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693
약먹는 천재마법사 693화
마녀와 마탑(7)
-블레이버 마탑 염주의 라이프 토치가 끊겼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진 어두운 집무실.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방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의자.
그 끝에 걸터앉은 한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멀어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대충 연결해놓은 통신회선을 통해, 무뚝뚝한 남성의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동행시킨 말라시아 3석의 현장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작전 중 사망으로 판단. 현장파견 인원을 새로 구상 중에 있습니다.
침묵하던 여성이 물었다.
“사령부의 의견은?”
-가능한 빨리 일정을 앞당겨 달라는군요.
남자가 대답했다.
-청의 눈에서 건조한 다섯 번째 등대가 중앙전선의 장막 일부를 무시하는 것이 확인된 뒤로, 위기감을 느끼는 세력이 상당수 있는 모양입니다.
“…….”
-근래 합류한 제벽, 야니쿠스 바르바리아가 등대를 지키고 있다더군요. 이미 등대의 능력을 빌리는 것을 조건으로 먼저 협상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는 듯합니다.
“흐음…….”
-최대한 빠르게 위성을 완성시키고, 시연에 성공해야 군벌을 먹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발칸에서 쏘아 올려 중앙전선을 관측 가능한 위성.
전쟁에서 활약하던 재능 있는 마법사의 심신을 재료로 삼아 엔진으로 가공하고, 동력원을 확보하기 위해 마탑과 거래까지 마쳤다.
크나큰 출혈을 감수한 도박수. 하지만 성공한다면 중앙전선 외부 세력 판도를 크게 바꿀 수 있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리고 있었다.
블레이버 마탑의 염주가, 그 ‘동력원’을 들고 마탑에서 도망치기 전까지는.
“탑주 쪽에선 뭐라 들은 말 있어?”
여성이 물었다.
-……상정하지 않은 사항은 자율적으로 해결하라고만 전해 들었습니다.
“여전하네.”
남자의 말에 여성이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자기 제자가 수천억 셀이 투입된 사업을 망치고 있는데, 아직도 직접 나설 생각은 없다 지껄인다고?”
-현재 탑주가 어디에 동력을 대고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가 없다면 아르스노바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이 완전히 닫혀 버릴겁니다. 당장 손을 쓰기는 어렵겠죠.
“…….”
블레이버 마탑주. 염열계열 고유마법으로 위계를 초월해 인간을 넘어선 대마법사.
지옥같은 옥염을 휘두르는 그 명성과는 달리, 탑주는 굉장히 손속이 잔혹하고 영악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중앙도시로 향하는 관문의 동력공급을 자처했을 때는 손해를 자처하는 듯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자리를 차지한 상황.
그렇기에 블레이버 마탑은 전선에 개입해 이득을 취하면서도, 기묘한 중립자의 위치를 손에 넣었다.
마탑과 거래하여 위성제작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나, 문제가 생긴 지금 외려 그 사실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여성은 그런 남자의 통신에 말없이 침묵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스탁턴. 우리가 얼마만에 이 도시에 다시 돌아왔는지 기억하나?”
-……중앙전선에서 보낸 세월이 워낙 길었어야 말입니다.
스탁턴이라 불린 남자가 대답했다.
-짧게 잡아도 15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그래. 그때 이 도시에서 활동한 지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
-…….
“여길 봐. 사령부에서 사용하던 예비 집무실. 제대로 관리도 되고 있지 않아.”
의자 팔걸이 사이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낸 여자가 쓰게 웃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거지. 도시에 남겨두었던 관리인들도 모두 우리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야.”
-……페이샤 소장님?
“나는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페이샤의 그림자를 따라, 굳어가는 핏물이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그녀의 발치까지 흘러든 핏물이 이내 어두워지는 집무실 창문을 타고 유리창을 붉게 적셨다.
“그러니까 낡고 망가진 것들은 전부 폐기할 거다. 인간이든 물건이든.”
시선을 돌린 페이샤의 등 뒤로, 산처럼 쌓여 있는 수십 구의 시체들.
그 모두가 마치 보이지 않는 칼에 베인 것처럼 뭉텅뭉텅 잘려 숨이 끊어져 있다.
데드라이즈의 본대가 도시를 떠나 중앙전선에서 움직이는 사이, 자산관리를 맡겨두었던 관리자들.
페이샤는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불러놓고 모조리 참살해 버렸던 것이다.
뒤늦게 페이샤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스탁턴이 작게 탄식했다.
