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89
약먹는 천재마법사 789화
요르타의 선지자(3)
쿠과과광!!
얼어붙은 지하감옥에 쉴 새 없이 요란한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옥을 뛰쳐나와 내달리는 죄수들과 냉풍이 불어오는 거대한 균열 너머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이들.
“선지자가 정말로 길을 만들었다!!”
“내가, 내가 먼저 나갈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죄수들의 모습.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죄수들이 팔다리를 휘두르자 그 여파로 감옥 창살과 벽면이 휘청이며 갈라졌다.
쿠구구궁!!
죄수들이 순식간에 지하 5층계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소식이 닿지 않은 다른 감옥까지 들쑤시고 다닌다.
인근의 감옥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다른 지구의 죄수들까지 풀려나며 그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네가 그 선지자야?”
“재수 없는 얼굴인데, 형씨.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주변에서 낄낄대며 레녹을 지나쳐 균열 너머로 달려나가는 죄수들의 모습.
레녹의 존재를 듣고 흥미를 보이는 듯하면서도, 이곳을 탈출할 생각에 급급해 보인다.
“이번에는 절대 걸리지 말고 사람을 처죽이고 다녀야지……!!”
“여긴 너무 추우니까, 지상은 따뜻하라고 불이나 처질러줄 거다!!”
“크히히힛!!”
레녹 역시 그런 죄수들을 바라보다, 그들을 따라 바람이 불어오는 균열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을 지나, 굽이진 균열 통로 너머로 떨어져 내린 순간.
파아앗!!
눈이 시릴 것처럼 푸른 빛으로 빛나는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에 마력 자체가 옅다 못해, 아예 마력의 공백지대처럼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허함.
하지만 정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결 더 강해져서, 두 눈을 뜨고 앞을 제대로 응시하기 힘들 지경이다.
“지, 진짜 탈출했다!!”
“이제 어디 갇히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거라고!!”
허겁지겁 레녹보다 먼저 정원을 달려 사라지는 죄수들의 모습.
감옥을 나온 시점에서 더 이상 통제에 따를 이는 어디에도 없다.
“서, 선지자…….”
정원 끝에서 죄수들을 구경하던 레녹이, 뒤늦게 균열을 따라 나온 거한을 돌아보았다.
“이제 좀 정신을 차렸나?”
“미친 자식…… 지금 이런 걸 계획이라고 내놓은 거냐?!”
거한이 기겁한 표정으로 레녹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딴 식으로는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해. 넌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일견 두려움이 비치는 표정으로, 거한이 저 멀리서 날아오는 백귀들을 가리켰다.
“요르타의 군령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군. 이런 소란 따위는 즉시 감지하고 달려 나올 거야!!”
“…….”
“빌어먹을, 다 틀렸어……!! 아주 은밀하게 균열을 통과할 수 있도록 손을 써두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왜 그렇게 생각하지?”
레녹이 반문했다.
“유령견문록의 저자가 뒤를 조심하라고 말했으니까?”
“……!!”
거한이 정곡을 찔린 듯 크게 목을 움츠렸다.
“너, 너는…… 어떻게 그걸…….”
“구체적인 탈출루트를 짜고 팀을 만드는 건 아주 강력한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견문록은 감옥 내부를 조사했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적혀 있었다. 죄수들 중 누군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
“……그 사실을 이 감옥에 들어온 지 고작 하루 만에 모두 파악했단 말이냐?”
유령견문록의 글귀를 발견한 시점에서, 레녹은 이 문구를 자신만이 보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이곳을 탈출하려 꿈꾸던 죄수들 중에서, 감방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자라면 이 글귀를 발견했을 수도 있겠지.
특히 레녹의 앞에 서 있는 거한은 자신의 신체를 변형시켜 비좁은 틈새를 통과할 수 있는 육체변형술사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백귀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복도를 돌아다니며, 견문록의 글귀를 발견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견문록의 조언을 보고도 그런 식으로 나오다니,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군. 이 지하층계는 요르타에서 버린 괴물들이 모여 사는 마굴이다.”
거한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필요한 이들만 모아 소수정예로 움직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멋대로 일을 키우다니……!!”
