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02
약먹는 천재마법사 802화
화신술식(4)
레녹의 화신과 무인이 비스듬히 선 채로 서로를 마주한다.
중심축이 비틀린 구중도래의 태세를 동시에 취한 순간, 무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파앗!!
무인의 신형이 유령처럼 어지러이 흔들리며 좌우로 빠르게 흩어지고.
순식간에 화신체의 지근거리까지 질주해 강력한 정타를 꽂아 넣었다.
쿠웅!!
격렬한 굉음. 권격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강렬한 영기의 파동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사방에서 흐릿한 안개가 넘실대며 순식간에 복도 사방을 가득 메울 정도.
하지만 화신체는 그런 무인들의 공방에서 그 자리에서 무너지거나 소멸하지 않았다.
대신 들어올린 손을 들어, 양 손으로 손목을 스치듯이 밀어내며 의념을 회전시켰을 뿐.
위이이잉!!
화신체의 손끝에서 회전하는 창백한 헤일로가 엄청난 광채를 내뿜은 그 순간.
그들이 서 있던 복도 층계 전체가 그대로 폭발하며 엄청난 굉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악!!!”
유령용의 요새 일각이 거세게 흔들리며, 그 충격을 외부로 발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
레녹조차 일순 손을 들어 그 여파에서 시선을 돌리고, 사방에서 무인의 형체가 엄청난 속도로 튕겨져 나와 처박혔다.
팔다리가 으스러져 흐릿한 영기를 줄줄 흘리며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무인들의 모습.
“쿨럭……!!”
“이럴 수가, 반격기만으로 이만한 위력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방금 화신이 사용한 의념기의 존재에 경악한다.
이미 방금 그 한번의 공방으로 눈앞의 화신과 자신들 사이의 격차를 실감하고, 내심 패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확실하군.’
레녹은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여겨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화신이 무인들의 공격을 상대로 사용했던 반격기. 그것이 틀림없이 레녹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구중도래 무예. 그것도 제대로 된 위력을 구현해 사용할 줄 아는거다.’
도래의 무예로 전승되어 남겨진 구중도래 무예 팔반.
그 중에서도 박투술에 해당하는 반격기 [팔경].
레녹의 화신은, 그 무예를 굳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이 자리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력소모량도 괜찮아. 나와 달리 리스크 없이 구중도래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레녹이 사용하는 팔경은 그 위력이 절륜하지만, 사용할 때마다 레녹 자신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듯한 섬뜩한 위화감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껏 위력이 좋은 기술을 손에 넣고도 정작 전투에서 사용해 본 적은 거의 없던 바.
하지만 레녹의 화신체가 그를 대신해 구중도래 팔반을 자유롭게 다룬다면, 그것만으로 상당한 전력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잘만 하면 레녹이 기대했던 대로 전위와 후위를 구축해 전투에 안정감을 더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마스터,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니에요?]“……슬슬 끝내지.”
다비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화신체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한 번의 공방으로 승패가 결정이 난 시점에서, 이 전투를 오래 끌고 있을 이유는 없을 터.
화신의 다른 능력이나 무력을 시험해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큭……!!”
(…….)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 채 고개를 숙이는 무인들의 모습.
하지만 화신은 레녹의 말대로 공격을 이어가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전투가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노골적인 태도.
그 미묘한 반응을 즉시 알아차린 레녹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자는 거지?”
“쓸데없는 자비를……!!”
화신의 반응을 도발로 받아들인 무인들이 엉망진창이 된 몸을 움직여 재차 달려들었다.
파바바밧!!
두 명의 무인이 양옆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화신체를 향해 맹타를 때려 박았다.
반응조차 할 수 없도록 격렬하게 몰아치며, 중심축을 흔들어 궤적을 바꾸고 순서를 교란한다.
묵직한 권격이 허공을 두들기며 선명한 굉음을 내뿜었다.
두두두두!!
하지만 화신체는 무인들을 향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무인들의 공세를 선 채로 받아내기만 했을 뿐.
휘둘리는 주먹과 비틀린 팔꿈치를 멍하니 빗겨낸다. 힘의 흐름을 통제해 옆으로 흘려내고, 축적돼야 할 충격조차 깔끔하게 털어냈다.
키이잉!!
