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17
약먹는 천재마법사 517화
저격수의 진가(7)
불룩, 불룩, 불룩!!
로기어의 이목구비가 제멋대로 날뛰면서 제 자리를 뛰쳐나갈 것처럼 부풀어오른다.
동시에 내면에서 충만했던 마력과 조화를 이루던 심상이 거짓말처럼 무너져내리고 역류했다.
쿠루루루룩!!!
마치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식도를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온 몸의 세포들이 폭발해 피부 밖으로 비산하듯 파열한다.
마력사를 집어삼키면서 흡수하고 소화했다 생각한 그 모든 성취가 레녹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양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 사라져가는 듯한 힘의 소실.
“허어어억……!!!”
거대하게 부풀었던 웨어울프의 체구가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흑색의 윤기를 내뿜던 털이 형편없는 잿빛의 그것으로 변한다.
수십 년 어치 기력을 한 번에 잃어버린 것처럼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레녹의 앞에서 네 발로 기다가 쓰러지는 로기어의 모습.
체내의 종양에게 온몸의 기력과 마력을 모조리 빼앗기는 듯한 섬뜩한 감각.
로기어가 온몸을 비틀면서 처절하게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이런 건……!!!”
“한 번쯤 의심해 볼 만도 하잖아. 그렇지 않나, 웨어울프?”
천천히 일어선 그림자로브 사이로 흑요석 가면이 떠오르고, 그 사이로 매끄러운 손가락이 가면을 고쳐잡는다.
로기어를 굽어 살피듯이 고개를 살짝 숙인 가면 너머로, 마법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술사에게 마력을 빼앗는 일이 왜 이렇게 쉬웠는지. 왜 이렇게 네 소우주로 마력사를 소화시키는 일이 수월했는지 말이야.”
레녹이 그런 웨어울프의 머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흥분했군. 동요했어. 주제에 맞지 않는 각성에 취해, 앞뒤 상황을 재는 것조차 잊어버린 거지.”
“죽여, 죽여 버릴……!!”
쾅!!
마력사로 로기어의 주둥이를 길게 묶은 뒤, 그대로 지면에 처박아 버린 레녹이 말했다.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군.”
로기어가 먹어치워 소화시켰다 생각한 레녹의 마력은 처음부터 단 한순간도 그의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다.
마력조작과 통제능력에서 초월적인 적성을 지닌 레녹의 마력이, 누군가의 소우주에 잡아먹힐 리가 있을까.
로기어가 소우주를 발동시킨 순간 역으로 그 몸을 산산이 터트릴 수 있음에도 레녹이 기다렸던 이유.
그건 레녹이 로기어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아주 게걸스럽게 마력을 씹어삼킨 덕분에, 네 심상 가장 깊은 곳까지 손에 잡힐듯이 느껴지는군.”
그렇게 말하는 레녹의 가면 오른쪽 눈동자에서는, 이미 시커먼 안광이 안개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이대로 걷어올리면 그 기억과 염상을 전부 구경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말이야.”
상대의 힘을 억제하는 대신, 거꾸로 폭주시켜 망가뜨리는 오른쪽 마안의 새로운 능력.
암리타의 성역, 해저삭월을 무너뜨릴때도 사용했던 능력을 통해 로기어의 심상을 폭주시켜, 그 안에 담긴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낸다.
“복마전과 이지스 양쪽에 다리를 걸친 내통자. 주제넘게 머리를 굴리다가 이런 꼬라지가 되기는 했지만…….”
레녹이 웃었다.
“그래도 남들보다 알고 있는 건 조금 더 많겠지. 그 기억과 지식, 남김없이 여기서 거둬가겠다.”
“씹어먹을 새끼가, 처음부터 날 가지고 놀았……!!!”
그제서야 방금 전의 전투가 처음부터 의도된 연극이었음을 깨달은 로기어가 충혈된 눈으로 레녹을 노려보았지만.
레녹은 그런 로기어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까 왜 네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바로 박사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물었었지. 대답은 간단해.”
레녹이 로기어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도 너랑 똑같거든.”
“……!!!!!!!”
상대의 사고와 심상을 통째로 뒤흔들고, 그 헛점을 찌르기 위한 마지막 트리거.
로기어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무어라 말을 토해내려던 그 순간.
레녹은 그대로 웨어울프의 미간 사이에 마력사를 찔러넣었다.
마력사 사이를 통과한 전류 한 가닥이 순식간에 로기어의 머릿속을 관통해 의식을 강제로 꺼트렸다.
파지직!!
* * *
“로기어가 내통자라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중 스파이? 이중 간첩이라고 하나? 아마 그런 걸 테지.]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박사의 말에 마이야가 시선을 확 찌푸렸다.