“지금 죄수들을 추적하는 백귀들 중에 죄수들을 직접 공격하는 자가 보이나?”
“뭐?”
레녹은 거한의 말에 대답하기 앞서 시선을 휙 돌렸다.
정원 사방으로 달려나가는 죄수들과 허공을 부유하며 그런 죄수들을 추적하는 백귀들의 모습.
회백색 두건을 뒤집어쓴 백귀들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도망치는 죄수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은근히 균열 안으로 몰아넣고 있지.”
“어……?”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거다.”
“…….”
“요르타의 범죄자들을 가두어두었으면서도 정작 그 구속이나 감시는 허술하기 그지없었지.”
거한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이는 사이, 레녹이 웃었다.
“의도된 함정이다. 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고의로 만든 탈출구로 몰아넣고 있는 거야.”
“그, 그런…… 탈출구 자체가 애초에 이 감옥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아니, 탈출구 자체는 진짜겠지. 이 감옥을 나갈 방법도 아마 정말로 존재할 거다.”
신녀의 계시와 유령견문록의 글귀. 두 가지 모두 거짓일 리는 없으니 탈출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
하지만 요르타 측에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죄수들을 탈출구로 유인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곳을 탈출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렵거나, 아주 위험한 괴물이 탈출구를 지키고 있는 거겠지.”
“……그것도 신통력으로 확인한 사실이냐?”
“아니, 돌아가는 정황을 추려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무심코 대꾸하려던 레녹이 말을 뚝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역시 그랬군!!”
[…….]신녀가 싸늘한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는 것도 무시한 채, 레녹이 뻔뻔하게 말했다.
“결과적으로 의도된 함정이든 아니든, 저곳이 이 감옥에서 유일한 탈출구라는 건 사실이다.”
“…….”
“그럼 최대한 많은 죄수들을 풀어놓고, 한 명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것이 맞지 않겠나?”
그제서야 레녹의 진의를 이해한 거한이 살짝 질린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 서 있는 선지자는 말 그대로 모든 죄수들을 이 감옥에서 풀어주려던 것이 아니다.
다만 탈출구로 향하는 길이 험난할 거라 생각하고, 죄수들을 던져넣어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
그것을 깨달은 거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을 내게 말해준 이유가 뭐지?”
“견문록의 저자는 군령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만큼 솜씨가 좋으며, 스스로 언급할 만큼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감옥 천장과 벽면 곳곳에 적혀 있던 견문록의 글귀들을 생각하며 레녹이 대답했다.
“감옥 벽에 숨겨져 있던 균열을 언급하며 탈출을 종용했다면, 이 정원에 그가 남겨 둔 조언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겠지.”
“…….”
“견문록에 대해 아는 죄수들을 모아서 기록을 가져와라. 그럼 내가 그걸 읽고 해석해서 다시 길을 알려주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거한의 등 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보아하니 이미 필요한 인원은 준비가 된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감옥 복도에서도, 조용히 거한과 레녹의 대화를 구경하고 있는 몇 명의 죄수들.
착 가라앉은 눈빛과 음울한 표정이 잔뜩 흥분한 탈옥수들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포섭하려던 멤버. 역시 가장 최근에 들어온 저 친구 이야기였군.”
거한을 제외하고 열 명 정도 되는 숫자. 아마 저들이 거한이 탈출을 위해 포섭했다는 팀원이겠지.
개중에서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이야기가 무척 잘 풀린 모양이야. 우리끼리 정한 계획을 상의도 없이 엎어버릴 만큼 말이지.”
“……선지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사실이 몇 가지 있더군.”
거한이 한숨을 내쉬며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당장 탈출을 도모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아무래도 견문록의 글귀를 좀 더 찾아봐야겠어.”
“끌끌…… 벌써 저자의 꾐에 넘어간 것이냐? 글렀군.”
노인이 거한을 비웃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다른 죄수들이 도망치고 나면, 우리 차례는 없을지도 모른다. 견문록의 글귀 따위를 찾는데 시간을 보내겠-”
“끄아아악!!”
그 순간, 정원 너머에서 누군가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도망친 죄수의 것이 틀림없는,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지른 단말마.