창백한 순백의 파문이 호수 위로 번지듯 회전하며 모든 공세를 무위로 되돌린다.
기술의 완성도가 가히 경지에 올라, 반격기를 펼치는 와중에 느껴지는 힘의 손실이 거의 없을 정도.
하물며 반격기를 사용할 때마다 회전하는 창백한 파문이, 선공을 뛰어넘는 위력으로 뒤집혀 쏟아진다.
퍼버버벙!!
요새 복도 사방을 거침없이 때려 부수며 터져 나오는 창백한 광채에, 외려 무인들이 휩쓸려 자멸할 지경.
그 위력을 확실하게 체감한 무인들이 경악 섞인 비명을 터트리고, 한편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수준이라니, 어찌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 무위를……!!”
“이런 비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왜……?!”
왜 반격기만 사용해 전투를 억지로 이어가려 하는 것인가.
이내 한 줌의 남은 의지마저 잃고 스러진 무인들의 군령들의 형상.
(……?)
하지만 화신체는 전투가 끝나 버린 뒤에도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쓰러진 무인을 향해 주먹을 휙 뻗었다가, 이내 허공을 어루만지듯 휘적거릴 뿐.
아예 왜 이런 동작을 취했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다.
“……곤란하군.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하지만 레녹은 그 몸짓을 보자마자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화신체는 지금 전투에서 팔경만을 골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사용할 줄 아는 기술이 팔경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을 모른다기보다는, 분명 알고 있는데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에 가까운 몸짓.
하지만 레녹은 그것보다 계속해서 허공을 어루만지는 화신의 팔을 향해 퍼뜩 시선을 돌렸다.
파츠츠츳!!
창백한 섬광으로 이루어진 화신의 팔이, 주먹 끝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져 소멸하고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형체를 잃고 한 줌의 연기로 돌아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
하지만 화신체는 팔이 부서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기껏 기억해낸 기술을 잊기 전에 몇 번이고 다시 사용해 보려는 듯한 기색.
“거기까지.”
하지만 레녹은 의념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화신체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끼이익!
(……!)
정상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엄연히 레녹 자신의 화신.
그 능력과 성정을 확인하기 위해 반응을 지켜보았을 뿐,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화신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풀어두긴 했지만 자멸까지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벌써 소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라.”
굳어버린 화신체의 몸에 마력사를 붙여 그 형상을 수복하고, 붕괴되는 것을 막는다.
적당히 화신체의 육신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 레녹이 박살 난 복도 너머로 요새의 남은 시설을 확인했다.
요새 안뜰로 향하는 거리를 가늠하면 남은 시험은 앞으로 한 번 정도.
무인들이 지키던 관문을 지나치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화신 술식.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힘이었군…….”
1세계의 권사와 관련이 있는 레녹의 화신체.
하지만 실전에 투입해 보니 기대했던 것과는 결과가 많이 달랐다.
한 명의 완성된 전사보다는, 형태가 정해진 기술을 대신 사용하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레녹은 그 능력의 기반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대천사의 연민을 통해 군령들을 물리쳤을 때도 그렇고, 어딘가 화신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빠르게 기억을 돌이켜보며 그 특징을 정리한 레녹이 정답을 찾아냈다.
“화신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술자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군.”
다비 역시 그런 레녹의 생각을 이해하고 황당한 듯 물었다.
[이 전구 덩어리는 마스터의 화신답지 않게 건망증이 심한 모양이네요?]“……그런 셈이지.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써먹을 여지가 있겠어.”
레녹과는 달리 팔경을 아무런 소모 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방패 역할을 할 수 있을 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녹이 화신을 다룰 때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했다.
“문제는 오히려 화신체의 내구성 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도가 너무 낮아.”
야오 쉰이 설명했던 것처럼, 레녹의 화신은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구축된 화신체가 아니다.
육체와 정신의 반발을 통해 화신을 구축하는 공정이 실패하고, 그 의미를 레녹의 재능으로 강제로 구현한 결과.
“반격기 팔경을 사용할 때는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괜찮지만, 직접 움직이면 어딘가 한 곳은 반드시 부서진다.”
무인들을 쓰러뜨린 직후 화신의 팔이 산산조각 난 것을 레녹은 잊지 않았다.