“이해가 안 되는데.”
[행적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가. 정말로 한쪽의 편이었다면 이렇게 행보가 애매할 리는 없거든. 이득을 저울질하는 놈에게 흔히 보이는 추태다.]“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좋다고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어둠에 잠긴 위성도시를 돌아보며 마이야가 말했다.
“애초에 이 조직에서 내통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판데모니엄은 자신들의 손으로 벌어지는 대부분의 계획을 숨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살인, 범죄와 혼란의 결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범죄조직으로 시작해 그 본질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복마전.
그런 판데모니엄의 정보를 빼돌리기 위해 조직에 잠입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복마전에 협력하고 있지만, 마이야는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본질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정보나 계획이 있다면, 단장이나 명과 같은 괴물들의 선에서 처리되어 그 결과만이 공유될 뿐.
편람의 우물에서 벌어진 작전조차 그 시작과 경과는 다른 조직들도 알고 있을 만큼 노출되어 있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부에 깊게 잠입해 봤자 알 수 있는 정보는 밖에서도 알 수 있고, 알 수 없는 정보는 죽어서도 알 수 없다.
마이야조차 아직 이 조직의 본질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데, 로기어가 그런 위험을 감수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박사는 그런 마이야의 말에 오히려 재밌다는 듯 소리높여 웃었다.
[네 입에서 그렇게 순진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군. 그런 가능성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뭐?”
[복마전의 정보를 빼돌려 이득을 취하려던 게 아니다. 결산에 참가기 위해서 외부의 힘을 빌린 것에 가깝지.]마이야의 이어폰 너머로 박사가 느긋하게 속삭였다.
[특무기관 이지스라고 했었나? 그쪽의 힘을 빌려 구세계의 유물을 구한 뒤 결산에 참가했고, 그 대가로 결산에 대한 정보를 유출했다면 어떨까.]박사는 그렇게 상상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
[그 자리에서 무언가 특별한 이득을 취하려 하기보다는, 외려 은근슬쩍 몸을 빼는 일에만 집중하려 했지.]찰칵, 찰칵.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기계음 사이로 박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결산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라 생각하고,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거라면 그 애매한 행보를 전부 설명할 수 있어.]“결산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라 생각했다고?”
마이야가 그 말을 듣자마자 날카롭게 웃었다.
“어이가 없군. 작전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로기어도 단장이 어떤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을 거다.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 필부가 내통자 역할을 해낼 리 없지.]“그렇다면?”
[다만, 그걸 알면서도 눈앞에서 흔들리는 먹잇감에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짐승이었을 뿐.]그렇게 대답하는 박사의 말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결국 아인종은 별수 없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통제할 수 없는 야수성을 품고 있지. 그 본능이 끝내는 자신의 목을 찌르는 이빨이 되는 거야.]“…….”
[개인적으로는 그 불완전성이 무척 매력적이고, 그만큼 귀한 표본으로 보존해야 할 종족성이라 생각하기는 하지만…….]박사가 말하는 사이에도 통신기 너머에서는 알 수 없는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진다.
“위험한 놈이다. 로기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당황하거나 티내지 않았어.”
마이야가 그렇게 대꾸하며 인적없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사람만이 가능한 대처다. 만약 로기어가 놈을 뒤쫓았다면 결과는 뻔하겠지.”
[후후, 틀린 말은 아니야. 그가 이번 결산에서 요청했던 정보만 봐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건 짐작이 되니까.]박사가 웃었다.
[괜히 명의 추천을 받자마자 입단해서 우물 작전에 참가한 게 아니라는 말이겠지. 아그네타의 전언도 그렇고, 아주 흥미로워…….]“흥미롭다고?”
[밑천이 드러난 웨어울프보다는, 아직 비밀이 많이 남아 있는 친구가 남는 게 더 재미있지 않겠나?]“…….”
지직, 지직……!!
마이야가 걸음을 옮길수록 박사와의 통신이 조금씩 끊기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이 완전히 끊겨버릴 거라 예측하면서도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번 결산으로 필요한 인과 조정치가 그럭저럭 모였어. 다음번에는 한 번 행동에 나서도 될 것 같군.]“관심 없어.”
마이야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제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박사는 그런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즐거운 목소리로 첨언했다.
[실패한 승천문의 프로젝트를 우리 손으로 다시 한번 재현해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무척 관심이 가지 않나?]“너, 지금…….”
[물론 그 목적은 기계도시가 추구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목적에는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흐려진다.
마이야가 무심코 귓가에 꽂은 이어폰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박사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승천문의 실패가 정말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지. 다음번에는 직접 확인해 볼 수 있길 바라지.]일말의 인사조차 없이 그대로 끊어지는 통신.
