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62
약먹는 천재마법사 862화
인수인계(30)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드넓은 편람의 의식공간.
낡은 돌바닥 사이에 자리한 수풀만이 우거진 채 펼쳐진 거대한 밀림.
외해로 향하는 우물이 되어 타락했던 의식체가 현실로 비상하고, 남겨진 공허한 벌판에서 편람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인간.”
현실의 육체조차 잠시 놓아두고 자리한 이 광대한 의식의 세계.
최고위 주술을 연달아 영창하며 시공을 깨부수려던 초월자는 자신이 하려던 일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대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투명한 눈으로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았을 뿐.
겨우 다비와의 의식연결을 마치고 돌아선 마법사의 눈동자에, 어린 소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오만함이라 비웃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로 보자면 결말에 이르리란 확신과도 같은 것이지.”
“…….”
“도달하기 전에는 막연한 감각에 불과하지만, 넘어선 뒤에는 분명 자각하게 되는 믿음이다.”
헝클어진 백발을 아무렇게나 펼치고 선 소녀의 발치에 드리운 그 그림자가, 어쩐지 거대한 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빌린 승천자가, 그러모았던 양손을 느릿하게 털어내며 시선을 돌렸다.
“너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군. 내가 기억하는 그 누구보다 강하게 확신하고 있어.”
“……그래.”
“일정한 수준 이상까지 스스로의 격을 끌어올린 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방법이 옳다는 아집을 손에 넣게 되지.”
편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다. 네가 도달할 결말 너머에서 대답을 지켜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테니.”
파드메 키에사가 말하는 결정이란, 아마 단순히 레녹에게 협조하느냐의 여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물을 지키는 뱀. 편람의 이명을 등에 업고 태어난 초월자.
스스로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면서도 책무를 다하는 그녀에게, 승천에 도전하려는 레녹의 존재는 단순히 피아를 식별하는 기준 따위가 아니다.
레녹이 만약 차후 승천에 도전하여 손에 넣은 결실이 만약 사명과 상반된다 판단할 경우.
그녀는 말 그대로 승천자로서 전력을 다해 레녹을 이 세계에서 배제하려 하겠지.
“천견의 중재를 받아들이겠다. 약속대로 의식체의 정수는 저 마법사의 수호령수에게 양도하지.”
“그럴 말할 생각이라면 일단 손을 쓰기 전에 먼저 통보해 주는 게 좋겠군.”
레녹이 황당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통보 없이 움직인 덕분에 현실에서 수호령수가 깨어났다. 당장 이곳을 나가 사태를 수습하기도 버거울 지경이군.”
편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
“자, 둘 다 거기까지 하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 레녹을 두고 천견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소녀의 어깨를 느긋하게 두들긴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파드메.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군. 당신의 조력이 없었다면 원만하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
“감사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구나.”
나른한 기색으로 한쪽 눈꺼풀을 매만진 소녀가 말했다.
“말했듯이, 지켜야 할 우물은 하나면 족하다. 덧씌워지지 않게 처리한다는 결과만 같다면,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알아. 예전에 들었으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도 그건 변하지 않았군.”
천견이 웃었다.
“하지만 난 달라. 내가 선택한 사명은 확실한 목표를 두고 행하는 과업이 아니라, 과정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는 유예에 가까우니까.”
“…….”
“조금 의심했지만, 저 마법사와 당신을 만나고 나니 알겠어. 나는 죽는 순간까지 처음 믿었던 그대로 행하여 떠났다는걸.”
천천히 편람의 어깨에서 손을 뗀 천견이 말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라가야겠지.”
“……과거의 분체에 불과하다 해도, 너 역시 엄연히 자격을 얻은 시점의 분체일 텐데.”
시큰둥한 기색으로 천견의 손을 쳐낸 편람이 대꾸했다.
“이제 와서 현세의 끝맺음이 어땠는지를 신경 쓰다니,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래?”
“…….”
묘한 침묵이 흐르고, 편람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할 일은 이제 없군. 돌아가겠다.”
이 의식공간에서 일어난 문제도, 그 과정에서 레녹과 천견을 상대로 충돌했던 소란도.
의식체를 쪼개어 수호령수에게 넘겨준 일련의 행동조차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하다.
