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0
자줏빛 채찍에 꽁꽁 묶여버린 상대를 흔들림없이 응시하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몇백미터를 걸어 레녹이 깔아놓은 빙판이 서서히 녹아가는 황야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상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등에 매고 있던 샷건을 꺼내려고 했는지 한쪽 팔이 기괴하게 뒤로 올라간 채로 묶여버린 기괴한 자세.
두 발은 레녹의 마법에 그대로 당해버린 듯이 그대로 빙판에 붙잡혀 꽁꽁 얼어있고, 싸늘한 한기에 복부를 드러낸 탱크탑이 벌벌 떨린다.
진한 남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내린 사나운 인상.
그녀가 레녹을 발견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씨발… 하필 걸려도 이런 괴물한테 걸려서.”
시작부터 욕질인가. 어지간히 입이 걸걸한 모양이었다.
레녹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파앙!
“아악!! 좀 살살해!!”
충격마법으로 여자의 등 뒤를 후려갈겨서 등에 걸린 샷건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레녹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누가봐도 수상할 정도로 숨어있다가 들키니 도망을 쳤지.”
“그건…. 그냥 그쪽 방해하기 싫어서 그런거야. 마법사님의 편안한 사냥을 방해하기 싫었다고.”
“참 설득력 있군.”
심드렁한 레녹의 대꾸에 여자가 포기한듯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하아…. 알겠으니까 이 빙판만 좀 치워주면 안될까? 슬슬 발가락이 시려워서 동상걸릴 것 같아.”
“하는거 보고.”
겉으로는 완전히 저항을 포기한것처럼 보였지만 속내는 어떨지 모르는일이다.
레녹은 이 여자의 몸놀림이 굉장히 유려하다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가 갑자기 숨겨둔 무기를 꺼내서 달려들 가능성을 굳이 배제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래비티 바인드]만으로도 용병 하나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방심하지 않는것은 또 다른 문제 아닌가.
레녹이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여자가 살짝 새파래진 안색으로 황급하게 말했다.
“디, 딜런!!”
“뭐?”
“…..나 딜런이랑 같이 일해. 그냥 평범한 용병 나부랭이라고.”
순간적으로 동료의 이름을 판것이 자기 스스로도 무안하게 느껴졌는지 여자의 귓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레녹은 오히려 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딜런과 아는 사이라는건 어떻게 알았지? 딜런이 내 얘기를 하기라도 한거냐?”
“…..앗.”
“………”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여자를 보고 레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진 바 뛰어난 몸놀림에 비해서 어쩐지 푼수같은 사람이었다.
“딜런과 같이 일한다면 안타레스 사무소 소속이겠군.”
“그, 그렇지.”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내 마력감지에서 숨어있을 수 있던 방법이 뭔지 말해.”
레녹은 자신의 마력탐지가 완벽하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허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서 싸우는 전사들에게는 기감이라고도 불리는 이 탐지방식은 굉장히 주먹구구식으로 작동하는것처럼 보여도 그 효과는 상당한 편이었다.
단순한 오감과는 다른 6번째 감각으로 작동하는 이 탐지방식은 굉장히 직관적으로 인간의 지각능력을 대폭 끌어올려준다.
특히 마력감응능력이 월등한 레녹에게 있어서 이러한 마력감지는 연약하고 둔한 육신의 감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레녹의 감각권에서 잠시나마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라면, 그것은 레녹의 탐지능력이 부족하기라서보다는 뭔가 다른 수단이 있다고 보는것이 타당했다.
그것이 테일러 에반스를 잡을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더더욱.
“아니, 딱히 당신한테 뭔 짓거리를 하려고 숨어있던건 아니라고. 그냥 옆에 있다가 휩쓸리기 싫어서 적당히 숨어있던것 뿐이야.”
여자는 레녹의 표정을 보고는 빠른 속도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정말 그쪽을 죽이고 싶었다면 진작 내가 먼저 선빵 갈겼지. 솔직히 그럴 시간은 충분했다고.”
“…….”
“그리고 당신의 마력감지에서 숨어있을 수 있던건 정말 별거 아니야. 그냥 돈의 힘이지.”
“돈의 힘이라고?”
“이거. 내 허리쪽에 달린 부적 보여?”
그녀이 말대로 가죽 허리띠 옆쪽에 달려있는 짙은 녹색의 작은 부적이 하나 보인다.