시큰둥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던 죄수들의 표정이 살짝 굳은 사이, 거한이 입을 열었다.
“선지자의 말로는, 무언가가 이 층계에서 나가는 것을 막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더군.”
“…….”
“견문록에 그에 대한 조언이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정원을 빠져나가며 기록을 찾는 것을 우선으로 하자. 괜찮겠나?”
“난 상관없어.”
비쩍 마른 남자가 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견문록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탈출구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가는 길에 그 친구가 남겨 둔 조언 몇 개 더 찾아본다고 별일이 생기겠어?”
“비슷한 의견이군.”
“예상 밖의 사태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덩달아 흥분할 필요는 없지.”
미리 탈출을 계획하고 지금까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죄수들 중에서도 유독 인내심이 좋고 침착한 이들일 터.
그래서인지 이런 소란 속에서도 쉽게 다급해지거나 흥분하지 않은 듯했다.
거한이 포섭한 죄수들 대부분이 동의하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노인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난 분명히 반대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내 책임은 아니라는 걸 알아두거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나아가며 기록을 찾겠다. 글귀는 따로 적어서 한 번에 모아 전달하는 걸로 하지.”
“마음대로 해라.”
거한이 힐끗 레녹을 돌아보더니, 이내 다른 죄수들을 이끌고 정원을 넘어 사라졌다.
아마 정원 사방으로 넓게 퍼져 나가며, 글귀가 적혀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나설 생각이겠지.
견문록의 저자가 감옥에 글귀를 남겨둔 방식을 생각하면, 한번 메시지를 발견하고 나면 그다음 조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거한 역시 그것을 알고 레녹의 제안을 수락한 것일 터.
레녹은 잠시 그에 대해 생각하다, 뒤늦게 다른 죄수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감옥을 탈출해 나왔지만, 여전히 바람을 따라 거꾸로 되짚어 걷고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식물과 덤불로 뒤덮여 있는 얼어붙은 정원.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는 정원 곳곳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묘비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 공간 전체가 공동묘지인 모양이군요.]신녀가 레녹을 힐끗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위령탑 지하 5층계가 무덤이라 불리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듯합니다.]“…….”
레녹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걸음이 닿는 근처 묘비에 멈춰 말없이 비석 아래쪽을 확인했다.
감옥 안에서 확인했던 유령견문록의 글귀.
그 글귀들 중 하나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
[서리군주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무덤.] [본디 지하 5층계의 이름은 이곳을 가리키고 있다.]“서리군주를 기리는 곳이라…… 이상한데.”
글귀에 적힌 문구를 확인한 레녹이 중얼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서리군주를 기리기 위한 무덤인데, 어째서 묘지는 이렇게 많은 거지?”
주변에 수천 개가 넘는 묘지를 돌아보며 레녹이 말했다.
“묘지가 이렇게 많은데, 정작 시체가 묻혀 있지 않은 묘지도 적지 않다. 꼭 미리 죽을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레녹이, 뒤늦게 이 묘지의 존재의의를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렇군. 탈옥수를 내버려 둔 이유가…….”
“끄아아악!!”
그 말에 화답하듯, 저 멀리서 뛰어가던 죄수들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묘지 아래로 끌려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잡아 당겨지듯, 벌판 위에 세워진 묘지 아래 처박히는 죄수의 모습.
“서, 선지자님!! 살려주십시오!”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땅에 파묻혀가던 죄수가, 레녹을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먼저 도망쳐서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이렇게 빌게요!!”
꾸드드득!!
얼굴째로 흙더미 사이에 파묻히며 목숨을 구걸하던 죄수의 목소리가 가늘고 높게 변했다.
“살려, 살……!! 아아아악!!”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는 죄수의 목소리가 뚝 끊긴 순간.
묘비 아래로 끌려 들어간 죄수의 시체 위에 백귀가 나타났다.
회백색의 두건을 뒤집어쓴 채 낫을 휘두르자, 희끄무레한 영체가 솟구쳐 백귀의 손에 담겼다.
육신과 영체의 분리. 이미 죽은 육체에서 그 영혼만을 너무나도 쉽게 거두어가는 그 모습.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신녀가 중얼거렸다.