팔경을 사용할 때와는 달리, 몸을 직접 움직이는 수준의 충격조차 화신의 영체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
하물며 그렇게 부서지고 나면 레녹이 다시 마력사로 수복을 시켜줘야 하니, 마력 소모량은 배로 늘어난다.
뛰어난 무예. 절륜한 위력. 하지만 공격 한 번에 쉽게 부서져 수복을 필요로 하는 내구성.
레녹의 설명을 들은 다비가 화신의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마스터의 권투 버전이네요. 이제 보니 주인이나 화신이나 똑같은 처지 아닌가요?]“…….”
정령답지 않게 날이 갈수록 예리해지는 다비의 직언에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
뒤를 따라 걷던 화신체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
[마스터, 그럼 이 녀석을 어떻게 써먹으려구요? 이래서는 협력이고 공투고 아무 것도 안 되잖아요.]“……꼭 전위의 역할로만 화신을 써먹으란 법은 없지.”
당장 전위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구중도래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화신체란 어느 정도 의지가 있다고는 하나, 결국 레녹의 의지와 조작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
그렇다면 전투에 응용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자신의 팔을 화신의 팔뚝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우웅!!
흐릿하게 빛나며 레녹의 팔과 겹쳐지는 화신의 영체.
마치 레녹의 팔이 창백한 순백의 광채로 뒤덮여, 은은하게 빛나는 듯 하다.
레녹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까 말했지만, 이렇게 화신과 내 좌표를 겹쳐두면 마력소모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래서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레녹이 곧바로 허공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동시에 화신의 팔 역시 레녹의 팔과 겹쳐진 채로 움직이다, 어느 순간 떨어지며 간격을 벌렸다.
키이잉!!
마치 레녹의 오른팔이 두 개로 불어난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모습.
레녹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당장 화신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그 해답이 여기에 있군.”
* * *
레녹은 그 뒤로 요새 사방의 험악한 환경을 주파해, 요새 끝에 위치한 안뜰에 도착했다.
아까처럼 영락한 군령들이 달려드는 일이 몇 번 있었으나, 대천사의 연민을 휘두르자 쉽게 군령들을 소멸시켜 버릴 수 있었다.
아티팩트 안에 깃든 구세계의 대천사, 카슈인은 화신의 존재를 느끼고 몇 번이고 발작했지만.
오히려 레녹이 꺼내주지 않고 군령을 쓸어버리는 데만 집중하자 지쳐 조용해진 상황.
추후 카슈인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겠지만, 그것보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먼저였다.
쿵!!
안뜰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대한 묘지의 형상.
특이한 점이 있다면, 묘지 사방에 같은 참가자로 보이는 이들이 무수히 쓰러져 있다는 것일까.
“크, 으악……”
“쿨럭, 쿨럭……!!”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묘지 곳곳에 쓰러져, 힘없이 숨을 토해내는 사람들.
아마 저들이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의식에 먼저 참가해 시험을 치른 참가자겠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더 걷자 묘지 한복판에 묘지기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야오 쉰 님께 귀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묘지기가 레녹을 알아본 듯 곧장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영변 의식의 마지막 시험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지막 시험?”
“육체와 정신의 괴리를 통해, 순수한 의념의 힘으로 화신을 다루는 요령을 깨우치는 것. 그것이 본 영변 의식의 목적이지요.”
문지기가 대답했다.
“귀인께서는 지금까지 육체와 정신을 고립시키는 여러 난관들을 돌파해 오셨을 겁니다. 설령 그것이 시험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지요.”
“…….”
레녹은 그제서야 요새 곳곳에 왜 그렇게 영락한 군령들이 몰려다녔는지 이해했다.
오래되고 관리되지 않은 흔적인 줄 알았는데, 영락한 귀신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시험의 일환이었던가.
문지기가 설명했다.
“영변 의식의 마지막 시험은 영과 육을 순수한 의념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 묘지에 기거하는 고대의 수호령을 돌파해, 묘지 끝에 위치한 납골당의 문을 여는 것.”
문지기가 말했다.
“야오 쉰 님께서는 그곳에서 귀인을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덜컥, 덜컥!!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묘지 사방이 들썩이며 땅 아래서 무언가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낡은 갑옷을 입은 창사. 늙어 죽은 무투가. 가슴에 창대가 박힌 마법사. 머리가 둘로 쪼개진 성직자…….
