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38
약먹는 천재마법사 338화
소집령(2)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오랫동안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욱신거린다.
옆구리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주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단 눈앞에 라피스의 얼굴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술식 자체가 실패한 것은 아닐 터.
삽시간에 입김이 불어오는 이 차가운 공기가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거대도시 발칸이 위치한 남서부 대륙과는 달리, 북반구는 계절이 완전히 반대로 뒤집히는 지역.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는 발칸과는 반대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와야 하는 계절임에도 이 정도의 추위다.
라피스 역시 당연한 것처럼 털달린 목도리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끼여 있는 벙어리장갑이 지금 이 상황과 지독하게 괴리되어 보이고 있을 뿐.
두두두두!!!
실드 사이로 쉴새없이 쏟아지는 충격에 머리를 웅크린 라피스가 빠르게 대답했다.
“습격을 당했어요.”
“……습격이라고?”
“북부 고원에 다양한 세력들이 몰려들면서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해졌어요.”
라피스가 힐끗 고개를 내밀어 레녹의 실드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지는 중이에요. 그래서 비밀리에 따로 흩어져서 거점을 이전하던 와중에 그만…….”
“문제가 생겨서 지금까지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이거군.”
“흐하하하하!! 찾았다, 이 꼬맹-”
콰직!!
손안에서 불덩이를 뽑아 실드 밖에서 달려드는 칼잡이의 머리통을 터트린 레녹이 말했다.
“소환 장소 확보도 되지 않아,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급한 대로 이 자리에서 소환을 시작했던 거고?”
라피스가 레녹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외부와 통신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향하기 전에 미리 시간을 약속해두었던 종류의 것.
만약 그녀가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레녹을 불러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초조하게 도망을 다니며 시간에 쫓기던 그녀는 결국 발각당하는 것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서 시간에 맞춰 레녹을 소환해 버린 것이다.
라피스가 희미하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아…….”
방금 전까지 천체마법의 아름다운 위상과 그 원리에 대해서 쉴 새 없이 감탄하던 시간이 거짓말 같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그만한 규모의 소환술식을 성공시킨 그녀의 천재성을 칭찬해야 할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레녹이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활한 설원 너머에서, 족히 수십개가 넘는 기척이 빠르게 이쪽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다.
고민하고 질문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레녹은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움직였다.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장본인을 낚아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우와앗?!!”
“가만히 있어라. 중심잡기 힘드니까.”
라피스의 몸에 경량화마법을 걸고 그대로 옆구리에 둘러멘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마력사로 묶어 메신저 백처럼 들어 올린 레녹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품 안에서 알약으로 만들어진 진통제를 두 알 꺼내 씹어 삼킨 레녹이 그대로 눈밭 사이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꺄아아아악!!”
요령은 사막지대에서 모래를 사용해 이동하던 것과 같다.
눈입자 아래 마력을 밀어넣고 그대로 밀어내며 레녹의 발 밑에서 미끄러지듯이 질주한다.
실드사이에서 화살처럼 튀어나와 눈밭을 쏘아달리는 레녹의 모습에, 일대를 포위하고 있던 초인들이 뒤를 쫓기 시작했다.
“지원군이 도착했나!!”
“시간이 끌리기 전에 빨리 죽여!!”
“등대지기를 잡기만 하면 자치령이 손에 들어온다, 절대로 놓치지 마!!”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귀담아 듣던 레녹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지? 그리샤나 선명은?”
레녹이 자치령에서 만났던 주시자들 중에서, 라피스의 곁을 보필하던 실력자들의 수는 상당했다.
라피스가 북대륙으로 향했다면 당연히 그들도 그녀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겠는가.
그나마 통성명을 주고받았던 주시자들의 이름을 꺼내자, 라피스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대답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시선을 끌기 위해 따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 사이 천구의 변화를 눈치챈 다른 세력이 개입한 거예요.”
“본의 아니게 주목을 끌어버렸다 이거군.”
“저도 따로 소환수를 불러내 몸을 지키고 있었지만,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혼자 버티며 역소환당하는 바람에…….”
원래부터 청의 눈의 거점을 빼앗고 그들을 추적해 오던 적대세력 A와 라피스가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냄새를 맡고 끼어든 세력 B.
