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00
약먹는 천재마법사 800화
화신술식(2)
레녹은 곧바로 크라야의 안내를 받아, 영변 의식이 열린다는 요새의 관문으로 향했다.
온갖 서류와 관례, 의식에 필요한 예물들을 차례대로 지불하고 관문을 통과해 들어섰다.
요새 외곽에 위치한 광활한 연무장. 평소에는 주둔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공간이겠지.
타다닥!!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투박한 벌판 끝에는 연무장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방에서 미리 도착해 의식을 기다리는 참가자들이 대거 보이는 상황.
열댓 명 정도 되는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 실력을 재기 위해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 모인 모두가 영변 의식에 참가할 정도로 요르타 내부 정보에 귀가 밝은 이들이겠지.
철컹!!
관문을 넘어 너른 연무장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요르타에 들어온 뒤로 인상착의를 숨긴 일이 없었으니, 레녹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레녹은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런 말 없이 연무장 벽에 위치한 박스에 기대앉았다.
앞서 걷던 승려가 뒤늦게 레녹을 발견하고 당황해서 돌아섰다.
“거기서 뭘 하는게요?”
“기다리지.”
“영변 의식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듣지 못했잖소. 일단 단상 앞에 서 있어야…….”
“아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충은 알겠군.”
“……벌써?”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자신이 밟고 있는 흙바닥을 가볍게 발로 쓸었다.
흙먼지가 휘날리는 연무장의 땅을 바라보던 레녹이 말했다.
“연무장의 땅이 고르지 않고 지나치게 불규칙하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입을 다문 승려를 보며 레녹이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자답했다.
“제대로 관리할 틈이 없을 만큼 며칠간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는 거지.”
“잠깐만, 그 말은…….”
“의식은 며칠 전에 시작됐고, 우리는 일정보다 늦게 찾아온 손님인 셈이군.”
“…….”
승려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레녹이 연무장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참가자들의 등급을 나누고, 참가자를 미리 모집한 게 아닌가 싶은데. 현지인이 의식에 우선되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크라야가 지휘영변의 일정을 착각하고 있던 이유.
유령용의 요새에서 외부인에게 공개되는 정보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다소 자유로워 보이는 이 요새가, 굉장히 철저하고 체계적인 규칙 아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유령용 야오 쉰이 절차와 관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던 소문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건…….”
승려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더듬거리는 사이,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더니 단상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요새 안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 종이 여러 장을 든 채로 단상 위에 올라섰기 때문.
힘없는 인상의 노인이 단상 위에 서 연무장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며 섰다.
[모두 모였군. 이번 의식을 위해 참가한 지원자들이 맞겠지요?]“…….”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노인 역시 별로 관심은 없어 보였다.
마이크를 놓고 들고 있던 서류를 몇 장 넘긴 노인이 중얼거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소. 기준을 통과하기만 하면 최소한의 자격은 받을 수 있을거요…….]“그 기준이라는 게 뭐지?”
연무장의 가장 앞에 서 있던,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물었다.
“아직까지 시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설명이라도 빨리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음…….]사납게 숨을 내쉰 남자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씩 웃었다.
“뜸 들이지 말고 시작해. 난 지금이라도 준비가 됐으니까.”
“…….”
불쾌한 듯이 장비를 만지작거리는 이들부터, 남자를 보고 침을 탁 뱉는 참가자까지.
남자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기껍다는 듯이 고개를 느릿하게 흔들며 야유를 즐겼다.
[유령용께서 필멸자를 위해 정해둔 기준이 몇 가지 있소.]단상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드르륵!!
그 말과 동시에 노인의 옆에서 큼지막한 수레 한 채가 끌려 나왔다.
낡은 수레 안에는 작은 유리병 수십 개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이것을 하나씩 먹고, 요새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첫 번째 시험은 통과요.]노인은 유리병을 들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작은 알약을 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의식에 참여할 최소한의 자격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지……. 요새 안에 들어간 뒤에는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을 따라 순차적으로- 어엇.]노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수레 안에 있던 유리병을 하나 빼 들었다.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않고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빨리빨리 하자니까? 이 간단한 걸 두고 왜 자꾸 그렇게 뜸을 들, 이…… 는…….”
쿠웅!!
남자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더니, 이내 그 머리를 힘없이 땅바닥에 처박았다.
“게겍…… 그그극…….”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꿈틀거리는 그 모습.
하지만 의식은 멀쩡한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황급히 노인을 바라본다.
“…….”
그런 남자의 추태를 뒤에서 바라보며 놀란 듯이 숨을 삼키는 참가자들의 모습.
오만한 언동과는 별개로, 저리 자신감이 넘치던 남자가 약 한 알을 먹고 저리되어 버린 것인가.