묘지 아래 잠들어 있어야 할 시체들이, 섬찟한 마력을 흩뿌리며 사방에서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다.
그 시체들의 등 뒤에는 희끄무레한 영체들이 떠올라, 그 육신에 직접 동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쐐애액!!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내리찍히는 길쭉한 창대.
하지만 레녹은 마력사를 움켜쥐는 대신 떨어지는 창날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 세우려는 듯한 무모한 손짓.
그 직후 레녹의 손등 위로 창백한 화신의 영체가 떠오르며, 떨어지는 창날을 정면에서 받아세웠다.
마치 또 다른 팔이 팔꿈치를 두고 튀어나와 대신 공격을 받아내는 듯한 손짓.
키이이잉!!
그것만으로 레녹의 팔 위로 순백의 파문이 회전하며, 내리 찍힌 창극을 그대로 튕겨냈다.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강력한 반탄력이 묘지 공동을 가로지르며, 눈부신 광채를 일렁였다.
콰아아앙!!!
“……!!”
마력도 사용하지 않고, 손만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이 정도 위력.
그 말도 안되는 방어능력에 놀란 수호령들이 멈춰선 순간, 레녹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히 쓸 만하겠군.”
화신이 다루는 팔경을 리스크 없이 사용하기 위해 레녹이 고안해낸 새로운 방어법.
그것은 바로 레녹과 화신의 공간좌표를 중첩시켜, 레녹을 향한 공격을 화신이 대신 받아내게 하는 데 있었다.
“실드와 결계를 모두 해지해야만 움직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구명의 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 여긴다면 차고도 남을 터.
그렇게 중얼거린 레녹이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파앗!!
그림자 로브가 공간을 넘어 그 자리에서 십수 미터 떨어진 자리에 나타났다.
주변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며 달려들려던 수호령들이 경악 섞인 육성을 토해냈다.
“공간전이!!”
“특질계통에서 특히 위험하다는……!!”
파바바밧!!
레녹의 신형이 깜박이듯 점멸하며 수호령을 피해 질주한다.
따라붙는 검격은 비틀어 피해내고, 마주하는 방패는 박살내며 마력사를 사방에 휘둘러 걸쳤다.
촤라라락!!
너른 그물처럼 사방에 방사된 실의 장막이 순식간에 복도 일대를 가득 메우고 운신을 방해한다.
“성질변환을 마친 조작술식이다. 건드리지 마!”
“추적하지 말고, 길을 돌아서 앞질러 막아!!”
묘지 사방의 길을 가로막는 수호령들을 농락하듯 순식간에 돌파하는 레녹의 모습.
각기 다른 궤적과 방향으로 번뜩이는 섬광 속에서, 레녹이 의념을 한껏 끌어올렸다.
턱!!
창백하게 번뜩이는 레녹의 피부 위로 화신의 영체가 일렁이듯 겹쳐져 움직였다.
동시에 화신체가 사용하는 팔경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를 상대로 일제히 발동.
키이이잉!!!
어깨 위로 내리꽂히는 검격. 검을 움켜쥔 손목을 받아친다.
팔꿈치를 부딪쳐 회전축을 비틀고, 골반을 밟아 중심을 무너뜨린다.
발목을 겹쳐 무릎을 대고 돌아 다리를 꺾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는 수십 개의 시선.
가능성의 마안과 계시의 공능을 흉내낸 레녹의 두 눈이 시퍼렇게 번뜩이고.
창백한 파문이 레녹의 주변에서 연다랑 번뜩이며 수호령의 모든 공세를 찍어눌렀다.
두두두두!!!
“어억!!”
“모, 몸이!”
다른 수호령의 신형이 넘어지고 밀려나며 폭발하듯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균형을 잃은 몸을 밀쳐내고, 따라 달려드는 이들의 무게중심을 박살내며 앞으로 전진한다.
육체강화도 사용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받아넘기고 축을 박살 내는 데만 집중하는 반격의 극한.
순식간에 묘지 사방의 수호령들을 짓밟아 분쇄하며 축축한 수풀 사이를 주파.
