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9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즉에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나갔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염화능력자의 선천적인 화염내성이 여지껏 그를 멀쩡하게 붙들어매고 있었다.
레녹은 짧게 혀를 차고는 천천히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남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손의 악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에 그의 발버둥을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정말 허약한 몸뚱아리가 따로 없었다.
레녹이 손을 놓아주자마자 남자는 가죽자켓을 벗고는 바닥에 몸을 미친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불꺼!!”
“창고에 옮겨붙으면 끝장이야!!”
다른 이들이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창고 안쪽의 수돗가에서 물을 떠와 그에게 들이붓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아파! 아파!!”
“정신차려 이 새끼야!!”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난리를 피우는 사이 레녹은 운전석 문을 열고 세이지에게 말했다.
“그쪽이 여기 있으면 될 일도 안되겠군. 이만 가봐.”
“아, 알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듯이 재빨리 운전대를 잡고 사라지는 세이지의 차를 보면서 레녹은 시간을 체크했다.
오후 7시.
지금부터 하루하고도 반. 버텨야 하는 시간은 모레 대충 모레 새벽까지.
특허청이 문을 여는 시간이 아침 8시라고 가정하면, 최소한 그때까지는 갱단의 습격으로부터 샘플을 지켜야한다.
광활한 창고부지를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워보이는 일이었지만 레녹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신약 샘플만 지켜서 특허청으로 가져가면 되는 일이야.’
창고를 지키기 위해 고용되었다는 다른 사람들과 레녹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제약회사에서 그에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특허청이 열리기 전까지 샘플을 회수해서 제출하는 것 하나뿐이다.
그 과정에서 갱단과 충돌하는것은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샘플이 보관되어있는 창고는 알 바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창고를 통채로 내주더라도 샘플만 지켜내면 그만이었다.
말한김에 레녹은 샘플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창고 안쪽으로 향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지나갈때마자 움찔거리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전력이 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냥 없는사람 취급하고 레녹이 할 일을 하는것이 나았다.
먼지가 쌓인 문을 열고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새하얀 박스에 담긴 의약품 샘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투명한 비닐로 덮여서 샘플이 손상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무언가를 보관하고 관리하기에 좋아보이는 환경은 아니다.
아므낙 제약회사 역시 구의원의 압박에 시달리다보니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은 이 창고에다 샘플을 숨겨놓을수밖에 없었겠지.
세이지가 미리 이름을 말해주었던 만큼 레녹은 어렵지 않게 그들이 말한 신약 샘플을 찾아냈다.
작은 시험관처럼생긴 병 안에 담긴 푸른빛의 액체. 액상형으로 만들어진 샘플 세 병.
창고에 숨겨야 될 것을 감안하여 최소한의 예비만 남겨둔 모양이다.
레녹은 잠시 그것을 잡고 고민하다가 결국 시험관 세개를 모두 집어 품안에 밀어넣었다.
밖에서 아직도 물을 뿌리겠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믿느니,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것이 나을것 같았다.
저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대충 어느정도 짐작이 간다.
조직에 소속되어 위험한 일을 하기는 싫지만, 이 바닥에서 오가는 돈의 유혹을 포기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
제약회사는 부족한 돈을 쥐어짜내서 머릿수라도 맞추기 위해서 저들을 고용한 모양이지만, 완전히 틀렸다.
방금 그가 상대했던 염화능력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것이 뻔했다.
“사람들을 지휘하는데는 재주가 없는데….”
게이머로 살아온 레녹에게 무슨 화술이 있고, 무슨 리더십이 존재하겠는가.
마법사의 재능으로 예전의 그보다 훨씬 이성적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지만,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을 이끌고 조직을 상대하는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차라리 샘플을 들고 도망치는게 낫겠지만….’
이대로 숨어서 특허청의 문이 열릴때까지를 기다린다면 아무도 레녹을 찾을수는 없겠지만, 아므낙 제약회사가 바라는 결말은 아니다.
게다가 레녹은 갱단과 충돌하는것을 묵인하기로 하고 선수금을 더 땡겨오지 않았는가.
장소와 시간은 정해져있지 않더라도 결국에 한번 정도는 부딫혀서 갱단의 힘을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신약 샘플을 쥐었다 폈다하면서 고민하던 레녹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여기서 다 쓸어버리면 되지.”