아직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조직과 괴물들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무안한 듯이 얼굴을 붉히는 라피스를 내려다본 레녹이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고 생각하지. 다른 일행은 어느 쪽에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개개인의 위치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거예요. 미리 정해둔 집결지가 있으니까, 일단 그쪽으로 향하는 게…….”
“확실히…… 마력이 평소보다 좀 버벅이긴 하는군.”
사방 몇 킬로미터 일대를 아울러야 할 레녹의 감각권이 평소보다 훨씬 더 흐릿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근방 수백 미터에서 레녹을 향해 살의를 내뿜는 적들의 면면뿐.
그리샤나 선명같은 익숙한 마력의 기척은 어디서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레녹의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설원의 특수한 환경이 마력의 감응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설원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고산을 힐끗 바라본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영향이 있을 정도였나……. 초월자의 힘은 정말 상식 이상이군.”
“……에반, 알고 있었나요?”
옆구리에 매달린 채 푸른 머리칼을 쉴새없이 흔들거리던 라피스가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레녹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기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들어서 말이야. 지금 이 북부 설원이 아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 비어 있는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화르르륵!!
손안에서 피어오른 불꽃의 창이 그대로 달려드는 남자의 가슴팍에 꽂혀 전신을 통째로 불태웠다.
“흐아아아악!!”
불덩이가 되어 눈밭을 구르는 실로 이질적인 풍경.
온 몸을 싸늘한 빙판에 문대면서도 달라붙은 불길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살점을 불태운다.
라피스가 그 모습에 살짝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염열마법. 역시 조금도 녹슬지 않았군요.”
“…….”
그러고 보니, 라피스에게 직접 마법을 보여준 것은 자치령에서 마약왕을 처리할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도미닉 카바로를 죽이는 과정에서 염열마법과 중력계열의 술식을 이용해 부유섬을 통째로 내리찍어 짓눌러버린 것도 벌써 1년을 훌쩍 지난 일이었다.
라피스가 레녹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주력계통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눈 감아라.”
“네?”
대답은 없었다.
[화장제련(火長製鍊)]레녹이 던져올린 불꽃의 구체가 수십미터 상공 위에서 회전하며, 순식간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창대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두두두두두!!!
향하는 방향을 따라 눈밭 한가운데 내리찍힌 불꽃의 창 수십개가 근처 눈을 녹이고, 레녹의 발이 미끄러지는 속도를 높인다.
자세를 살짝 낮추고 마력사로 균형을 잡으면서, 사방에서 달려드는 초인들을 향해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타타타타탕!!!
사격보조마법의 도움을 받은 조준사격은 흔들리는 동선 속에서도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고 그대로 추적해 오는 적의 미간에 꽂혀 들어간다.
“어억……!!”
“흑!”
새하얀 눈밭에 새빨간 선혈을 흩뿌리며 고꾸라지는 초인들의 모습.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의 비를 피하기 위해 신경이 분산된 이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목숨을 잃는다.
대번에 레녹의 공격수단을 눈치챈 이들이 빠르게 정보를 교환했다.
“탄환이야, 알아서 피해!!”
“지정사수 출신인가. 말도 안되는 실력이군……!!”
“마력흐름을 봐라. 알 수 없는 술식의 도움을 받고 있어!”
“호오.”
어느새 수십명이 넘는 초인전력으로 가득 찬 설원.
그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쉴새없이 적을 죽여나가던 레녹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쐐애액!!
발 아래 눈밭에서 일어선 얼음결정이 순식간에 남자의 두 다리를 붙잡고 얼려버린다.
“잠……!! 빌어먹으으을!!”
턱!!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다가와 사격보조마법을 알아본 남자의 턱을 움켜쥔 레녹이 물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여태까지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우으으으!!”
파리하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살핀 레녹이 머지않아 정답을 찾아내고 씩 웃었다.
남자의 왼쪽 눈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새겨진 정체 모를 문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파장이, 필터처럼 한번 남자의 시각을 걸러서 보이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데. 보조마법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존재 정도는 눈치챌 수 있는 문신이라니. 후천적인 시술치고는 꽤 인상적이야.”
“저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요?”