방어는 오직 화신이 휘두르는 팔경에게 맡기고, 공간전이와 조작술식을 때려박아 수호령을 모조리 쓸어버린 순간.
“왔군.”
레녹은 납골당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한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
털썩!
마력사에 꿰여 걸레짝이 된 다른 마법사의 시체를 던지듯이 내려놓는다.
남자는 그런 레녹을 바라보며 비스듬히 몸의 방향을 비틀고,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동문의 무인을 이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이오.”
“……동문?”
레녹은 남자가 취한 자세를 보고 곧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요새에서 몇 번이고 보아왔던 구중도래 무예 팔반의 기본자세.
그것만으로 남자를 중심으로 일대 공간이 착 가라앉아, 무겁게 회전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우우웅!!
이 요새에서 만난 초인과 군령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고강한 무인.
“우리 수호령은 유령용과의 약속을 통해 망자의 육신에 깃들어, 속세에 남아 있는 존재로…… 미련만이 가득한 낙오자들이지.”
눈을 감은 채로 주먹을 움켜쥔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 역시, 위대한 무예를 익히고도 그것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는 회한이 남아있소.”
“구중도래가 위대한 무예라고 생각하나?”
“물론이지.”
남자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전사 도래의 기술이라 일컬어지지만, 나는 이것이 그를 뛰어넘은 대가의 무예임을 확신하오.”
“…….”
“여덟 개의 무기와 하나의 박투술. 특히 맨손으로 이루어지는 이 무예는 모든 기예의 근간이자 정수가 담겨 있는 바!”
침묵하는 레녹을 향해 남자가 물었다.
“그대도 그리 생각했기에, 나와 같이 무투를 익힌 것이 아니오?”
“……글쎄.”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의외로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처음 WORLD 1.0을 시작할때, 레녹이 어떤 마음으로 권사를 선택했었는지.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레녹과는 달리,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첫 번째 세계에 남겨진 그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단련해 왔을까.
두 주먹만으로 시작해 승천에 성공해, 실패한 세계의 신이 되어, 끝내 미쳐버린 광신의 온상이 되기까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그가 남긴 기억과 힘을 하나씩 주워 담고 있다.
“……그래. 서로 오래 끌어서는 안 되는 회한을 품고 있구려.”
레녹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남자의 기세가 한결 더 폭발적으로 변했다.
쿠구구구!!!!
남자가 중얼거렸다.
“우리의 만남 역시, 이 우연만큼이나 짧게 끝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
“말이 길었군. 전력으로 가겠소.”
우우웅!!
남자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의념이, 실재하는 압력이 되어 레녹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의념 자체를 무기로 삼아, 권격이라는 수단을 통해 쏟아내는 심상의 비의.
그것이 구중도래 무예 팔반. 박투술의 오의라는 것을 레녹이 직감한 그 순간.
(……아.)
희미한 속삭임과 함께, 레녹의 내면에서 거센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지금 저 무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화신체가 호응하는 듯한 기이한 감각.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듯 감각 전체를 일깨우는 강렬한 일체감.
그것이 야오 쉰이 일전에 언급한, 화신을 다루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레녹이 깨달은 순간.
무인과 레녹이 거의 동시에 같은 자세를 취하고 똑같이 움직였다.
구중도래 전승비의
의라구천(意喇求天)
화신체를 직접 다루듯이 움직여 쏘아내는 구중도래의 새로운 비의.
그 순간 창백한 헤일로가 레녹의 눈앞에 펼쳐지더니, 순백의 건틀렛이 무인을 관문째로 후려갈겼다.
“……!!!”
콰아아아앙!!!
건틀렛의 힘을 이기지 못한 철문이 일격에 분쇄. 무인의 신형이 으스러져 흩어졌다.
철덩어리 파편을 흩뿌리며 납골당을 깨부순 레녹의 신형이, 문 너머 펼쳐진 지하공동 아래로 떨어졌다.
쿠웅!!
흐릿한 안개에 둘러싸인 거대한 공동.
원형의 스타디움처럼 펼쳐진 공동 끝에, 새카만 빛으로 침잠하는 거대한 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위령탑에서 무간을 마주할 당시 육안으로 보았던, 근원을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진혼정을 만나고 돌아온 뒤, 계속해서 그 존재를 찾고 있던 무간의 역문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