그건 편람의 내면에 층층이 쌓인 갖가지 시간과 기억들이, 이미 그녀와 함께 끝없이 침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걸음을 돌려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잘 가.”
편람이 팔짱을 낀 채로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풍성한 군청색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시간의 흐름을 빗겨나간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잘 있어, 파드메.”
“…….”
다음에 보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레녹이 천견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올린 찰나.
지평선 너머로 걸어 사라지던 편람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 섰다.
“…….”
부서지며 흐트러지는 지평선과 붉게 물들어 노을지는 저녁 하늘.
같은 것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소녀가 투명한 눈동자로 천견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먼저 이 세계를 떠난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기억하려는 듯.
아무런 말없이, 천견을 마주하던 소녀의 신형이 어느샌가 거대한 뱀의 거체로 솟구친 그 순간.
아득한 벌판 위를 가득 채우고 돌아선 승천자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화악!!
“갔나?”
한껏 무게를 잡고 있던 천견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이상한 부분에서만 감이 좋단 말이지. 그건 변한 게 없군.”
“…….”
황당한 듯 바라보는 레녹을 무시한 천견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된 김에 일단 우리끼리 남은 일이나 처리해 볼까?”
“남은 일이라고?”
“주인이 사라진 이 의식공간은 조금 있으면 금방 무너질 거다.”
천견이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전에 네게 말해두고 싶은 일이 하나 있거든. 가능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다면 좋겠는데.”
쩌저적!!
그 말대로, 편람이 사라진 의식공간이 사방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빠르게 수축하고 있다.
본래 이 공간에 기거하던 의식체는 물론이고, 진짜 편람마저 떠난 공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고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는 것.
그것을 이해한 레녹이 천견에게 말했다.
“편람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의식체를 살리려 한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그 방법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두 승천자가 충돌하며 사태가 급박하게 흘러갔기에 놓치기 쉽지만, 천견은 분명 레녹을 도와주려 했다.
적어도 편람의 의식체를 레녹에게 양도하는 과정은 수호령수에 대한 고민을 눈치채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본의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그쪽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보장은 아닐 텐데. 왜 내가 당신에게 협조할 거라 생각하지?”
“까다롭군. 하지만 그럴 줄 알았어.”
천견이 웃으며 손을 젓자, 그녀의 뒤에 단출한 의자가 놓였다.
다소 힘겨운 듯이 의자 위에 걸터앉은 천견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도 부담이 될만한 위업을 부탁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애초에 그런 일을 맡기기에 넌 너무 위험하지.”
“…….”
“그래, 너는 위험해…… 그래서 솔직히 지금 이런 부탁을 해도 괜찮을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군.”
미간을 두들기며 고민에 빠진 천견이 중얼거렸다.
“등대지기의 공능은 누구보다 멀리 보는 것에 특화되어 있지만, 그것이 꼭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아니야. 어떤 의미로 보면 예지의 상위호환에 가까운 권능이면서도, 또 전지의 저주에는 미치지 못하기도 하지.”
“본론만 간단하게 하지.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라피스.”
천견이 말했다.
“네가 말했던 그 아이와 한번 만나야겠어.”
“…….”
“등대의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해 준 적이 있다는 건, 그 아이도 분명 알고 있다는 거겠지.”
짙은 푸른빛의 머리칼 사이로 천견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번뜩였다.
“만약 진정으로 사명을 지키기 위해 등대지기의 책무를 받아들였다면, 마무리를 지으려 할 거야.”
“마무리라.”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천견을 응시했다.
“그건 아까 당신이 언급했던 탈태의 저주와 관련이 있는 일인가?”
“…….”
천견은 대답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천견의 표정을 주시하며, 레녹이 느릿하게 말했다.
“라피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일이라면 거절하지. 그녀가 이끌고 있는 청의 눈은 대륙에서 상당한 입지를 차지한 데다, 다방면으로 도움을-”
무어라 더 말하려던 레녹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은 승천자의 기억이다. 구태여 다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어린아이다.”
“…….”
“당신이 물려준 사명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지.”
“……그래서?”
“후회할 일이라면 하지 않는게 좋겠군. 당신에게나, 라피스에게나.”
천견이 다소 놀란 듯이 시선을 들어 레녹을 바라보다 웃어버렸다.
