지금 레녹이 하고 있는 일은 간단하다.
일손이 부족한 곳에 힘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아 챙기는 것이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처럼 단순화된 노동방식이었지만, 자치령에서 이런 식의 일 처리가 자리 잡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인력에 비해 집중되는 자본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어지자 외부인, 특히 술사들의 힘을 적극적으로 빌리는 풍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금 노인이 말한 야월생목처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그것도 술사의 힘을 빌려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 플랜트에서 자라는 야월생목은 비싼 값에 비해 그렇게까지 희귀한 약초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플랜트의 일손을 거들어주면서 얻을 수 있는 희귀약재의 샘플 구입 권한이다.
레녹이 원하는 것은 이 약초 플랜트에서도 상대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바질리스 버섯.
건강이나 술식적으로 별다른 효능이 없음에도 한 송이에 백만 셀을 호가할 만큼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물건이지만 레녹이 이 버섯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희귀한 약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바질리스가 레녹이 찾는 말라베스와 같이 ‘무너진 섬’에서만 자라다가 단종되어 버린 물건이기 때문.
약재보관이 용이한 이 플랜트에서만 그나마 몇 송이가 남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손에 넣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마약왕이 말레베스와 같은 무너진 섬에서 자란 약재들을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면, 바질리스도 이미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걸 바탕으로 추적을 시작하면…….’
색적계열의 고유마법중에서는 동질의 마력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와 비슷한 마력의 위치를 찾아내는 마법이 존재한다.
물론 어중간한 마법따위로는 은폐술식과 보안술식을 뚫어내고 그 안을 엿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천견의 능력이라면 어떨까?
“이런 곳에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막 걸음을 옮기려는 사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바이젠이 레녹을 보며 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그쪽도 금방 이곳을 찾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희귀한 약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이 플랜트를 비롯해서 세 군데 정도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설마 모르시는건 아니겠죠. 그런데, 잠깐…….”
예리한 눈으로 레녹의 코트자락을 훑어보던 바이젠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코트 깃에 달려 있던 닉스의 휘장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레녹은 그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척 여유롭게 말했다.
“아, 그 장신구는 다른 곳에 보관해 뒀습니다. 마법사님의 말을 듣고 나니까 들고 다니기가 겁이 나더라구요. 하하.”
“그, 그렇군요…….”
바이젠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그 말끔해진 입매가 역으로 그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괜한 말을 지껄여서 레녹이 그걸 숨기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레녹은 그런 심정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는 척 대놓고 바이젠의 속을 끓였다.
“네. 부모님이 남겨주신 물건이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안전하게 다룰 필요가 있더라고요. 바이젠 님께는 감사할 따름이죠.”
“……제가 도움을 드린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먼저 실례하죠.”
표정관리가 안된다는걸 자각하고는 있는지 바이젠이 고개를 휙 돌렸다.
뻣뻣한 걸음으로 약초밭을 걸어가는 바이젠의 뒷모습을 본 레녹이 피식 웃었다.
화염초라는 약초를 찾고 있다고 하더니 그 역시 돌고 돌아서 이 플랜트까지 온 모양이다.
레녹은 바이젠에 대한 관심을 접고 곧바로 다른 방향을 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릎까지 오는 작은 진갈색 묘목이 섬의 외곽을 따라서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수면 아래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해가 주홍빛 노을로 변하고,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노을빛이 플랜트를 비추기 시작하자 묘목이 꿈틀거리며 제각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술사들이 재빠르게 야월생목의 꽃을 채취하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바로 수십송이가 넘는 꽃이 채취되었지만 그 중 멀쩡히 살아남은 건 세송이도 되지 않았다.
형편없는 결과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어려운데?”
“아까 그 노인이 음흉하게 웃던 이유가 있었군.”
주위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레녹은 가만히 근처에서 채취에 성공한 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술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레녹의 마력감응력은 꽃의 뿌리 부근에서 미묘하게 꼬인 마력의 흐름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꽃의 줄기가 끊어지는 순간 마력을 미묘하게 꼬아 생명력의 유출을 막는 건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도 막상 제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울 만큼 미묘한 매듭이다.
생명력의 유출을 막을 만큼 마력을 묶어놓으면서도, 또 꽃을 완전히 압박하지 않는 미묘한 경계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겠지.
“쉽지 않죠?”
“…….”
바이젠이 은근슬쩍 레녹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슬슬 짜증이 치밀 지경이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샌가 화사하게 피어오른 꽃 두 송이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요령을 알고 있어도 막상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저같은 경우에도 열번 시도해서 두번 성공할까 한 정도니까.”
그는 레녹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보란 듯이 야월생목의 꽃을 흔들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요령을 가르쳐드릴 수 있기는 한데…….”
이제는 그 욕심을 숨기지도 않는다.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기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레녹은 바이젠이 지껄이는 말을 무시하고 야월생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잉……!!
가벼운 마력의 회전과 함께, 너무나도 쉽게 레녹의 손 위에 올라온 꽃 한송이.
노을빛을 받은 꽃은 손바닥 위에서 조금도 생기를 잃지 않은 채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