언뜻 본다면 단순한 액세서리로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만큼 평범한 디자인.
레녹도 그녀의 말이 없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만큼 아무런 힘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고위 드루이드가 직접 제작한 동화부적이야. 비싸지만 돈값은 제대로 하는 물건이지. 용병들 중에서 좀 번다 하는 놈들이면 기본적으로…. 야, 그거 내놔!”
소리를 빽 내지르는 그녀를 무시하고 허리춤에서 부적을 낚아챈 레녹이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드루이드의 자연계 술식은 엄밀히 말해서 마법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같은 술식이라는 큰 가지를 공유하기는 하지만, 마력이라는 가장 범용성이 강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마법과는 달리 자연계 술식은 동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힘은 자연의 존재와 그 안에 내포한 힘을 믿는 강력한 신앙에서 나오며,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전조도 흔적도 없다.
드루이드의 힘을 눈치채지 못한 것 역시 그러한 자연계 술식의 원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신능력쪽으로는 어느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찍은 재능은 거의 전부 마력관련 능력뿐이었지.’
레녹이 생각하기에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술식에는 지금과 같은 성취를 얻을 가능성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 이외의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었지만, 이런 부적의 존재 때문이라도 관련 지식들을 조금씩 더 공부해야할 것 같았다.
부적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레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겠군.’
단지 부적을 소유한다고 기척을 감춰주는것이 아니라, 몇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자연계 술식이 발동되도록 작동하고 있다.
당장 레녹 역시 제자리에서 가만히 멈춘 채로 시간이 좀 지나자 스스로의 기척이 조금씩 옅어지고 호흡이 가라앉는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은신하는 경우에 한해서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군. 기습이나 선공에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야.’
게다가 레녹이 부적의 효과를 누리는 순간부터 부적을 장식하고 있던 문양의 선 중 하나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사용횟수가 존재하는 소모품에 가까운 물건이겠지.
매복하고 있다가 허를 찌르는 용도라면 모를까, 여자가 레녹을 공격하기 위한 의도가 있을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레녹을 쳐다보던 여자가 말했다.
“이봐….제대로 돌려줄거지? 그거 좀 비싸. 좀 많이 비싸다고.”
“…….장담은 못하겠는데.”
“야!”
“걱정하지 마라. 잘 쓰고 딜런한테 맡겨놓을테니.”
“씨발…. 그 새끼는 지 지갑에 뭐가 들었는지도 신경 안쓰고 다니는 놈이라고.”
여자는 그렇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레녹이 부적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 크게 불평하지는 않았다.
목숨값으로는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하는걸까.
레녹은 정말로 부적에 부여된 술식의 작동원리만 연구하고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부적을 포기한것처럼 초연해보였다.
빙판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이 동나면서 빠르게 그녀의 발을 묶고 있던 얼음조각들이 녹아내린다.
애초부터 지속성이 긴 마법은 아닌데다 마력을 많이 담은것도 아니라서 유지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꽁꽁 언 발을 털어내면서 여자가 폴짝폴짝 뛰었다.
“아, 제기랄. 부츠에 물 존나 들어갔잖아. 이거 어떡할 거냐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
“또 뭐. 진짜 그쪽한테 뭔 수작부릴 생각은 없었다니까? ……같이 해보고 싶은 일은 있지만.”
그제서야 은근슬쩍 본심을 털어놓는 여자의 말에 레녹이 피식 웃었다.
핸드폰을 들어서 곧바로 제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작 딜런이라는 이름 하나만 듣고 그녀를 풀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적어도 지인을 통해서 쌍방확인은 거쳐야지 그녀가 안타레스 사무소 소속인지 제대로 확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도시밖을 어느정도 벗어나서 그런지 통화품질이 엉망이다.
번외구역 일대에 종종 자기폭풍이 몰아친다고 하더니 그 영향일까.
제니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대충 중요한 내용은 확인했다.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이상한 소음만 들리는 전화기를 꺼버리고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상반신을 단단히 묶고 있던 그래비티 바인드까지 풀어주면서 물었다.
“이름은?”
“카밀라. 대충 밀라라고 불러.”
팔을 휙휙 돌리면서 그녀가 대꾸했다.
크로켄도 아주 잠깐이지만 묶어놓았던 속박마법이다. 그런 채찍에 묶여있었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법도 했다.
“보통 그렇게 줄여부르나?”