“굉장히 인간적인 대답이로군…… 너 같은 마법사에게도 아직 그런 연민이 남아 있는 건가?”
“말했을 텐데?”
레녹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제 감정과 의지 하나 추스르지 못해 망가질 거였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천견의 얼굴.
머리칼 사이로 비춰지는 표정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젖은 듯하다.
“좋아…… 그럼 말 하나만 전해.”
천견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것 하나면 충분해. 알겠지?”
“무슨 저의인지 모른다면 굳이 전해줄 이유도 없군.”
레녹이 칼같이 말을 끊어냈다.
“대답을 들어야겠다.”
“아니, 넌 알고 있어.”
천견이 조용히 웃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아이가 나를 찾고 있다는 걸 알지. 결착을 짓고 싶어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 그렇기에 날 경계하는 게 아닌가?”
“…….”
“거절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 네가 어떻게 움직이든 결국 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레녹에게 일러둔 말조차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선뜻 그에게 맡기겠다는 천견의 언급.
그 시원스러운 수긍에 레녹조차 순간 의도를 읽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초탈한듯한 그 태도는 그녀가 위계를 넘어선 초월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쿠구구구!!!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벌판 위로 금이 가며, 붕괴되는 시공에서 두 사람의 의식이 다른 방향으로 부상하고 침잠한다.
급격하게 떠올라 현실로 부상하는 레녹의 의식을, 저 아래 가라앉는 천견이 올려다본다.
자신이 만들어낸 의자에 느긋하게 턱을 괸 채로, 사방에서 무너지는 세계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천견이 레녹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난 기다리고 있겠다.”
파앗!!!
그 직후 의식공간을 부상해 그대로 빠져나온 레녹이 얕은 기침을 터트렸다.
“콜록, 콜록!!”
의식체로 존재하던 공간에서 현실로 돌아오자, 육신의 무게가 다시금 무겁게 정신을 짓누른다.
약과 마법의 힘 없이는 아주 잠깐이라도 일상을 영위하기 어려운 굴레.
하지만 레녹을 진정으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마법사의 이성이나, 초월적인 직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후우…….”
뺨을 타고 떨어지는 땀을 닦은 레녹은 그제야 자신이 커다란 알껍질에 기댄 채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의 크기가 레녹만큼 커서 그 무게를 능히 기대 감당하고도 오롯이 서 있을 정도.
“……잠깐.”
멍하니 등을 기댄 채 생각을 정리하던 레녹이 위화감을 눈치채고 손을 멈췄다.
무겁고 묵직하게 흔들려야 할 알껍질이, 이상할 정도로 가볍다.
분명, 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무언가 바깥으로 빠져나간 게 아니고서는-
[야, 뛰어다니지 말라니까!]쐐액!!
레녹의 옆에서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 스쳐 지나간다.
온몸에 아직 다 깨지지 않은 알껍질을 주렁주렁 매단 채, 신이 난 것처럼 마탑 지하공동을 누비는 무언가.
머리 위에 작은 새끼여우를 얹은 채로 미친 듯이 머리를 마구 흔들어 젖힌다.
[유후, 유후~]흉내 내기도 어려운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레녹의 주변을 맴도는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육안으로는 포착하기조차 어려울 정도.
“……설마.”
그 의미 모를 형체가 알 안에 잠들어 있던 개체임을 직감한 레녹이 마력감지를 끌어올린 순간.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공동을 뛰어다니던 무언가 레녹의 마력을 느끼고 그 앞에 멈춰 섰다.
그제서야 레녹은 자신의 앞에 멈춰서 느릿하게 유영하는 형체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유후?]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레녹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끼 용의 형상.
레녹의 허리춤까지 오는 키에, 뱃살이 투실투실하게 튀어나온 퉁퉁한 모습.
뒷발로 몸을 지탱하고 선 채, 두꺼운 앞발로 길쭉한 주둥이 사이에서 빛나는 두 눈을 턱 덮는다.
그렇게 앞발로 제 머리 곳곳을 쓰다듬어 정돈한 수호령수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레녹을 바라보았다.
마치 레녹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름 정돈을 하는 듯한 열의 어린 손짓.
“……잠깐.”