-사령부에서 알았다가는 분명 소장님께 문책이 내려갈 겁니다.
“상관없어.”
페이샤가 웃었다.
“바쥬르 님이 입신하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일이 이렇게 되는 걸 방관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
“내가 여기 돌아온 이상 단 한 번의 실수도 그대로 넘기지 않을 테다.”
챙그랑!!
의자를 걷어차자 집무실의 유리창이 박살나며, 낡은 건물 아래로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마치 건물 전체가 후회의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기묘한 풍경.
“위성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그랬지?”
-……일주일 정도라면.
“사흘로 줄여놔. 하루가 늘어날 때마다 책임자의 목을 치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 사이로 손을 뻗은 그녀가, 그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창을 꺼내 쥐었다.
창날의 길이가 어찌나 긴지, 페이샤의 키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천장을 찌를 듯하다.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엄청난 길이의 거창.
시체와 핏물 사이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날에는 한 줌의 얼룩이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마치 시체 더미 안에서 그 생기와 핏물을 모조리 빨아들인 것처럼 깔끔한 창극.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역수로 창대를 빗겨 쥔 페이샤가 말했다.
“사흘 안에 타티아나 치글렛을 죽이고 봉황전을 확보. 나머지 관계자들의 목을 위성에 매달아 쏘아 올린다.”
-…….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줘야겠지.”
다른 한 손으로 창날을 쓸어내리는 페이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우리가 이 도시를 잊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잊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야.”
* * *
찰칵!!
두꺼운 철문을 열고 녹색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걸어나온다.
머리를 헝클어 휘저으며 술집으로 올라온 남자의 모습을 본 레녹이 물었다.
“어떻지?”
“생각보다 훨씬 쉽던데?”
순혈 웨어울프, 킬리안이 레녹이 던진 연초를 한개피 물고 대답했다.
“머리좋은 놈이라 그런지 포기가 빨라.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 주더라.”
바의 카운터에 기댄 그가 웃으며 연기를 뻐끔거렸다.
“다만 정말 물어본 질문에만 대답해서 고통을 피하려는 속셈이라, 이쪽에서 뭔가 좀 더 알고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아서 잠깐 올라왔다.”
킬리안은 군수회사 다이크 기업 소속의 웨어울프로, 고문을 비롯한 험악한 일에 능숙한 경험자다.
레녹은 굳이 자신이 험악한 분위기를 꾸며내기보단, 전문가인 킬리안을 시켜 생포한 하프먼을 심문했던 것.
꽤나 간만이라 연락이 닿지 않을수도 생각했지만, 킬리안은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49구역까지 달려왔다.
그건 레녹이 언급했던 소식이, 다이크 기업으로서도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화제이기 때문이겠지.
“반, 그 소식 그래서 정말 진짜냐?”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보던 킬리안이 물었다.
“데드라이즈가 돌아오는거야?”
다이크 기업은 오래전에 레녹의 도움을 받아 음지의 무기산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발칸 뒷골목에 불법으로 제작된 총화기를 쏠쏠하게 팔아먹는 그들로서는, 데드라이즈의 귀환이 그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소식을 들은 킬리안이 곧장 술집으로 달려와 얌전히 협조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정황으로는 거의 확실해. 다만 본대가 직접 귀환하는 건 아니다.”
레녹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모종의 사업을 위해 핵심 간부 몇명만 발칸으로 복귀시킨 것 같더군.”
“이름은? 이름을 알아야 더 구체적으로 심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페이샤 그리스번.”
온몸에 붕대와 치유술식을 둘둘 감은 채, 말없이 카운터에 기대앉은 타티아나가 말했다.
“내가 들은 이름은 이것뿐이야.”
나직한 타티아나의 언급. 하지만 그 이름을 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페이샤? 페이샤가 돌아왔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 킬리안과, 한층 심각해진 제니의 얼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든조차 쉽사리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듯하다.
“유명한 사람인가?”
“모르는거야? 아니, 그렇군…….”
킬리안이 오히려 더 어이가 없다는 듯 레녹에게 반문하다, 이내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네가 어떤 마법사인지 잊어버리지. 데드라이즈가 떠난 뒤에야 네가 도시로 들어왔던가.”
“데드라이즈에서도 가장 사나운걸로 잘 알려진 귀희(鬼姬)야.”
제니가 대신 설명했다.
“귀희?”
“귀신들린 빙의능력을 여럿 사용하는데, 사람을 죽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살인귀로도 아주 유명하지.”
