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26
약먹는 천재마법사 926화
회담(9)
갑작스러운 결백의 참전 선언에, 다른 참가자들이 놀란 기색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로드 아즐란……!!”
“투련문의 호법이 견뢰와 알고 지낸 사이였나?”
“마력입자 피폭사태 당시 함께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네. 다만 저 정도로 긴밀한 사이일 줄은…….”
“법진의 소유권을 두고 탑주께 도전할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오시오.”
주변에서 빠르게 오가는 말들을 무시한 결백이 말했다.
“본인은 이 자리에서 힘닿는 한 최선을 다해 탑주를 보필할 생각이니.”
그 말과 함께 손을 들자, 결백의 뒤에 떠오른 창이 머리 위로 천천히 솟구쳤다.
우웅!!
순전히 의념만으로 허공의 기물을 잡아 움직이는 무예의 경지.
다른 참석자들이 그를 인지한 직후, 의식장을 휘감았던 투지가 점차 사그라든다.
크로드 아즐란은 양지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닌 투련문의 호법.
하물며 그 본인도 정신에 이상이 있을 뿐, 실력 자체는 틀림없이 위계를 초월한 극위급의 창사다.
이 정도 클래스의 전위가 대놓고 견뢰의 편을 들어주는 시점에서, 직접적인 충돌은 사실상 손해나 다름없는 일.
[근묵자흑이라 했던가. 가만보면 옛 성인들의 말씀이 전혀 틀린 구석이 없어.]급변하는 사태를 관망하던 올리닉이 껄껄 웃었다.
[일곱 가지 위계를 넘어 초월의 초입에 섰는데도, 사람이란 참 쉽게 달라지지 않는단 말이지.]금속구체의 방향이 두 명의 창사 사이에 둘러싸인 레녹을 향하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견뢰. 자네처럼 미친 광인을 보란 듯이 둘이나 거느리고 다닐 수 있겠나.]“…….”
레녹은 올리닉의 놀리는 듯한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레녹의 옆에 서 있는 페이샤 그리스번과 크로드 아즐란.
두 사람 모두 아이러니하게도 각자 양지와 음지에서 광증 하나로 이름을 날린 살인귀들이었으니.
8레벨의 초인은 위계를 부수고 인간성을 마모시킨 존재이나, 개중에서도 특히 광증이 도드라지는 이들이 존재한다.
아예 자신의 광증 자체를 8위계에 도달하기 위한 계기로써 삼은 미치광이들.
“창이란 본디 인간의 마음을 담기엔 길고 좁아서, 다른 장병기에 비해 광기가 깃들기 쉽다는 말이 있지.”
방금 전까지 의식에 대해 설명하던 적안의 남자 역시 퍽 흥미로운 듯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하지만 두 창귀(槍鬼)를 데리고 다니면서 부리는 게 우연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미친 걸로 유명한 초인들끼린 통하는 게 있는 건가.”
레이지의 신기한 듯한 첨언에, 페이샤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레녹을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내가 저딴 병신같은 개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레녹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봐도 네 악명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일 텐데.”
“지랄하지 마. 왜 갑자기 나한테 책임 전가를 하는 거냐!”
“그럼 여기서 다시 붙어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정해볼까?”
“이, X발……!!!”
차마 다시 붙어보자는 말은 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들거리는 페이샤의 모습.
저번 전투 당시 위계를 희생하고도 이기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응어리로 남았던 모양이다.
다른 초인들 역시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것을 느꼈는지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스번이 저런 말을 듣고도 참을 수 있는 인간인 줄은 처음 알았군.”
“귀희를 상대로 압도했다던 소문은 거짓말이 아니었나본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설명이 빠진 것 같은데.”
그 순간, 이제껏 아무런 말도 없이 군것질에 열중하던 거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손에 묻은 양념 가루를 핥아먹으면서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선천이능과는 별개로, 아나테마의 현신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 뭐지?”
“…….”
“난 중앙도시의 귀족이 어떤 축복을 타고 났는지는 관심이 없다. 이번 회담을 통해 이능을 나눠주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난 이만 가보지.”
두껍다 못해 두툼하게까지 느껴지는 상체를 꿈틀거리는 남자의 모습. 당장이라도 의식장을 떠날 것처럼 이 자리에 미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레녹은 어째서 거한이 아나테마의 선천이능에 관심이 없는 건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초능력자군.’
