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61
약먹는 천재마법사 861화
인수인계(29)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하늘에 떠오른 자신의 의식체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
“…….”
거대한 뱀이 제 몸으로 고리를 만들고, 스스로 우물이 되어 외해의 어둠을 퍼 올리는 섬뜩한 풍경.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던 소녀가, 언짢은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린 그 순간.
쩌적!!
의식공간의 하늘 위에 떠오른 거대한 우물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콰아앙!!
짙은 어둠에 물들어 녹아내리던 뱀의 거체가 쪼개져 비산하다 조금씩 소멸하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흘러나오는 어둠을 그대로 우물 너머로 밀어낸다.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으려는 듯 발작하며 꿈틀대는 어둠의 덩어리를 무시하고, 우물이 되어버린 의식체를 바스러뜨린다.
쿠과과과과!!!!
그 모든 일을 지평선 너머에 가만히 선 채, 눈짓 한 번으로 처리하는 편람의 모습.
분체나 기억의 일부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승천자가 개입하면 이 정도 지배력을 가지는 것인가.
“멋대로 방치해 둔 의식공간이라 해도, 이 정도로 문제가 생긴다면 본인이 개입할 줄 알았지.”
두두두두!!!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지는 우물의 파편을 한 손으로 쳐내며 천견이 웃었다.
양손을 맞잡고 돌리면서 걸어 나온 등대지기가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래된 의식체가 타락해서 외해와 연결되어 버리면, 현실의 네게도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과거의 망령과는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군.”
천견의 낭랑한 목소리에도 소녀의 얼굴은 한없이 고요했다.
“우리의 소회조차 이제 와선 무의미할 뿐이다. 무언가를 교감하기엔 너무 늦었지.”
“…….”
분노하거나 짜증을 내기는커녕, 아무런 자극조차 느끼지 못한 듯한 무감각한 표정.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무표정이, 눈앞의 소녀가 외형만을 빌려온 초월자라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네가 세상을 떠난 뒤로 수천 번의 밤이 지났는데, 아직 그 미련이 이곳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구나.”
소녀의 몸을 빌려 의식공간에 내려선 편람, 파드메 키에사가 조용히 답했다.
“의식체에 생긴 문제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너도 이만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하여라.”
머리 위에서 산산조각 나 부서지는 자신의 의식체를 돌아보며 편람이 말했다.
“네 육신이 현실에서 영면에 든 이상, 언제고 저것과 비슷해져도 이상하지 않겠느냐?”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여기 있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거든.”
천견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사라지기는 조금 이르지.”
“의식체를 등대 삼아 외해를 관측해, 멸망을 유예한다는 사명 말이군.”
소녀의 얼굴에 순간 희미한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났다. 우리는 분명 비슷한 처지였지. 감내했지만 원하지 않았던 책무에 괴로워했어.”
“…….”
“그 말투, 그 목소리…… 그래, 너는 내가 기억하는 천견에 무척이나 가까운 존재구나.”
“당신은 많이 변했어. 성격도, 말투도. 이것보단 훨씬 온화했었지.”
침묵하는 편람을 향해 천견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알아. 승천자도 변한다는 걸. 자격을 손에 넣고도 생각은 계속 달라지지. 죽기 직전에 마음을 바꿔먹을 때도 있어. 어쩌면 나 역시 그랬을지도 모르지.”
“…….”
위계의 끝자락, 9레벨에 올라 승천자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달라진다.
더 나아지기도, 더 나빠지기도 하며. 무언가를 더해가고, 또 마모되어가며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을 유영한다.
레녹에게 결계술을 넘겨준 진둔이 그러했던 것처럼, 외신을 향해 뛰어든 계백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천견과 현재의 편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원하지 않았던 회한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우물은, 내 의식 안에 새로이 생겨나는 문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천견을 응시하던 편람이 입을 열었다.
“내 고향. 내가 태어난 세계. 나를 기른 이들이 떠난 터전. 나는 대수림의 문을 지키고, 이 세계가 외해와 연결되는 것을 막는다.”
“왜 지켜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해도?”
“그래.”
편람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비쩍 마른 갈색의 손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떠오른 수십 체의 주술문자가 손목을 타고 유려하게 휘감기기 시작했다.
“이 의식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새롭게 재구성하겠다.”