타티아나가 이어서 말했다.
“살인귀인 켈베로스 병단을 고용한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취향일 거다. 페이샤는 그런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지. 아마…….”
그와 함께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녹을 향해 모인다.
그 눈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레녹이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뭐,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피에 미친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 당사자보다 더 유명해진 지 시간이 한참 되지 않았던가.
레녹의 반응에 다른 사람들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니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마 너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닐 거야. 벡 클린턴의 스승이 페이샤였거든.”
“……벡 클린턴? 시거 뱅 갱단의 그 남자 말인가?”
레녹이 곧바로 그 이름을 기억해내고 반문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 마주했던 강력한 창사.
시거 뱅 소속으로 제니와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자이자, 레녹과의 전투 끝에 시계탑에 묶여 사망했던 초인이다.
조상의 혼령이라 불리는 여러 동물의 힘을 내려받아 싸우는 그 전투방식을, 페이샤 그리스번이 직접 가르쳤다는 말인가.
“그렇군. 벡이 너를 알고 있던 이유가…….”
페이샤가 카이세와 함께하던 시절부터 살아 있던 동료들 중 한 명이고, 제자로 벡을 데리고 다녔다면 제니와 안면이 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카이세가 사망한 뒤에 남겨진 제니와 데드라이즈 간부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카이세의 손녀인 제니에게 그들이 아예 완전히 접촉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겠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을 죽이는 건 물론이고, 범죄자와 민간인도 가리지 않아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
킬리안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는 뻔히 페이샤의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할 때도 있었지.”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네.”
침묵하던 조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그녀 자신이 저지른 일의 업보를 돌려 맞아 크게 변했지.”
“…….”
“페이샤를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닐세. 다만…….”
조든이 흐려진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들도 그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든은 제니뿐만이 아니라, 생전의 카이세와도 함께 했던 원로멤버들 중 하나다.
카이세와 함께 했던 데드라이즈의 간부들과도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일 터.
하지만 조든이 페이샤를 부르는 말투는, 단순히 그녀와 안면이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설마 그 여자가 먼저 돌아올 줄이야…… 그렇게 떠난 뒤로는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제니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타티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지친 기색으로 온몸 곳곳에 감은 붕대를 매만진 그녀가 물었다.
“내가 그 여자를 중앙전선에서 마주했을 때는 꽤 시간이 흐른 뒤였어. 발칸에서 무슨 일이 있었 거야?”
“데드라이즈가 중앙전선에 진출하기 직전에, 안타레스 용병단과 크게 충돌한 적이 있었지.”
제니가 대답했다.
“그 과정에서 페이샤 그 여자가 안타레스와 일대일로 결전을 벌였고…… 패배했어.”
“…….”
“척추가 완전히 꺾여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는데, 다시 돌아올 정도라면 치료를 끝낸 거겠지. 아니면-”
“안타레스를 다시 만나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거나.”
레녹이 던진 마지막 말에 좌중이 침묵에 잠겼다.
페이샤 그리스번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절절하게 실감했기 때문.
작게 한숨을 내쉰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난 저 하프먼이라는 놈을 좀 더 두들겨서 정보를 뽑아보지. 페이샤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사실을 대조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킬리안이 술집 지하실로 사라진 뒤에야, 제니가 타티아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좀 제대로 설명을 듣고 싶은데. 대체 그놈들이 왜 돌아온 거야? 타티아나랑은 무슨 관계고?”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하는 게 낫겠나?”
“……아니. 내가 하지.”
타티아나가 힘겹게 숨을 내쉰 뒤, 지금까지 있던 일을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했다.
청의 눈이 빠른 속도로 중앙전선 외부 세력구도를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데드라이즈가 블레이버 마탑과 손을 잡고, 인간을 재료로 삼는 위성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
재료와 동력원을 마탑에서 공급하기로 약속했으나, 타티아나가 계약을 깨고 도주했다는 사실까지.
“그렇구나. 청의 눈에서 등대를…….”
“…….”
신기한 듯 중얼거리는 제니의 말에, 레녹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천견이 사망한 뒤로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 줄 알았는데, 행보 자체는 오히려 훨씬 적극적이잖아.”
“그만큼 견제를 심하게 받고 있기도 하지. 애초에 지금 사태가 일어난 이유 자체도…….”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봉황전을 훔쳐 위성제작을 지연시키려 했지. 엔진제작에 다른 건 필요 없어도, 이 물건만큼은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
청의 눈에서 새롭게 건조한 등대가 중앙전선까지 그 공능이 닿는 바람에, 그것을 경계한 다른 조직에서 순차적으로 이런저런 행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
이벨린이 말했던 라피스의 공능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에 대한 말이었던가.