결국 갱단이 노리는것은 신약 샘플일 가능성일테고, 샘플이 여기 있는 한 그들은 굳이 먼 길을 돌아가는 대신 이 창고로 찾아올 것이다.
그들을 감당해낼수만 있다면, 도망치는 대신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것이 훨씬 편하겠지.
현상금 사냥, 크로켄과의 전투, 스캐빈저 지부장과의 연이은 싸움으로 레녹은 스스로의 전투능력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허약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체력 때문에 기동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화력 하나만큼은 어디가서 밀리지 않는다.
아예 이 자리에서 찾아오는 갱단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추적의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은 뒤 특허청으로 샘플을 들고가는것이 심적으로는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바로 움직여야겠군.”
세이지로부터 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때부터 생각해놓은 아이디어가 있었다.
잘만 한다면 꽤나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밤손님
살짝 들뜬 상태로 밖으로 걸어나온 레녹을 본 사람들이, 갑자기 주춤거리면서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미 레녹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입꼬리에 희미하게 서린 두려움을 감추면서 억지로 걸음을 옮기는 이들만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지?”
“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당연하겠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방안도 없다.
단지 혹할만한 보수에 이끌려 아므낙에게 고용되었고, 아무것도 모른채 제 몸 건사할만한 무기를 쥐고 달려왔을 뿐.
그리고 그런 이들이 여기서 가장 강해보이는 레녹에게 들러붙는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니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알겠군.’
신약 샘플이라는 중요한 물건을 지키게 만들어놓고는 별다른 사정도 설명해주지 않은것인가.
다급하기 짝이없는 내부 사정과는 달리 허술하기 짝이없는 일처리. 제니는 고작 레녹에게 제시했던 판돈만으로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런 클라이언트와 두번 이상 일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나 마찬가지다.
레녹은 한숨이 나오는것을 참으면서 대꾸했다.
“인원이 몇명 정도지?”
“저, 지금 정신을 차린 저 녀석까지 합하면 열 다섯 정도 됩니다.”
“창고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고 순찰을 돌린다. 생각보다 오래 버텨야 할거야. 3교대 정도로 인원을 나눠서 창고 밖의 동향을 살피고 이상이 생기면 즉시 알려줘.”
“알겠습니다. 그럼 마법사님은….?”
“따로 할 일이 있다.”
레녹이 그렇게 단언하자 사람들은 순순히 수긍하고 물러섰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자 그대로 그들은 자기들끼리 조를 나누더니 입구를 지키고 순찰을 돌고, 휴식을 취하는 조로 역할분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 일하고 있는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아보였다.
레녹은 그런 그들을 지나쳐 창고 바깥 부지로 향했다.
황량한 공업지구. 때가 묻은 낡은 공사장의 흔적에 가려져서 잘 눈에 뜨이지 않는 한적한 부지.
창고 주변의 담벼락에는 스프레이를 비롯한 온갖 저급한 낙서들이 가득하고, 간혹 오물도 묻어있는곳이 보인다.
이런 곳에 샘플을 숨겨놓았으니 이때까지 들키지 않았었던 것이겠지.
창고 주위를 한바퀴 쭉 돌면서 특별히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체크한다.
담벼락 자체는 높이가 상당해서 건너뛰어오기는 쉽지 않아보였지만, 지어진지 상당히 오래된 시설인지 금이 가거나 구멍이 뻥 뚫린 부분이 몇군데 존재하고 있었다.
레녹은 그렇게 방비가 허술해진 담벼락의 앞에 앉아서 바닥에 손을 가져다대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후웅!
‘원리 자체는 똑같아.’
공장을 폭발시킬때 사용했던 점화마법.
그때 마법의 영창을 역산하여 마법진을 설치하면서 깨달았던 노하우를 여기에 그려넣는다.
[클레이모어]. 그 이름처럼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그 자리에서 폭발하도록 만들어진 지뢰마법이다.일반적으로 헌터같은 사냥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트랩계열의 공용마법으로, 범위위력은 약하지만 대인을 기준으로 하는 화력은 상당하다.
레녹이 기억하고 있는 트랩계열의 마법이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지만 갱단이라는 조직을 상대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좋은 마법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알고 있는 마법이 하나뿐이라면, 그 마법을 통채로 개조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조건을 바꾼다.’
