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58
약먹는 천재마법사 758화
일인극(10)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또 공허한 적막만이 가득하다.
아직 제대로 완성이 되지 않은 것처럼 사방의 모든 것이 자리하지 않은 공백 사이로, 거대한 흑색의 문 하나만이 우뚝 서 있을 뿐.
“이곳은 탑의 권역 내부 의념을 형상화한 의식세계다.”
레녹이 흑색의 문 앞을 천천히 걸으면서 설명했다.
“아직 탑이 정식으로 완공되지 않아 닫혀 있지만, 조만간 시기가 되면 열리겠지. 중요한 건 문 너머가 아니라, 문의 존재 그 자체다.”
문틀을 한 손으로 짚고 돌아선 레녹이 등 뒤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 있을 생각이지?”
권역의 힘을 통해 구축해 둔 탑의 의식공간. 그 안에는 레녹 혼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레녹과 함께 마탑 회의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또 다른 한 사람.
싱클레어 마탑의 성위마법사이자, 아리스 리첼렌의 스승.
클라리스 리첼렌 역시 레녹이 설계한 의식공간 안에 끌려 들어온 것.
하지만 그녀는 이 공간 안에 들어오자마자 정체 모를 구름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린 채, 문 앞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가 막힌 일이군요.]한숨을 내쉰 클라리스의 전성이, 구름 저편에서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제 의식을 강제로 잡아채, 이 공간에 진입시키는 일을 이리도 수월하게 해내다니.]화악!!
직후 구름을 헤치고, 거대하며 새하얀 무언가 천천히 앞으로 떠올랐다.
“…….”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목이 긴 신수의 형상.
새하얀 깃털이 흩날리지만, 정확한 외형은 그 몸을 둘러싼 갑주로 인해 파악하기 어려웠다.
정교한 조각세공을 한 것처럼 아름다운 순백색의 갑주. 부유하는 새하얀 깃털을 지닌 신수의 모습.
구름 위를 헤엄치듯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그 동체의 크기는 레녹의 키를 한참 뛰어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쿤다라의 장생종이자, 인간이 아닌 종족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클라리스 리첼렌의 본체인가.
이 대륙의 생명종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해 왔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유려한 외견.
바람 한 점 없이도 나풀거리는 날개가 묘한 신비감을 더한다.
새하얀 갑주 안쪽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부드러운 눈과 마주한 레녹이 물었다.
“의식공간에서는 진체의 형상으로 투영이 되는군. 아까 장생종에 관해 했던 말이 이것 때문이었나?”
[평범한 인간의 의식은 이 모습을 쉽게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요.]클라리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저는 그쪽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군요. 순수하게 의식만이 자리한 이 권역에서, 저를 보고도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설명을 계속하지.”
레녹은 클라리스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신, 문을 두들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문은 탑의 모든 시설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시설의 상태와 정황을 관조할 수 있다. 그 능력을 조금만 응용하면 이렇게-”
카가각……!!
그 순간, 거대한 흑색의 문 위로 황금빛의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소형 입자 가속기. 칼라일 연구소.] [마력 소염제. 보이드 마탑.] [자가수리키트. 마도공학제작협회.] [스테모니아. 옥션.] [영천묵주. 스타니아 수도원.]……
“마탑에 반입되는 물건들을 기록하는 데이터베이스로 사용할 수 있는 셈이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문 위에 떠오른 [자가수리키트]를 쓸어올린 순간.
촤르르륵!!
양손 안에 가득 들어올 법한 복잡한 기계장치 꾸러미가 두 사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공간 안에서 간접적으로 이미지를 구축, 성능을 간접적으로 실험해 볼 수도 있다.”
당장은 이렇게 문 위로 명단을 적어놓고 정리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지만.
마탑이 완공되고 의식공간이 제대로 완성되면 이 안에 가상의 장물들을 채워 넣는 일도 가능해질 터.
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는 일 없이 자유롭게 수천가지의 아이템을 취급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
“필요한 것은 지점을 관리할 마법사과, 반입이 예정된 물품을 일정에 맞게 납품하는 것뿐이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문에 등을 기댄 채로 클라리스에게 물었다.
“한 달 안으로 마탑을 완공하고, 의식공간을 조정해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그때쯤이면 마탑 하층에 예비된 전시관의 모든 지점이 운영 중이겠지.”
[그리고 이 안에 들어올 모든 정보량과 의식체의 용량은, 오직 그쪽의 처리능력만으로 감당하는 셈이군요.]클라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탑주들이 대대로 계승해온 의념물질을 통해서도 겨우 구축가능한 의식공간을, 고작 한 사람이 어찌…….]“…….”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 정도로 강대하고 선명한 자의식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결정을 내릴 생각이 들었나?”