하지만 설마 청의 눈에게서 시작된 일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칠 줄은 레녹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반, 어떻게 할 거야?”
제니가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개입한다면 나야 도와주겠지만, 회사나 용병단은 도와줄 수 없어.”
“어째서지?”
“그야…… 지금 다 바다에 나가 있잖아.”
“…….”
레녹의 말 없는 시선에 제니가 살짝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유통망이 정상화된 뒤에는 로테이션을 돌릴 계획이야. 사업 체계가 잡힌 뒤에는 따로 전문 인력을 고용할 거고. 다만 지금 당장 자리를 비운 것 자체는…… 아니, 요즘 이쪽 수입원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아무 말도 안 했다.”
괜히 찔려서 혼자 폭주하는 제니를 두고 조든이 옆에서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타티아나 역시 옆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을 뿐.
잠시 생각을 정리한 레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일단 그 봉황전이라는 물건을 한 번 볼 수 있겠나?”
“…….”
“듣자 하니 그 물건이 원래는 위성의 동력원으로 사용될 계획이었다고 하던데.”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위로 돌렸다.
“반중력 기술을 차용한다 하더라도, 위성을 쏘아 올려 중앙전선까지 가시권에 넣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겠지. 분명 엄청난 출력을 지닌 아티팩트일 것 같은데.”
말이야 가볍게 하지만, 발칸에서부터 중앙전선까지 거리는 단순히 필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고도 험하다.
그런데도 발칸에서 쏘아 올린 위성이 중앙전선을 관측할 수 있을 정도라면, 거의 외해 밖으로 벗어나기 직전까지 위성을 쏘아 올려야 할 터.
인간의 힘으로는 저 바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이 세계에서, 그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에 도전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타티아나가 홀로 그 물건을 훔쳐 나왔다는 것도, 그것을 여태껏 몰래 숨겨놓고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사실.
그렇기에 레녹은 일단 그 봉황전이라는 물건에 대해 확인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술집 주변에는 888종의 보안결계가 중첩되어 발현되어 있다.”
레녹이 그녀를 설득하듯 말했다.
“내 눈앞에서 보여주는 한, 그 기운이나 방향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게 관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888종? 언제 보안 결계를 그렇게 덥수룩하게 쳐둔 거야?”
“제니. 덥수룩이라니.”
조든이 점잖게 타이르는 사이,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렵지 않지. 처음부터 하려던 일은 이쪽이었잖아?”
“…….”
“이번에는 방해받지 않게 잘 해보자고.”
타티아나가 웃으며 다시 나이프를 손등에 가져다 대고, 피를 흘려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낸다.
이번에는 레녹 역시 옆에서 의념을 통해 보조하며, 외부의 간섭을 완전히 차단하고 나선 상황.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받들린 것처럼 허공에서 하나둘씩 모여드는 뜨거운 선혈.
선명한 적색으로 빛나는 혈액이 한데 뭉쳐 타티아나의 눈앞에 떠오르더니, 이내 특정한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한 손에 들어올 법한 작은 적색의 수정체.
양 손으로 그 수정체를 받아든 타티아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한발 앞으로 걸어 나와 모두에게 그것을 내보였다.
“이것이 블레이버 선대 마탑주가 남긴 봉황전(鳳凰殿)이야.”
마치 작은 새의 머리를 형상화한 듯한 아름답고 정교한 외형이 인상적이다.
수정 안에서 불길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쉴 새 없이 그 안에서 회전하는 아름다운 적색의 의념.
봉황의 궁전. 그 이름에 걸맞게 불새의 머리를 한 수정체의 모습은 레녹이 보기에도 유려했다.
“봉황전의 능력과 사용처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한발 앞으로 다가선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봉황전에 손을 뻗은 그 순간.
“봉황의 의미에 대해 미리 알아두어야 위성의 제작 위치를 추정-”
타티아나의 손 위에 들려 있던 불새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불새의 형상이, 레녹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에 잠긴 술집. 타티아나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어라?”
[적성인자 인식완료. 9대 탑주 승계 조건 충족.]“자, 잠깐만. 이게……!!”
[인수인계를 시작합니다.]화르르륵!!
그 순간, 술집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불길이 순식간에 레녹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