“내 이름인데, 무슨 상관이야. 그쪽은 반이지?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보면서 땅에 떨어진 샷건을 주워 등에 매건 밀라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반 당신도 오염체를 토벌하려고 여기 온거잖아. 맞지?”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 그렇지. 요즘 급전이 필요해서 일이 들어오는대로 닥치고 다 받고 있었는데, 보스가 딥웹 머시기 하면서 당분간은 의뢰를 받는게 손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용돈벌이나 할 겸 여기 와본거야.”
“……..”
“뭐야? 뭐 잘못된거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레녹은 자연스럽게 말을 흐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녀가 말한 사정이 상당히 의외였기 때문이다.
레녹과 아주 비슷한 사정으로 오염체 토벌의뢰를 받은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하는것을 들어보면 그녀 역시 너무 빠른속도로 실적을 쌓아올리면서 몸값이 요동치는 단계에 있는것이 확실해보였다.
따지자면 지금까지 레녹이 했던 것과 비슷한 난이도의 의뢰를 성공시키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데…. 놀랍게도 레녹은 그녀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쪽 바닥이 정말 넓기는 더럽게 넓은 모양이군.’
동시에 레녹의 정보수집능력도 열악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이쪽 바닥에 의뢰를 넣는 클라이언트나 제니같은 중개인들은 그런 정보들을 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레녹에게는 그 간극이 턱없이 멀었다.
이제까지는 제니와 같은 브로커들에게 온전히 정보수집을 의존해왔지만, 혼자 정보를 얻을 루트가 필요해보였다.
시비
‘관련 커뮤니티같은게 따로 있다면 좋을텐데….’
지구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면 네트워크가 활성화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어느정도 짐작할수는 있다.
레녹의 상식에 비추어보자면 접근 난이도가 상당할수는 있어도 이러한 정보들을 주고받는 커뮤니티가 네트워크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한번 제니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밀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쨌든. 그쪽이 협력해준다는 가정하에, 오염체들을 한번에 몰아잡을 방법이 있어. 시간도 절약하고 돈은 무더기로 챙겨갈 수 있겠지. 그렇게 번 돈은 둘이서 5대5로 나눠가지자고. 어때?”
“7대 3.”
레녹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밀라가 펄쩍 뛰면서 반발했다.
“야! 그럼 난 뭐먹고 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니 오염체를 쓸어버리는건 결국 내가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나와 일하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을리가 없지. 내가 할 일이 더 많아보이는데 이건 당연한거다.”
“뭔 개소리…. 아니, 아이디어는 이쪽이 냈잖아! 그리고 이런 건 원래 계획입안자의 체면도 세워주는거라고. 상도덕에 어긋나는 짓거리 하지말고 깔끔하게 반띵하자. 응?”
“상도덕을 먼저 어긴게 누구더라?”
레녹의 싸늘한 대답에 밀라가 움찔하더니 거하게 쌍욕을 내뱉었다.
“……6대 4. 더 이상은 나도 양보못해. 이건 진짜 끝내주는 아이디어라고.”
“뭐 얼마나 기발한 생각을 했길래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좋아. 6대 4.”
아무리 레녹이 밀라에게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7대 3이나 해먹을 생각은 없었다.
절반정도에서 딱 조금 더 가져가는 정도면 족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크게 기대도 하지 않지만, 안타레스 사무소 소속에다가 레녹과 비슷하게 몸값을 올릴정도의 실력자라면 한번 정도는 어울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것 뿐이었다.
밀라는 레녹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희낙락해서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자고.”
“걸어가는건가?”
“아니. 여기 공사장에서 괜찮은 물건을 주웠거든. 이걸 타고 가자고.”
그렇게 말한 밀라가 레녹을 데리고 안내한것은 녹이 슬러서 흘러내리기 직전까지 망가진 낡은 지게차였다.
“……..”
멍한 표정으로 지게차에 올라탄 레녹이 운전대를 잡는 밀라를 보며 가만히 입을 벌렸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드라이브가 설마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장 지게차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털털털!
“…..생각보다 잘 굴러가는군.”
“그렇지? 대충 먼지털고 배선 꼬인거 다시 이어주니까 시동이 걸리더라고. 귀찮게 걸을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냐.”
레녹은 대꾸하는 대신 마력을 끌어올려서 그대로 번개여우 한마리를 전방으로 쭉 쏘아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