한참 동안 이어폰에 손을 올리고 있던 마이야는, 이내 미련 없이 그것을 빼내어 가볍게 밟아 부숴 버렸다.
파직!!
박사는 쓸데없는 말을 전하기 위해 같은 통신으로 연락을 취할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주어진 이어폰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쓸모를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하등 쓸모없는 짐짝에 불과할 뿐이다.
마이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시선을 돌려세웠다.
어두운 위성도시 밤거리 사이로,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사아악……!!
박사와의 통신이 끊겨 버린 것은 단순히 통신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 앞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세가 근방의 모든 흐름을 끊어내고 단절만을 강요하고 있을 뿐.
레녹은 항하사미궁 당시의 경험으로 마이야가 이벨린을 견제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기다리던 것은 현궁이 아니었다.
작전이 완전히 끝나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은한 존재감만을 흩뿌리던 누군가.
이번 작전에 참가한 두 명의 외인전력들 중 한 명이자, 이벨린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닌 괴물.
마이야는 이벨린뿐만 아니라, 또 다른 초인의 정체를 직감하고 아직 이 도시에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피해 도망치는 것보다는, 한 번의 결착이 훨씬 더 깔끔하게 일이 풀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욱!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새하얀 도포를 입은 청년의 모습.
비스듬히 숙인 고개를 따라 흘러내리는 백발의 머리칼과 등 뒤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새하얀 백색의 창대까지.
양손으로 가지런히 합장을 한 채, 눈을 감은 채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인 모습은 정갈하기 그지없지만.
마이야는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파멸적인 기세를 온전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8레벨의 극위능력자. 그것도 창이라는 장병기를 다루는 흔치 않은 무인.
온몸에 한점의 얼룩도 묻지 않은 듯한, 고아한 자태가 한밤중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 모습.
그 고결한 경지와 실력, 패기와 특이한 외견과 태도까지. 이런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 두 명 있기는 힘든 법이다.
마이야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혹시나 했지만, 그쪽이 이런 작전에 손을 빌려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오랜만이오, 렌슬릿 공.”
“금제율령의 해지가 크긴 컸나 봐. 도시 밖으로는 고개도 내밀지 않던 노괴가 위성도시까지 산책을 나올 줄이야. 세상이 정말 많이 변하긴 했군.”
살아 숨 쉬는 그 모든 순간에 한 줌의 오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여, 결백(潔白).
거대도시 발칸에서 금제율령에 묶여 있던 양지의 힘. 그 위세를 대표하는 괴물들 중 하나.
8레벨의 극위능력자이자, 대종사의 경지에 이른 창사.
발칸 양지에서 초인들을 양성하는데 힘쓰는 무문(武門)들 중에서도 가장 강성한 위세를 자랑하는 [투련문(鬪鍊門)]의 일원이자.
시정부 중앙의회 상원의원과 내부고문을 동시에 역임한 적도 있는 노괴들 중 하나.
연배로만 따지자면 마이야와 비슷한 수준의, 이번 작전에 참가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물이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정부에서 이번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투자했는지 드러나는 부분.
하지만 결백은 그것을 알면서도 새하얀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 때문은 아니오. 작전을 돕는 것 정도라면, 마르시아 그 아이에게 맡겨두는 것으로 충분할 테니.”
이벨린 마르시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낮춰 부를 정도의 연배.
“그렇다면?”
“당신 때문이지, 마이야 렌슬릿.”
합장을 푼 결백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자연스럽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키이잉……!!
동시에 그의 등 뒤에 꽂혀 있던 백색의 창대가 튕기듯 솟아올라 자연스럽게 그의 손안에 잡혔다.
단순히 마력의 힘만으로 창대를 조작한 것이 아니라, 애병 담긴 의념을 숨 쉬듯이 통제하는 경지.
새하얀 창대를 부드럽게 거머쥐는 것과 동시에 결백의 몸에서 거센 풍압이 터져 나왔다.
쿠오오오!!
양손으로 창대를 쥐고, 가볍게 돌리는 것 만으로 일대 공기가 풍차처럼 회전하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싸늘한 밤바람 사이로 후끈한 마찰열이 섞이면서 사방의 온도를 끌어올리고.
그 열원의 중심에 선 순백의 창사가 마이야를 보며 웃었다.
“기계도시 최고의 집행자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
“그때 못다 한 승부를 끝낼 수 있게 된 건 천명이라 생각하오. 당신과 나 역시 이런저런 제약에 묶여 있지만……. 오늘 하루, 이 밤만큼은 자유로울 터.”