그제서야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헤도라의 석약(石藥)이라 불리는 아주 강력한 마비약이요……. 평범한 인간은 복용 즉시 심폐기능이 멈추고, 초인조차 거동을 못 하게 만드는 극약이지.]“……마비약? 마비약을 먹으라고?”
[누차 말했지만,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은 간단하오.]노인이 차가운 시선으로 참가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힘이 없던 그의 목소리는 꽤 선명한 음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비약을 복용하고, 요새 안으로 걸어 들어갈 것. 그것이면 첫 번째 시험은 합격이요.]* * *
첫 번째로 마비약을 복용하고 쓰러진 남자를 수레 옆에 보란 듯이 전시한 채,
노인은 수레에서 담긴 마비약을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이 자는 사전설명을 충분히 듣지 않고 약을 먼저 복용했으니, 약효가 풀린 뒤에 다시 도전해야 할 것이오.]“…….”
침을 줄줄 흘리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남자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마비약을 들고 돌아서는 참가자들의 모습.
요새 본성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그런 참가자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마비약을 복용하지 않고 문을 지나치려 하면 즉시 보복하려 들겠지.
“마비약을 복용하고 요새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라니…….”
곤란한 표정으로 마비약을 만지작거리던 크라야가 중얼거렸다.
“약효를 온전히 받고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모양이구려.”
“…….”
레녹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승려의 감상에 수긍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이런 극약을 복용하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하고 약효에 제 몸을 내맡기는 일.
침샘조차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굳어버린 몸으로 어떻게든 걸어서 문을 통과하라는 말인가.
마비약을 꺼내 손안에서 굴리던 레녹이 물었다.
“헤도라의 석약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으음. 헤도라는 이 대륙에서 굉장히 유명한 외과의사로, 이건 그녀가 초인의 수술을 위해 고안해낸 극약이오.”
크라야가 대답했다.
“마력사용자를 수술할 때, 감각을 마취시키면 안 될 때가 있지. 하지만 마취가 없으면 고통 때문에 수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지 않겠소?”
“……환자가 고통을 느끼면서도 움직일 수 없게 하기 위해 만든 약이라 이 말이군.”
레녹은 그제서야 이 마비약이 얼마나 강력한 약효를 가지고 있을지 이해했다.
외과의사. 살과 뼈를 가르는 수술 중에 감각을 깨워두고 마비시킬 정도라면, 조금만 잘못 투약해도 죽음에 이르는 극약이다.
애초에 초인 시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어지간한 마력사용자는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력이나 주력의 사용 제안은 없다는 점이겠구려.”
크라야가 그렇게 말하며 마비약을 조심스레 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돌처럼 딱딱하고 쓴맛의 알약을 혀 밑에 넣고 굴리며 승려가 말했다.
“마비약을 먹고 난 뒤 가진 재주로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시험을 통과한다……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군. 저쪽에서 원하는 것도 그것인 듯하고.”
“…….”
본디 마력이란 체내를 회전하며, 타고난 감각과 직관으로 다루어 구현하는 힘.
신체 기능 대부분을 마비시킨 상태에서 체내 마력을 멀쩡하게 조작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험에서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능력이라는 사실을, 레녹은 짐작하고 있었다.
‘육체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를 다루는 솜씨를 보겠다는 의미군. 역시 이건…….’
육체와 정신의 이원화.
본질에서 한걸음 멀어진 뒤에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
역시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화신 술식을 전수하기 위한 기초적인 과정의 일부다.
그렇게 생각한 레녹이 손에 쥔 마비약을 매만지며 정신을 집중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키이잉……!!
‘역시 평범한 알약은 아니군.’
약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아주 농도 짚은 의념이 깊게 배여 있다.
의념의 물질화에 가까운 강제적인 지정명령의 흔적. 육신을 마비시키는 것 역시, 약효에 의념을 섞어 효능을 극한까지 증폭시킨 것이겠지.
그렇다면 대상지정 저항으로 능히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다.
그것을 확신한 레녹이 망설임 없이 마비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던 박스에 등을 기댔다.
“……후우, 정말.”
축 늘어진 레녹의 모습을 보며 크라야 역시 이를 악물고 마비약을 씹어 삼켰다.
으적!
강렬한 쓴맛에 정신이 혼미해진 순간, 크라야는 자신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찌이잉-!!
귓가에서 저릿한 이명이 울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경련하며 부들거린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도리질을 치는 사이 흙바닥이 쓸려나갔다.
기울어진 시선 너머 마비약을 먹고 뒹구는 다른 참가자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제서야 크라야는 연무장 바닥의 흙이 이리도 균일하지 못하게 패여 있는지 깨달았다.
레녹의 말대로, 그들보다 먼저 찾아온 참가자들이 마비약을 먹고 며칠 내내 연무장을 뒹굴었기 때문이겠지.