[알겠습니다.]클라리스가 두말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다.
“이해했다. 그럼 그 본체를 곧바로 움직여서 싱클레어 마탑으로 복귀하는 건가?”
[…….]이 대륙의 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물과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신비를 품은 듯한 묘한 분위기.
레녹이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형이군. 외겁도시에 기거하는 장생종들은 다들 이런 식인지 궁금한데.”
[아무래도 당신은 장생종의 개념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클라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길게 구부러진 새하얀 목 끝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좋아요. 어차피 선종의 반역 이후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할 테니까.]“승천자, 파우드 올더를 말하는 건가?”
[…….]클라리스가 순간 대답을 멈추었지만, 레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승천자 선종(善終). 본명은 파우드 올더.
주법의 수호자. 쿤다라의 흉성과 같은 온갖 기괴한 이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초월자이자.
그 이름 자체가 일종의 표식이자 신호로서 통용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레녹은 과거 카이세의 유품 중에서 그 이름이 인장으로서 적혀 있는 목걸이를 손에 넣었었고,
그것이 에단 바쥬르가 유일하게 손에 넣으려 했던 물건임을 예전에 확인했던 적이 있던 바.
[쿤다라의 일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군요.]클라리스가 물었다.
[장생종들이 어떻게 멸겁을 회피하려 하는지, 그 방법에 알고 싶은 건가요?]“아니. 내가 찾고 싶은 것은 카이세 바쥬르가 남긴 프로젝트에 대한 일이다.”
레녹이 대답했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가 끝난 뒤, 쿤다라가 개입해 손을 썼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지.”
[…….]“그를 확인하기 위해 한번 쿤다라에 방문하고 싶은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클라리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며 고르는 것처럼.
신수의 푸른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원래라면 외부인에게 이런 권한과 정보를 공유해서는 안 되겠지만…….]어쩐지 레녹은 그다음에 올 말과, 클라리스가 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앙전선의 장막을 기준으로 조만간 공전주기에 변동이 있을 겁니다.]“……공전주기?”
레녹의 말에 클라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련 없이 먼저 스스로의 의식을 거두고, 구름을 옷처럼 두른 채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을 뿐.
[그때까지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추후 다시 제게 연락해 주세요. 준비를 해둘 테니까.]* * *
“반. 잠깐만 이것 좀 봐줄 수 있겠냐?”
마탑 상층부에 마련된 집무실.
공사가 끝난 층부터 차례대로 입실한 사무실에서 타티아나가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근래 연락을 보내온 사업체들 중에서, 하나는 사업 투자. 하나는 마탑 내부 전시관 입점을 원하는데?”
타티아나가 말했다.
“후자는 들어주기 쉬운데, 첫 번째는 조금 어려워. 꽤 규모가 큰 사업에 투자가 가능한지 용건을 묻고 있군. 답신은 뭐라고 할까?”
“제니 쪽에 일단 전달해 줄 수 있나? 나중에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아, 그러지 않아도 제니가 너를-”
“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반대편에서 레녹을 발견한 여성이 빠르게 달려왔다.
뒤에는 온갖 박스와 소형 컨테이너를 어깨에 짊어진 채 땀을 줄줄 흘리는 펠릭스의 모습까지.
안타레스 용병단 굴지의 베테랑이, 이제는 마탑의 짐꾼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그 자세가 어색하지 않다.
능숙하게 머리와 어깨에 장물을 짊어지고 다가오는 펠릭스를 보며 레녹이 반문했다.
“무슨 일이지?”
“혹시 출자 가능한 현금이 있어?”
“……현금?”
“탑 내 유물전시관 확장을 위해서 관련 업체 술사들을 불렀는데, 비용 지불을 순수하게 현물로만 요구하고 있어.”
제니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말했다.
“당장 회사에서 움직일 수 있는 현금이 마땅치 않아서, 이쪽 비용을 지불하려면 여윳돈이 필요할 것 같은데.”
유통회사와 마탑 양측의 자금 유통을 맡고 있는 제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은 아니겠지.
애초에 제니의 조언이나 사업으로 인해 본 이득이 상당한 만큼, 여기서 잠시 현금을 빌려주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레녹 역시 지금까지 프리랜서로서 벌어들인 돈을 연구장비나 영약, 온갖 아티팩트 구입에 적지 않게 소모했다는 점.
최근에는 판데모니엄에서 움직인 탓에 수중에 현금이 얼마나 있는지도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레녹의 생각을 눈치챈 다비가 품 안에서 소곤거렸다.
“…….”
예전에 주식투자로 크게 혼쭐이 난 뒤로 레녹은 똑똑한 전뇌정령에게 투자를 대신 맡겨놓고 있었다.