레녹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수호령수가 이렇게 살이…….”
[……이잇후.]별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는지, 레녹의 머리 위에 대뜸 자신의 앞발을 얹은 새끼 용의 반응.
그것을 보자마자 영수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던 다비가 냉큼 용의 콧수염을 잡아당겼다.
[마스터한테 건방지게 뭐하는 거야!] [아후, 아후~]다비를 어떻게 떼어내지도 못하고 아프다는 듯 바닥을 뒹굴뒹굴 굴러다닌다.
눕혀놓고 가만히 지켜보니 용이 아니라 공처럼 느껴질 만큼 둥글어 보이는 형체.
설마 종족이나 계통의 문제보다, 저 체형이 먼저 눈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알에 숨어지내며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은 반작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일까.
[쿠우~]레녹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드러누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잠들어버리는 수호령수의 모습.
길쭉한 주둥이를 위로 치켜든 채, 콧방울까지 양쪽에 매단 채로 형편 좋게 숙면을 취한다.
“……”
레녹은 세상모르고 잠든 수호령수를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벨린, 나다.”
곧바로 통화가 연결된 휴대폰을 든 채로 일어선 레녹이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라피스의 경호 건. 받아들이지.”
[……!!]휴대폰 너머에서 빠르게 대답하는 이벨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천견의 의식체는 라피스를 만나겠다 말했지만, 마지막까지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천견이 라피스를 만나려는 이유가 그녀가 말한 탈태의 저주와 관련이 있다면.
포식자에게 수렴하는 그 저주가, 영수뿐만 아니라 승천자에게도 통용된다는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번에는 라피스의 곁에서 상황이 어떻게 진척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터.
라피스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위업이 초월자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아볼 기회임은 틀림없다.
“그래. 주시자 쪽 신분으로 갈 테니, 라피스에게도 미리 말해줘. 부탁하지.”
당연하지만 라피스를 호위하는 임무에는 에반 마르티네스의 신분으로 움직여야 할 터.
발칸에서 주시자 측으로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라피스는 에반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관계자들 중 하나다.
미리 주의를 준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터.
“그럼…….”
통화를 마친 레녹이 곧바로 수호령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로보로스의 힘을 갖고 태어난 데다, 탈태의 저주로 묶일 만큼 편람과 인접한 계통의 수호령수.
그렇기에 레녹 역시 그 종족이 어느 쪽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온전한 용의 형태로 태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뱀이나 이무기, 혹은 파충류에 인접한 고위 마수나 영수의 형태를 취할 거라 예상했는데, 하필 용이라…….’
대륙 사방을 여행하며 많은 생명을 만났지만, 레녹이 알고 있는 진짜 용은 많지 않다.
요르타에서 만난 유령용 야오 쉰. 쿤다라의 일원이었다던 용의 화신체만이 레녹이 직접 보았던 유일한 용종이었으니.
적어도 수호령수가 어떤 능력과 태생을 가지고, 레녹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레녹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곯아떨어진 수호령수를 깨우려 했지만.
[이 녀석, 일어날 생각이 없는데요?]“…….”
[드르렁, 푸우~]뒤집고 흔들어도, 마력으로 머리를 두들겨도 일어날 기미조차 없다.
누가 대뜸 목덜미를 잡고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든 새끼 용의 모습.
“……어리니까. 잠이 많을 나이긴 하지.”
레녹 역시 막 알을 까고 태어난 영수를 무리하게 깨우거나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수호령수가 자연스럽게 깨어날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에 떨어진 알껍질 파편을 마법으로 그러모으려던 찰나, 아직 알림을 꺼두지 않은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삐빅!
무시하려 했지만, 마력감지를 통해 스크린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가 곧바로 감각에 읽혔다.
발신자 불명. 견뢰가 외부 업무 용도로 사용하는 회선에 직통으로 꽂힌 전언이다.
[극위능력자 간의 회담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하단에 표기한 좌표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회담이라…….”
레녹이 휴대폰을 덮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논의가 빠르다.
수호령수가 잠들어 있는 지금이라면 잠깐 시간을 낼 수는 있겠지만-
“조금 짜증 나는 건 사실이군.”
레녹의 회선을 어떻게 알아냈는지와는 별개로, 직접 부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녹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