그것을 깨달은 크라야가 이를 악물고 주력을 끌어올리다, 심대한 탈력감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트, 틀렸……’
주력이 크라야의 의지에 호응하는 것과는 별개로, 육체는 응답하지 못하는 이질감.
그것이 실재하는 반동으로 돌아와, 크라야의 체내를 찢어버릴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대로 무리해서 주력을 끌어올리면 체내 혈관에 큰 손상을 입게 될 터.
다른 참가자들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바둥거리다, 창백한 안색으로 움직임을 멈춰 버린 상황.
약을 복용한 참가자도, 먹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던 참가자도 방법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사이.
쓰러져 있던 이들 중에서 누군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림자 로브를 뒤집어쓴 술사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중심을 잡는다.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듯 서성이면서도 순식간에 중심과 균형을 잡는 그 모습.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제 형편조차 잊고 그런 레녹의 모습을 응시했다.
“…….”
“……큭!”
분한 듯이 신음을 흘리면서 부르르 떨지만, 제 몸을 건사하기는커녕 마력을 다루는 일조차 버겁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가면술사와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엄두를 내기 어려울 지경.
다른 참가자들이 제 몸을 채찍질하는 사이, 레녹은 벌써 균형을 잡고 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저벅!
발길 아래로 쓸려나가는 로브자락을 확인한 수도승의 두 눈이 크게 뜨이고.
쓰러진 연무장을 천천히 가로지른 레녹이, 이내 순식간에 노인의 앞에 섰다.
[…….]의외라는 듯이 흑요석 가면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모습.
레녹은 그런 노인을 보며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노인이 웃으며 손짓했다.
[내게 굳이 다시 찾아올 필요는 없소…… 요새의 병사들은 기꺼이 문을 열어줄 거요.]마비약을 먹고도 육신을 움직여 걸을 수 있다면, 굳이 노인에게 다시 걸어올 이유도 없다.
그대로 걸어 요새의 문을 통과해 남은 시험을 모두 치르기만 하면 그만. 기껏 노인에게 다가와 확인받는 것부터 시간낭비에 가까운 일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런 말없이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손을 들어, 천천히 굳어버린 턱을 끼워 맞춘다.
“……아, 아.”
목과 턱 사이를 주무르며 혀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력사로 성대와 혀를 이어붙인 그 순간.
레녹이 자신의 성대를 직접 진동시켜 희미한 속삭임을 토해냈다.
“위령탑의, 진혼정에서…… 본 적이, 있지…….”
단상 위에 서 있는 노인을 제외한 누구도 듣지 못할 법한 희미한 목소리.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노인의 표정이 굳어버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신 술식으로, 구축된…… 화신체.”
[…….]“……유령용 야오 쉰.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순식간에 성대의 진동을 인위적으로 조절해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녹이 말했다.
“부탁할 것이 있다. 시험은 미뤄두고 잠시 대화나 하지 않겠나?”
[……흐음.]그 순간, 당황스러워하던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냉막하게 변했다.
인간을 벗어난 위화감이 느껴지는, 무기질적인 안광을 흩뿌리는 노인의 눈빛.
동시에 레녹과 노인을 둘러싸고, 흐릿한 안개의 장벽이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을 차단해버렸다.
콰아아아!!!
몰아치는 안개의 바람 너머에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법한 용의 안광이 번뜩였다.
[재주가 뛰어나다 싶어 내 친히 눈여겨보고 있었건만,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구나.]말없이 레녹을 바라보던 노인의 입에서 한없이 싸늘한 전성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견문이 더 넓은 놈이로고. 이 조악한 영체 너머로 그새 내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냐?]“…….”
위령탑에서 만귀와 싸우며, 극에 이른 화신체가 어떤 느낌인지 확인한 적이 있다.
레녹은 그 경험을 통해 노인 역시, 비슷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던 것이다.
이 유령용의 요새에서, 화신술식을 극한까지 익힌 존재라 하면 단 하사람 뿐일 터.
요새의 주인이자 진혼정의 관조자.
유령용 야오 쉰은 자신의 화신체를 보내, 참가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섬뜩한 안광을 빛낸 노인이 말했다.
[내 심기를 거스르는 부탁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느냐.]유령용 야오 쉰은 그 소문이 널리 퍼져 있을 만큼 절차와 관례를 중요시하는 성정.
그렇기에 지금 레녹이 정해진 시험을 무시하고 그를 부르는 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무간의 역문을 찾아야 하는 레녹으로선 이런 식의 접근이 섣부른 것처럼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레녹은 이 시점에서 유령용을 납득시킬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 이런 식으로 시험을 구상했는지 알고 있다. 화신조작의 적성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겠지.”
[…….]“그건 내가 다루는 계통에 있어, 숨 쉬듯이 상정된 재능의 일부다.”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에 덧붙인 마력사를 풀어 보여주었다.