라피스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레녹이 손아귀 사이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대륙 북반구……. 발칸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처음보는 술식체계가 꽤 많군.”
위이이잉!!
“으으으으읍!!”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레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의 발밑을 묶고 있던 얼음 결정이 순식간에 자라나 그 몸을 통째로 뒤덮고 딱딱하게 얼려 버렸다.
직후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불꽃의 창대가 정수리부터 관통하며 그 몸을 얼음 조각째로 깨부순다.
콰지직!!
딱딱하게 얼어붙은 시체조각을 내려다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그럼 도망치면서 조금 확인해 볼까.”
“……에반?”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라피스를 짊어진 레녹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을 뿐.
촤아아아악!!
“꺄아아악!!”
가속과 감속, 급정지와 방향전환 모두 마치 수십년동안 눈밭 위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자유롭기 그지없다.
중요한 것은 발 아래서 미끄러지는 눈의 마찰과 속도를 조절해서 동선을 짜고, 그 사이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유지하는 것.
이를 가능케 하는것은 당연하지만 레녹의 허술한 균형감각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과 마력조작을 통해 머리로 한발 앞서 몸을 통제하는 발상이다.
그 와중에 라피스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그녀 체내의 균형감각까지 조정해 가면서, 레녹은 순식간에 라피스를 추적해 온 조직원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비원을 매개로 하는 간접술식인가. 이런 전투에서 사용하기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흐아아악!!”
으지직!!
“입술의 형태를 기준으로 하는 언령사. 개성적이지만 형태가 잡혀 있지는 않군. 자기류였나.”
후두두둑!!
“독특한 모양의 날붙이야. 손잡이를 쥐고도 날의 끝이 자신을 향해 있는 이유는 뭐지?”
서걱!!
특이한 술식은 다비를 통해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하고, 본 적 없는 아티팩트는 한번 마력을 때려 박은 뒤 멀쩡한 것만 회수한다.
몇 년 동안 온갖 술사와 전사들을 잡아 죽이면서 다양한 마력흐름을 관찰해 온 레녹은 한번 곁눈질을 하는 것만으로 술식의 잠재력을 가늠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간이결계. 그것도 즉석에서 대상과 범주를 바꿔가며 자신과 상대에게 뒤집어 씌우는 타입이군.”
순식간에 상대가 사용하는 술식을 파악하고 목을 날리려던 레녹의 눈이 번뜩인다.
쾅!!
눈가에 주름이 지긋한 장년의 남성. 그 명치에 충격마법을 때려박아 쓰러뜨린 레녹이 그의 머리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크악!!”
“이거……. 생각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데. 결계의 틀을 바꿔 끼우는 것만으로 증강과 감속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어, 어떻게…….”
“너같은 술사가 만들었다기에는 말도 안되는 정교함이군. 유파나 마탑의 이름을 말해.”
결계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켜 자신에게 씌우면 버프. 반대로 뒤집어 상대에게 씌우면 디버프.
사용방식은 간단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원리는 결코 간단하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다.
결계의 회전축을 뒤집는 순간 내부 구성요소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뒤집히면서 반대되는 역할을 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도 결계를 설계할 정도의 재능과 지혜를 갖춘 술사라면, 애초에 방금 레녹이 지나가듯 던진 화염의 파도에 당할 리는 없을 터.
남자가 익히고 있는 결계술식의 주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추리였다.
“나, 나도 몰라……!!”
레녹의 발 밑에 머리를 짓밟인 장년 남성이 덜덜 떨면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체드라이 산맥 어딘가에 버려진 사, 사원에서…… 우연히 얻은 책에서 배워 익힌 술식이야……!!”
“우연히 배워 익혔다고?”
“저, 정말이다…… 제발 살려줘…… 두 번 다시 청의 눈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
으드득!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레녹은 그대로 실드를 내리찍어 남자의 숨을 끊은 뒤, 그의 품안을 뒤적여 작은 책자를 꺼내 들었다.
책자를 꺼내 들고 몇장 넘겨보던 레녹이 혀를 차며 표지를 덮었다.
“결계구성에 필요한 페이지는 일부로 훼손시켜놓았군. 당장 복원하기는 힘들겠어.”
“…….”
라피스는 말없이 레녹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입을 다물었다.