[밀법(謐法)] [종문(腫紋)] [사락(沙絡)] [태하(太霞)]소녀의 키를 뛰어넘는 거대한 주술법진이 완성되며 눈부신 녹색의 광채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구겁(求迲) : 외절(外絶)]위이이이잉!!!
주술사로서 승천자의 경지에 오른 초월자가, 스스로 술식을 영창해 사용하는 구겁의 주술.
레녹조차 그 주술이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진동을 품고 있다는 것만을 겨우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편람이 꺼내 든 녹색의 광채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의식공간 전역으로 퍼져나가, 공간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그 순간.
허공에서 번뜩이며 내리꽂힌 낙뢰가 뒤엉키는 녹색의 주술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파직!!!
의식공간에 형상화된 날카로운 번개의 의념이, 주술이 완성되는 순간을 정확하게 찔러 멈춰 세운다.
지켜보던 천견이 휘파람을 불고, 영창을 방해받은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 이게 무슨 짓이지?”
“승천자의 결정이라 해도, 가만히 앉아 소멸할 생각은 없어서.”
레녹이 식은땀을 흘리며 슬쩍 시선을 들어올렸다.
카가가각!!!
복잡한 실타래처럼 조립되는 주술문자 사이를, 새파란 뇌광이 파고들어 형성을 막아 세우고 있다.
의념이 승천자의 의지 위로 덧씌워 주술의 운용을 잠시나마 멈춰 세우는 신기.
열쇠와 자물쇠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억지로 문대 빗나가게 만드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승천자의 영창을 지연시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
“마드레아. 시간이 없다.”
억지로 편람의 주술 사이를 멈춰 세우는 것만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역산이나 파훼가 아니라, 순전히 의념의 힘만으로 승천자의 술식을 방해하는 건 레녹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
하지만 편람은 레녹이 멈춰 세운 자신의 주술을 보고도 별로 동요하지도 않았다.
“막을 생각인가?”
멍하니 중얼거린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다른 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내저었을 뿐.
“그럼 하나 더 만드는 수밖에.”
“……!!!”
[밀법(謐法)] [종문(腫紋)] [사락(沙絡)] [태하(太霞)] [구겁(求迲) : 외절(外絶)]레녹의 방해에 얽매이지 않은 9레벨의 주술이, 정확하게 같은 자리에서 반복영창을 완성.
콰아아아앙!!!
소녀를 중심으로 솟구친 거대한 녹색의 기둥이 수백 갈래로 쪼개져 비산해 하늘 위로 거대한 그물을 그렸다.
하늘 위로 떨어져 내리는 우물의 파편, 한때는 자신의 의식체였던 영체들을 모조리 그러모아 한 번에 움켜쥔다.
마치 수십개의 손가락을 지닌 손아귀처럼 오그라든 그물이 그대로 압착되어 수축하고.
손에 들어온 의식체의 파편을 동력으로 삼아, 이 의식공간을 통째로 깨부수려던 찰나.
“자신의 의식 일부를 통채로 지워가면서 문제를 없애려 하다니, 그런 사고방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대번에 소녀의 앞에 나타나 그 손목을 낚아챈 천견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키이잉!!!
그 순간,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이 살짝 흐트러지더니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마드레아.”
“의식체가 기거하던 공간이라 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주술의 방향을 강제로 비틀어 영창의 균형을 무너뜨린 천견이 편람의 손목을 낚아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손길을 따라 힘없이 허공에 떠오른 소녀가 멍하니 천견을 바라보았다.
“현세에서 육체를 가진 당신이라면 모를까, 의식만 여기 내려왔다면 나와 똑같은 조건 아니야?”
씩 웃은 천견이 자신과 소녀의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솔직히 말해서, 치매에 걸린 뱀 따위는 별로 안 무서워. 오히려 기억을 잃은 지금과, 예전을 비교하면 지금 당신이 더 약할 것 같은데.”
“…….”
천견은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괜히 편람의 의식세계 안에서 뻗대고 있던 것이 아니다.
편람의 분체가 타락해 우물이 되면, 편람이 직접 개입할 것을 알면서도 남아 있던 이유.
그건 진짜 승천자인 편람의 개입이 있다 해도, 그 결정을 어느 정도 유예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창을 방해받은 편람은, 그런 천견의 개입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인간체에게 존재하는 기억상실이나 인지장애는 나와는 무관한 질병이다. 내가 망각에 빠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지.”
“…….”
“네 말은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의식체는 처리해야 한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천견을 바라보다, 다른 말을 꺼내 들었을 뿐.