사흘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레녹이 제니에게 언질을 주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끼이익!!
복도 아래쪽으로 보이는 마탑 정문 앞에, 휘황찬란한 스포츠카 한 대가 멈춰섰다.
방금 막 뽑아온 것처럼 차체 전면이 번쩍거리는 매끈한 차량의 등장.
하지만 레녹의 시선을 돌리게 만든 건, 그 안에서 벌컥 문을 열고 나온 익숙한 기척이었다.
화려한 원색의 정장을 걸친 채,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이쪽을 향해 자신감 있게 손을 흔들었다.
“……누구야?”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제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펠릭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밌다는 기색으로 마탑 메인 홀을 내려다본 레녹이 대답했다.
“용병단의 벨버다. 재밌는 모습을 하고 왔군.”
“벨버……? 그 맨날 주식에 돈 꼬라박는 도박중독자?”
그제서야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손을 흔드는 벨버를 알아본 제니가 입을 쩍 벌렸다.
“이럴 수가. 저런 한심한 투자자 녀석에게도 볕들 날이 왔단 말이야?”
“일단 내려가서 확인해 볼까?”
레녹이 피식 웃으면서 아래쪽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영문도 모른 채 불려 나온 타티아나와 함께 일행은 곧바로 메인 홀로 내려섰다.
레녹이 얼굴을 비춘 순간, 전시관 입점을 위해 사방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된다.
“겨, 견뢰다…….”
“눈 마주치지 마. 어떻게 나올지 몰라…….”
“아니, 우린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들어온 건데.”
“신경이나 쓰겠어?”
“…….”
레녹에 대한 흉흉한 소문에 대해 이 자리에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겠지.
하지만 일은 해야 하기에 다들 필사적으로 레녹의 시선을 피해 거리를 벌린다.
누군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돌아가는 상황을 훔쳐보기 위해 몰래 숨어 엿보기 시작했다.
레녹은 그런 이들을 신경 쓰는 대신, 당당히 걸어오는 벨버를 보며 시선을 돌렸다.
들썩이는 벨버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아 거의 목과 비슷한 위치에 있을 정도.
레녹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신수가 훤해졌군.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래. 마침내.”
벨버가 씰룩거리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침내 내 안목이 옳았다는 걸 증명했어. 투자에 성공했다고……!!”
“투자 성공이라는 게 그렇게 한 번으로 축하하고 끝낼 일은 아닐 텐데.”
“아니, 반 너는 몰라! 그동안 용병단에서 내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 벨버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허구한 날 돈을 땅바닥에 버리는 바보 멍청이라고…… 주식장에서도 폐지만 줍는다고 맨날 야단맞고…….”
“…….”
“다른 용병들에게 밥을 구걸하고 다닌다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아니, 밥을 구걸하고 다니는 건 좀…….”
“쓰레기 같군.”
냉정한 제니와 레녹의 평가에 벨버가 힘겹게 반박했다.
“매, 맨날 그러지는 않았어!! 맨날 그런 건 아니라고!! 유난히 마이너스가 났을 때만 그런 거란 말이다!!”
“…….”
“내 안목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는데, 그냥 정체 모를 세력이 자꾸 나를 방해해댄 것뿐인데, 왜 다들 그걸 몰라주는 거냐!!”
처절한 벨버의 외침을 뒤로하고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의 쌍둥이 동생은 어디 있지? 슬슬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벨리타는 외근을 나가 있을 거다. 중화기를 잘 다루는 터라 화력지원 쪽으로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편이지.”
펠릭스가 머쓱한 기색으로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 녀석은 내가 대신 데려갈 테니 걱정하지 마라. 벨버와 함께 사무소에 복귀하면 시간이 딱 맞겠군.”
“최대한 빠르게 부탁할게.”
제니가 펠릭스의 말에 대꾸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근데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해서 차익을 낸 거지? 최근 발칸 내수 시장이 불안정해서 이득을 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아, 그건 다 방법이 있지.”
벨버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이 질문을 던져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습.
“최근에 49구역에 마탑을 새로 생겼잖아. 탑 내 전시관에 입점하고 싶어 하는 사업체들이 잔뜩 몰렸고 말이지.”
“……그래서?”
“며칠 전에 봤는데, 우리 용병단에 경호를 요청한 사업체 중에 못보던 이름이 꽤 있더라고.”
“잠깐만, 그건…….”
“생각해 보니까 지금 새로 경호가 필요하다면, 마탑에 입점한 사업체가 아닐까 싶어서 돈을 넣어뒀는데, 대부분 주가가 확 올랐어!”
“…….”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모두가 레녹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