레녹이 괜히 결계사를 상대로 오래 시간을 끌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그녀를 추적해 포위하고 잡아 죽이려던 초인 전원이 사망하거나 전투불능.
드넓은 설원 한복판에 피와 먼지 냄새만이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 님. 저, 이제 내려주셨으면…….”
“잠깐만 기다려.”
“애, 애초에 이렇게 싸우실 생각이었다면, 굳이 저를 둘러메고 움직이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
다른 이들의 추적을 피해 집결지점까지 도망칠거라면 라피스를 둘러메고 움직이는 게 맞았지만, 레녹은 그러는 대신 아예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라피스가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레녹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웬만하면 숨겨놓고 싸우는 게 편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네?”
“잠깐만 신경을 놓쳤다가는 네가 죽을 수도 있거든.”
“그게 무슨…….”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그대로 사방에 내리꽂힌 수십 갈래 불꽃의 창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의지에 따라 호응한 창대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여전히 저 하늘에 떠오른 염구와 호응하고, 그대로 거대한 열풍을 띄워 올린다.
화아아아악!!
한없이 온도가 낮은 설원 한복판에 불어닥치는 불길의 바람.
아지랑이가 크게 치솟으며 탁 트인 시야가 일그러지고, 눈과 바람사이 차가운 공기가 누그러지자 그 사이에 숨어 있던 기척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에, 길게 이어진 문신이 온통 피부를 뒤덮은 청년.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반지 사이에서 강렬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뒤늦게 이 자리에 숨어 있는 마력원을 발견한 라피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서, 성위……!! 어떻게 제 눈을 피해서……!!”
천견의 직계혈육이자, 그녀의 힘을 가장 가까이서 승계받은 그녀는 보는 것에 한해서라면 위계를 뛰어넘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런 그녀의 눈을 평범한 은신술로 피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터.
하지만 레녹은 상대가 어떻게 지금까지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이 근처 마력흐름이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 그 흐름에 기척을 숨기고 라피스의 눈을 피한 건가?”
레녹의 시선이 자연스레 청년의 얼굴을 뒤덮은 문신으로 향했다.
“거기에 문신 자체가 기척을 숨기는데 특화되어 있군.”
따지자면 온 몸 전체에 마력봉인구를 채워넣어 마력의 누수를 방지하는 방식. 술식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굉장히 러프한 수단이다.
“어라,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빠른 사람이군요.”
청년은 레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대지기라고 해봤자, 스무살도 살지 못한 어린아이. 승천자의 마력에 숨어 기척을 숨기면 어렵지 않게 생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녹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이건 확실히 예상밖이군요. 설마 이만한 실력자를 지원군으로 불러내다니.”
“…….”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괜히 예상했던 것보다 마력을 낭비하게 생겼군요.”
할짝.
그의 입에서 길게 흘러나온 혀가, 턱 아래를 가볍게 훑었다.
기이한 모습에 라피스가 표정을 찌푸리는 모습을, 청년이 즐거운 듯 바라본다.
“천견의 눈동자는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한 값어치를 한다고 하지요. 보스에게 가져다주면 무척 좋아하겠군요.”
“네 보스는 인체수집이 취미라도 되는 모양이지?”
심드렁한 레녹의 말에 청년이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보석술사거든요. 뛰어난 인간의 눈동자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보석에 가까운 바……. 보스도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두 눈동자가 바깥쪽으로 회전하며, 흐릿한 나선을 그린다.
동공이 빠르게 진동하면서 시선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중첩, 그대로 알 수 없는 문양을 두 눈에 띄워 올렸다.
레녹은 곧바로 그것이 마안의 일종이라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본인부터 마안보유자이기 때문인가? 헛소리인 줄 알았더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군.”
“…….”
“남의 눈동자를 탐하기 전에 네 눈부터 보스한테 뽑아주는 게 어떻겠나?”
“계속 얘기하시죠.”
청년은 손을 귀에 가져다 대면서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좀 있으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렇다면 나도 재밌는 걸 보여주지.”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 왼쪽 눈동자를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침 나도 이 눈으로 신기한 일을 할 수 있게 됐거든.”
다시 눈을 뜬 그의 눈은 선명한 자색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