차르르륵!!
그림자 로브 아래로 무수히 흘러내리는 은빛의 실선. 그 모습을 확인한 노인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마비약을 복용하고도 레녹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레녹이 대상지정 저항을 통해 마비약에 저항하거나, 혹은 약에 대한 내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녹은 자신의 몸에 마비약의 약효를 들이부은 뒤, 마력사를 뽑아내 자신의 몸을 인형처럼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초인과의 접근전이 불가피할 때, 레녹이 종종 사용해 왔던 비책이자 조작술식의 극에 달하는 기예.
이 정도로 완벽하게 몸을 마비시킨 것은 처음이지만, 요령을 잡고 움직이는 것까지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레녹의 낌새를, 눈앞에 선 유령용의 화신 역시 눈치채고 있을 터.
동시에 앞서 마련해둔 시험들이 레녹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겠지.
‘화신 술식의 전승도 전승이지만, 유령용을 만난 시점에서 역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해야 할 말을 정리하던 사이,
[그렇군…… 이미 자격을 갖추었으니, 빠르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팔짱을 낀 채 쓰러진 참가자들을 돌아본 노인이 중얼거렸다.
“…….”
레녹과의 대화에서 이미 그 의미를 다 만족해 버렸기 때문일까.
그 눈빛에서는 이미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좋다.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과정에 얽매이는 것도 외려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요새 바깥의 분위기가 꽤 자유롭다는 점에서, 레녹은 야오 쉰이 아주 꽉 막혀 있는 성정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규율과 관례를 중시하는 것과는 별개로, 영역을 다스리는 태도를 보면 나름 신념이 있는 존재일 터.
쿤다라의 고대종 출신이라면 자신의 태생과 존재에 드높은 자존감을 가진 존재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레녹은 그렇기에 그 기준을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요새 안에 들어가 일일이 시험을 치르고, 유령용을 대면하기 위해 관례를 익혀야 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니.
하지만 야오 쉰의 화신체가 다음으로 던진 말은 레녹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뭐?”
레녹의 다소 늦은 반문을 무시하고, 야오 쉰이 그 자리에서 영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요새의 하늘이 흐릿한 안개에 휩싸져 흐려지고, 용의 울음소리와 같은 괴명성이 울려 퍼진다.
쿠르르르릉!!
온몸이 마비된 참가자들은 돌아가는 상황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벌벌 떨고 있을 뿐.
레녹 역시 마비약으로 굳어버린 육신을 마력사로 조작해 거리를 벌리려던 그 순간.
순식간에 다가온 야오 쉰의 화신체가 레녹의 가슴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턱!
[화신체란 또 다른 자아의 구현.]강렬한 영기의 폭풍에 휩싸인 노인의 안광이 번뜩이며, 연무장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는 심신의 반발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빚어내는 위업이자, 무의식의 발로를 관측하는 섬세하고도 복잡한 일이니.]“잠깐, 절차를 생략한 부탁이라는 건-”
무간의 역문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는데, 야오 쉰은 화신 술식의 전승으로 이해한 것인가.
레녹이 그 대화의 간극이 어디서부터 벌어졌는지 돌이켜보던 찰나.
[바라지 않은 창조와, 원하지 않은 창생을 이곳에서 불러내노라.]유령용의 숨결이 레녹의 명치를 거세게 두들겼다.
파아아앙!!
강제로 화신체를 구축해 불러내기 위한 자아의 울림.
육체와 정신을 강제로 반발시켜, 본디 레녹에게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화신체를 구축하는 일련의 공정.
원래라면 이런 타자의 의념을 받는 일은 없겠지만, 술식의 전승이라는 뜻밖의 제안에 망설이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제안을 거부하고 역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화신 술식에 대한 미혹을 전부 해소하고 나아가는 것이 옳을까.
고민하던 레녹이 이내 신녀의 영체까지 회수하고, 정신을 고양시켜 직접 화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유령용의 의념이 전해주는 흐름을 따라, 순리를 거스르는 영과 육의 반발.
어째서 야오 쉰이 그렇게 절차와 순리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순리를 거스르는 화신 술식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외려 누구보다 순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거침없이 의념을 끌어올려 심상 위로 부상시킨 순간.
“……!!”
으지지직!!
레녹의 머리 위에서 새하얀 헤일로가 솟구치며, 안개의 장막 안쪽을 눈부시게 밝혔다.
우로보로스나 만화경의 황금빛 광채와는 전혀 다른, 창백하게까지 느껴지는 백광.
야오 쉰과 레녹이 그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느끼고 동시에 시선을 들어올린 그 순간.
콰아아앙!!!
헤일로 안쪽에서 터져나온 순백의 건틀렛이, 그대로 야오 쉰의 화신체를 찍어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