“쓸데없는 일이야. 난 이미 지나간 승부 따위에는 관심이…….”
마이야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이내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지나간 승천문의 실패에 집착하고 있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싸움에 미친 이 노괴가 작전 따위는 전부 무시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대접은 해줄 수밖에.
한숨을 내쉰 마이야가 반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말했다.
“5분. 괜찮겠지?”
하지만 결백은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새하얗게 웃었다.
“충분하오.”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일어난 의지가 거대한 기둥처럼 바로 섰다.
* * *
콰아아아!!!
“……저쪽도 소란스럽군.”
밤하늘 사이로 터져 나오는 거대한 백색의 기둥을 목격한 레녹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레녹조차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울 만큼 규격 외 마력의 충돌.
아마 틀림없이 마이야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외인전력 중 한 명의 전투겠지.
마이야가 무슨 이유 때문에 아직 남아 일을 처리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레녹이 그쪽에 신경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두 눈을 까뒤집고 축 늘어진 로기어의 아가리에서 손을 빼낸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으로 한껏 흥건해진 레녹의 장갑 사이에는 새카맣게 점철된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박사의 명에 따라서 차례대로 분배받았던 신상의 눈알.
레녹은 로기어가 지니고 있던 수정구를 흘러넘치는 로기어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해 버린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심상에 쌓인 강렬한 기억들을 위주로 수집했으니, 추후 차분하게 조사하면 이 중 쓸 만한 기억이나 정보가 있겠지.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마지막에 일부러 놈을 흔들었던 게 도움이 됐군.”
그 정도 충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로기어를 요리하기도 어려웠겠지.
레녹은 잠시 자신이 한 일들을 쭉 돌아보고는 깔끔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지스와 복마전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내통자.
이런 상황에 어딘가에 휩쓸려 실종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이중첩자.
그렇기에 레녹은 처음부터 그를 통해 복마전과 이지스 양쪽의 정보를 뽑아먹을 생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은 복마전에서도 레녹보다 오래 일했을뿐더러, 이지스의 대원들을 양성하는데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 분명한 간부급 전력.
어떤 방면으로든 두 조직에게 있어 유용한 정보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레녹은 로기어의 존재를 짐작하자마자 그 사실을 깨닫고 이번 중간결산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큰 수확 하나를 챙겨갈 생각이었다.
“남은 건 세부 조정뿐이군. 일단 바이루츠를 벗어나서 끝내볼까.”
수정구에 원하는 기억이 담겼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직접 로기어의 기억과 대조해가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로기어를 죽여버리기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덜컹, 덜컹!!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열차를 올려다보며 마력사를 끌러 혼절한 로기어의 몸을 묶었다.
[그래도 시간에 딱 맞춰서 다행이네요.]“생각보다 너무 반응이 좋았어. 자칫 잘못하면 타이밍을 놓칠뻔했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기절한 로기어의 몸을 돌아보았다.
의식을 잃은 웨어울프의 몸이 쪼그라들면서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고 있다.
다비가 신기한 기색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인종은 평균적으로 짐승보다 인간에 가깝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봐요.]“그렇지 않고서야 내 마력을 소화시켰을 때 더 강한 늑대의 형상으로 변했을 리가 없겠지.”
뻐근해진 몸을 주무르며 레녹이 대답했다.
“보다 인간에 가깝기 때문에, 역으로 바라는 모습이 강한 짐승에 가까웠던거다. 그 사실을 로기어 본인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재능을 철저하게 가공하지 않고서도 이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로기어의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방증하는 셈이지만.
반대로 그 간극을 알아볼 수 있는 상대에게 틈을 찔리기도 쉬워지는 법이다.
남은 것은 이제 진통제의 약효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적당히 컨디션을 수습하고 발칸으로 복귀하는 것뿐.
그러지 않아도 암리타와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몸으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르느라 피로가 극심한 상황이다.
열차에 올라타면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 할까, 생각하며 레녹이 막 나타난 열차를 향해 고개를 꺾은 그 순간.
번뜩이는 녹색의 안광과 시선이 마주쳤다.
“…….”
[…….]철컹, 철컹!!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열차 위. 전신을 새카만 슈트로 뒤덮은 누군가 지붕에 올라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코끝까지 올려 쓴 두터운 바이저. 전신을 가리는 흑록색의 슈트. 차가운 밤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흑단발.
이지스의 대원들과 복색 자체는 유사하면서도, 그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차원이 다르게 고강하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감을 전혀 인지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생명반응.
그럼에도 가감 없이 다가오는 알 수 없는 섬찟한 한기까지.
레녹에게 향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감각하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사냥꾼의 눈길.
냉정하게 적을 관찰하는 듯한 궁사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레녹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