[육신과 영혼의 분리. 이 무덤은 그 과정을 수월하게 처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군요.]“…….”
백귀는 레녹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마 다른 곳에서 죽은 또 다른 죄수의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겠지.
레녹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백귀를 따라 움직였다.
죄수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소란은 어느새 사라지고, 순식간에 고요해진 너른 벌판.
죽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묘지의 흙더미와 그 아래서 때를 기다리는 수십 마리 백귀들만이 섬뜩하게 보일 뿐이다.
레녹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했으면서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를 무시하는 백귀들의 모습.
묘지 옆으로 나 있는 길을 걸어, 마침내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의 끝에 다다르자 아까와는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 밖으로 나가는 길을 틀어막고 있는 드높은 얼음의 장벽.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채로 조용히 들썩이는 거대한 잿빛의 형체.
정원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끝까지 도달한 죄수들이,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얼음의 장벽을 힘껏 두들기고 있었다.
“길 열어!!”
“우린 여기서 나갈 거라고!”
쾅, 쾅!!
마력을 담아 힘껏 후려갈겨도 얼음의 장벽은 부숴지기는커녕, 흔들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던 죄수들이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선지자,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여기가 탈출구가 아니었냐고!!”
[…….]외려 레녹에게 역정을 내는 죄수들의 태도에, 신녀의 영체가 불쾌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레녹은 그런 죄수들을 신경쓰는 대신, 말없이 얼음의 장벽과 그 너머에서 몰아치는 냉기의 바람을 바라보았다.
지하 5층계 전체를 관통하는 바람과, 그 진원지에 위치한 거대한 형체.
분명 이것과 비슷한 구도를, 얼마 전에 마주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
“선지자.”
그 순간, 다른 죄수들을 이끌고 다가온 거한이 레녹에게 작은 종잇조각을 하나 내밀었다.
“묘지가 위치한 정원 인근을 돌면서 눈에 보이는 글귀만 적어왔다.”
“내용은?”
“그것이…… 너무 난해한 이야기라 나도 잘 모르겠군.”
거한이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힐끗 얼음의 장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감옥을 지키는 괴물에 대한 설명인 듯한데…….”
“수호령수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나?”
“……!!!”
이번에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버린 거한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런 거한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의 손에서 종잇조각을 집어 펼쳐 들었다.
감옥 전역을 관통하는 바람과 그 바람이 불어오는 진원지.
이 바람의 정체 자체가,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생명체의 호흡이라는 사실.
레녹은 바로 이런 구도를, 편람의 의식세계 안에서 한번 마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견문록의 저자가 남겨둔 글귀는 이 무덤의 주인에 대한 정보로 채워져 있었다.
[서리군주. 죽은 수호령수의 시체.] [만귀야행에 한차례 실패한 뒤 진행되었던 실험의 결과물.] [탈태의 저주를 뒤집어쓴 주검으로, 본질을 잡아먹혀 본능만이 남았다.]탈태의 저주.
일전에 승천자 편람이 언급하며, 레녹 자신의 수호령수를 상대로 경고했던 개념.
레녹이 그 단어를 확인하고 침묵하는 사이, 거한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지?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나?”
“…….”
“견문록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도 알겠지? 빨리 방법을 알려다오!”
“글세…….”
얼음 장벽을 향해 시선을 돌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걸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뭐?”
그 순간, 얼음 장벽 안에 갇혀 들썩이던 잿빛의 형체가 그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것만으로 얼음 장벽 사방으로 막대한 균열이 퍼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장벽을 깨부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저리 비켜!!”
무너져내리는 장벽의 파편에 삽시간에 깔려 죽어나가는 죄수들의 모습.
으지직!!
그런 죄수들의 시체를 짓밟고 걸어 나와, 구부정하게 찌그러진 몸을 천천히 펴내는 잿빛의 거인.
[후우우우…….]거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은, 수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질 만큼 섬뜩한 한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저건 요르타의 권역에서 태어난 영수의 시체다. 범죄자 따위가 상대할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레녹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럼없이 다른 이들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신을 대놓고 노려보는 서리군주의 음울한 안광을 마주하며, 레녹이 피식 웃었다.
“어쩌면 요르타에 찾아온 목표를 미리 하나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