“과거의 기억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가능성으로 분화된 존재. 언젠가는 나도 영향을 받겠지. 우물 위에 또 다른 문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같은 공간좌표에 외해의 통로가 겹쳐 열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네.”
천견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게 제안하고 싶은 건 다른 일이야. 네가 방금 회수한 의식체. 소멸시키는 대신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건 어때?”
“양도 말이냐?”
“그래. 바로 저 마법사에게 말이지.”
천견이 그렇게 말하며 레녹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편람의 시선 역시 레녹을 향해 돌아섰다.
조용히 두 승천자를 지켜보던 레녹이 갑작스러운 제안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도가 아니라, 폭탄처리를 하고 싶은 것 아닌가?”
* * *
“잘 생각해 봐. 의식체를 이대로 소멸시키면 당신의 정신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
천견이 설명했다.
“가뜩이나 당신은 기억을 망각해가며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만큼,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태어난 의식체가 소멸하면 분명 악영향이 끼치겠지.”
“일리 있는 말이로군.”
천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모습에, 레녹이 황당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아니, 지금 당신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잖나.”
“마법사, 지금 그게 중요해?”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
천견이 핀잔을 주고, 편람이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은 육신을 벗어나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지만, 시간감각을 잃어버린 지도 꽤 오래되었지.”
“…….”
“잠에서 깨어난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구나. 우물을 지키려다 문제가 생긴 뒤로, 도움을 받아 일을 수습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소녀가 느닷없이 미간을 찌푸리고 레녹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때 분명…….”
“…….”
“…….”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한 레녹과, 표정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진 편람의 모습.
옆에서 지켜보던 천견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어라?”
그 순간, 편람이 고민에서 깨어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뭘 생각해내려 했었지?”
“……”
혹시 빅터를 기억해내기라도 하나 싶어 지켜보았는데, 애초에 거기까지 기억이 미치지도 못했던 모양.
편람의 상태는 여전히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였다.
천견은 묘한 기색으로 소녀를 바라보다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의식체를 소멸시키는 대신 마법사에게 넘기자는 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법사의 수호령수에게 양도하자는 거지.”
“수호령수?”
“잠깐.”
그제서야 레녹 역시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천견을 돌아보았다.
“마드레아 팔시어. 이게 무슨 짓이지?”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다. 오히려 따지자면 이득에 가까운 일이지.”
천견이 답했다.
“파드메는 영수로 태어나 포식자의 정점에 오른 영성 그 자체. 그 의식체를 수호령수가 흡수한다면 지금 네가 고민하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
“의식체가 외해에 오염되긴 했지만, 정작 너도 외해의 마력에 내성을 가지고 있잖아? 수호령수에게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없어.”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니다.”
레녹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수호령수의 의식을 통해 여기 들어왔다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당연한 것 아닌가?”
천견이 어깨를 으쓱였다.
“승천자의 의식공간에 필멸자가 진입할만한 방법이 많지는 않다. 같은 계통의 권역이나 그에 준하는 인연. 혹은 저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
“그중에서도 탈태의 저주에 대해서는 승천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살짝 고개를 틀어 표정을 감춘 천견이 말했다.
“그건 약육강식의 논리를 숭상하는 짐승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마냥 피해갈 수 없는 저주니까.”
“…….”
“요점은 하나다. 파드메는 망가진 의식체를 굳이 피해 없이 처리하고, 너는 그 대가로 수호령수를 각성시킬 계기를 얻어가는 거지.”
레녹이 짜증스레 표정을 찌푸린 채로 중얼거렸다.
“승천자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
“파드메. 어떻지? 당신이 회수한 의식체. 이 마법사에게 양도할 의향이 있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구나.”
소녀는 천견의 질문에 고민하는 듯하다, 레녹의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수호령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세에 권역을 형성해 세력을 둘 만큼 큰 입지를 가진 마법사라는 뜻이겠지.”
“…….”
“이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지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어째서 승천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냐?”
순간, 흐릿했던 편람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는 듯했다.
“승천을 포기하고 은둔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남은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
“그만한 위계에 올랐다면 대부분의 필멸자들보다는 훨씬 오랜 시간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 이상을 원하는 거지?”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거라. 사명을 받지 않은 몸으로 거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자면 축복이나 마찬가지이니.”
침묵이 흘렀다.
천견 역시 소녀에게서 이리도 깊은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다소 의외라는 듯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군.”