바닥에 마력을 투영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클레이모어]의 의념을 지우고 새롭게 고쳐써내려간다.
접근을 조건으로 하던것을 압력이 가해질 경우로 수정하고, 단일화력을 줄이는 대신 범위를 넓혀 최대한 많은 곳에 피해를 줄 수 있도록.
이론과 지식, 경험을 저 멀리 놓아두고 오로지 직관과 재능에 의존해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레녹은 그렇게 창고 부지를 여러번 돌면서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해보이는 구역마다 클레이모어 마법을 설치하고, 개조하는 일에 열중했다.
따지자면 땅이나 벽과 같은 장소에 마법을 ‘부여’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부여마법을 장소뿐만 아니라 가지고 다니는 물건에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이고 강력할까.
단순히 마법을 잠시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서 마도구를 양산할 수 있다면 눈깜짝할 사이에 돈방석에 앉는것도 꿈은 아니겠지.
레녹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마법을 물건에 부여하는 일을 시도해보고 있었지만, 그 난이도가 초월적으로 난해하다는것이 문제였다.
단순히 마법을 부여할만한 면적이 매번 달라진다는 수준을 넘어서, 움직일때마다 위치정보가 달라지는 물건에 마법을 아주 잠깐이라도 부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게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광기에 가까운 강력한 의념과 입자단위의 정밀한 설계능력을 갖추던지, 아니면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위치정보를 매순간마다 계산해서 새롭게 마법을 부여하는것 말고는 현재까지 답이 없어보였다.
“마, 마법사님….”
“…..뭐지?”
작업이 끝나갈때 즈음에는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연초를 한대 더 입에 물고 돌아서자, 한 사람이 덜덜 떨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레녹에게 시비를 걸다 역으로 불길을 뒤집어쓰고 바닥을 구르던 염화능력자였다.
불길에 휩싸여 바닥을 구른 탓에 옷가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재와 먼지로 엉망진창이었지만, 의외로 몸은 멀쩡하다.
그가 가지고 태어난 화염내성은 고통을 전부 막아주지는 못해도 그 폐해에는 저항성이 강한 듯 했다.
그는 레녹을 보는것만으로 아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그만…..”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절 용서해 주실겁니까?”
“용서라고?”
레녹이 그를 용서할 필요가 어디있을까.
말귀를 못알아듣고 먼저 손을 쓴것은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한번 매운맛을 본 뒤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레녹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큰 기대도 하지 않으니 갱단을 상대로 적당히 시간만 끌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녹의 말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는지 털썩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마법사분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절 살려주시면….”
“…….”
그제서야 레녹은 남자가 뭘 걱정하고 그를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그는 레녹이 이 일이 끝난 뒤에 자신을 죽여버릴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 쪽의 생리에 비추어보면 그리 틀린 결말은 아니다.
아주 엄격한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사회. 상대의 역량을 잘못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목숨의 위기로 직결되는 이 곳에서 얕보인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남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놓고 레녹을 비롯한 여러 마법사를 모욕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레녹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남자의 머리를 짓밟고 죽을때까지 두드려패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레녹을 위해 해줄 수 있는것은 앞으로 찾아올 갱단을 상대로 그 자랑인 불길을 활활 태우는것 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남자에게 곧이곧대로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좋은 말로 해줄 이유도 없었다.
레녹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참 빨리도 찾아왔어. 그렇지?”
“…….”
“그래도 아직 자존심은 남아있었던 모양이야.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나? 꼴사납긴 하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자 그가 벌벌 떠는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까와 같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거겠지.
몸을 숙이고 그의 귓가에 속삭인다.
“기회를 주지.”
“기, 기회라면….”
“아마 오늘 밤. 이곳으로 손님들이 찾아올거다.”
레녹의 생각대로라면 아마 빠르면 오늘. 늦으면 내일 아침까지는 분명 갱단에서 움직임을 보일것이다.
정보가 술술 새어나간다는 제약회사의 설명을 생각해보면 특허청에 신청을 넣었다는 정보 역시 구의원의 귀에 그대로 들어갔을테니까.
막대한 돈이 될만한 특허가 그대로 제약회사의 명의가 되어버리는 것을 피하고 싶겠지.
“네가 할 일은 간단해. 그냥 그 손님들의 어깨에 불을 붙여주면 된다.”
연초를 문 채로 레녹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