레녹은 그런 편람의 질문에, 말없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 웃어버렸다.
“원래 그 질문은, 내가 당신의 의식체에게 물어보려던 것이었는데.”
“…….”
“어째서 승천에 도전하려 하는가…… 대답은 정해져 있지.”
초월적인 재능과 그 대가로 손에 넣은 갖가지 페널티.
레녹 자신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시간과 한계.
결코 멀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는 세계의 멸망.
레녹은 그런 자신 하나만을 위한 구구절절한 사정 따위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세계를 구하겠느니, 멸망을 막겠다느니 숭고한 명분을 내걸 생각도 없었다.
승천자가 되겠다고 결정을 마친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레녹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대답이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뭐?”
“승천에 도전해 답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할 말을 잃어버린 듯한 두 승천자를 앞에 두고, 레녹이 조용히 말했다.
“근원심상을 각성하고 자성영역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염원이 다른 이들보다 부족하다 의심해 본 적이 없다.”
“…….”
“대답을 위한 대답이 내 안에 있어. 그건 내가 나를 믿고 확신하는 그 이상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의 힘이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가능성의 분기점.
7레벨에 올라 처음으로 자신의 답을 마주하고, 그 의미를 깨달은 순간부터.
레녹은 언제고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모른 척해왔을지도 모르지.
자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흔들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레녹은 단 한 번도 스스로의 가능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대가를 바쳐 손에 넣은 재능이기에, 수치상으로 검증된 자질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을 의심하는지도 모르고 부딪히며 살아남던 그때부터, 자각하지 못한 채 증명해 온 가능성이 이 안에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하라고 했나? 이게 바로 내가 남은 시간을 무엇보다 가치 있게 불태우는 방법이다.”
탁!!
한발 앞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강렬한 시선으로 편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위계를 위한 수련도, 마법을 위한 탐구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고민하며, 잠시 멈춰서 돌아보는 시간조차도…… 모두 나 자신에게 확신하기 위한 과정일 뿐.”
“…….”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도전하지.”
시선을 치켜든 레녹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아직 여기에 있어.”
모든 것이 변해도, 아직 레녹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불가능해 보이는 위업에 도전하고, 허락된 것 이상의 위계와 역량을 꿈꾸며 들이받고.
죽일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살아남을 수 없는 전장에 발을 들이미는 그 모든 순간들에 확신을 더한다.
“실로 오만한 자로구나…….”
편람이 기가 막힌 어투로 중얼거렸다.
“유구한 역사 속에 자신의 재능에 취한 인간이야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건 그야말로 궤가 다른 놈이로군.”
“그러게, 정말 대단한 자신감인걸.”
천견 역시 꽤 놀란 듯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 대한 믿음에 아예 한 줌의 의심도 없군. 의식공간에서 이렇게까지 흔들림 없는 의념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
“말년의 내가 정말 많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군. 내가 현실에서 너 같은 마법사를 만났다면, 분명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견의 시선이 순간 냉정하게 변했다.
“마법사, 그건 확신이 아니라 광기라고 하는 거야. 넌 아직 승천에 제대로 도전하지도 않았는데, 어딘가 맛이 가 있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다면 좋겠군.”
“그걸 말이라고…….”
레녹의 뻔뻔한 대꾸에 천견이 황당하다는 듯 말하다,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 공능으로도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의 근원심상이라면, 마냥 틀린 말은 아니겠지.”
“수호령수에 대한 제안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현시점에서 나쁘지 않은 중재안이라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천견을 무시한 레녹이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의식체의 정수를 골라 넘겨준다면, 제안을 검토해 볼 의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지?”
“…….”
편람은 그런 레녹의 질문에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양손을 포개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을 뿐.
소녀가 두 손을 포갠 채 손목을 돌린 순간, 다시 한번 복잡한 주술문자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키리릭!!
녹색의 그물 아래 압축되어 붙들려 있던 의식체의 파편이 천천히 의식세계의 하늘 위로 비상했다.
의식공간의 굴레를 넘어 실재하는 현실 저편으로 사라지는 의식체의 정수.
[마스터. 문제가 생겼어요.]그와 동시에, 레녹의 뇌리에서 다비의 다급한 전성이 울려 퍼졌다.
[알덩이가 부서지면서 안에서 뭔가 나오려고 하는데요……?]“……뭐?”
[그, 일단 나오지 말라고 다시 밀어넣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