애초에 거한 본인이 다른 종류의 선천이능을 극한까지 개발한 극위능력자였기 때문.
거한의 말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그 몸짓에서는 어딘가 맹목적인 허기가 느껴진다. 아마 먹는 것과 관련된 선천이능을 각성한 8레벨의 초능력자가 아닐까.
“당연히 아나테마의 현신은 회담의 목적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적안의 남자 역시 그런 거한의 말이 합당하다 느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회담이 열리게 된 계기부터 언급해야겠군. 요르타와 마키나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들어보았겠지?.”
“…….”
그 순간, 거대한 의식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남자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기 때문.
“요르타의 위령탑을 무너뜨린 크로켄 아실러스. 마키나의 최고위원회를 학살한 교단 2사도. 군령도시와 기계도시의 근간이 무너졌고, 그 중심에는 복마전과 교단이 있었지.”
의식장을 돌아보는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이와 같은 징조는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 도시 역시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언제고 한 번쯤은 일어날 일이겠지.”
“잠깐만, 슬레인. 그 설명에는 어폐가 있는데.”
그 순간, 자신을 레이지라 소개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지금 여기에는 2사도보다 먼저 기계도시를 박살 내고 멀쩡히 살아나온 마법사가 있다고.”
“…….”
그러지 않아도, 그 말이 나오자마자 참석자들 중 몇몇이 레녹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레녹이 마키나를 홀로 뒤집어놓았던 소란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없기에, 외려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슬레인이라 불린 적안의 남자는 레이지의 반박에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견뢰의 경우에는 비교적 행적과 동기가 명확해서, 그가 승천문의 유산을 노렸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고위원회와 협상 끝에 풀려나 발칸에 돌아온 시점에서 그가 모종의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지.”
“…….”
비교적 정확하게 레녹이 마키나에서 한 일을 읽고 있는 슬레인의 설명.
다른 참석자들 역시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레녹이 마키나에서 무엇을 노렸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레녹이 구세계의 승천자를 상대한 것은 몰라도, 그 목적이 승천문에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다른 8레벨 역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사도의 경우는 완전히 달라. 그는 수심 수천 미터 아래서부터 마키나의 심처를 타격해 도시를 뒤흔들고, 최고위원회 절반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했다. 그 동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지.”
슬레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요점은 하나다. 대륙을 휩쓰는 일련의 파괴공작에서 거대도시를 비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나테마의 현신과 후천팔괘법진은 모두 그를 위한 사전작업이지.”
“그래서, 발칸을 지키기 위해 8레벨의 초인끼리 사이좋게 힘을 합치기라도 하자는 거냐?”
페이샤가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하지 마. 이 도시의 초인들이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에 감화되어 협력이라도 할 것 같아?”
“…….”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발칸이 이런 꼬라지가 되는 일조차 없었을 거다. 내전이 끝난 뒤에 우리 군단이 중앙으로 떠나는 일조차 없었겠지.”
침묵하는 좌중을 향해 페이샤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문제를 덮어두고 만족하던 배신자들이 이제 와서 화합을 꿈꾸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웃음도 안 나오네. 방위군의 반역 한 번으로 휴지조각이 된 금제율령을 족쇄인 척 달고 있던 네놈들이 생각하는 계획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말이야.”
[아까부터 말이 너무 아프군. 뼈만 찌르는 건 반칙 아닌가?]“언젠가,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올리닉의 너스레를 깔끔하게 무시한 페이샤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발칸으로 돌아와 바쥬르 님의 복수를 할 테다. 우리를 배신한 변절자들의 사지를 짖어서 효수하고, 가죽을 벗겨서 시청 광장 위에 매달아주마.”
“…….”
“네놈들이 애지중지 여긴 제자의 목으로 탑을 쌓고, 그 위에 스승의 시체를 널어서 주인을 찾을 수 없게-!!!!!”
섬뜩하기 그지없는 페이샤의 말이 의식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찰나, 레녹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손짓했다.
등 뒤에서 발광하던 법진이 회전하며 페이샤의 몸을 찍어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쿠웅!!
“끅……!!”
“귀희의 넋두리는 접어두고서라도, 계획의 비현실성에 대해서는 동의할수 밖에 없군.”
다른 이들의 놀란 시선을 뒤로하고 레녹이 말했다.
“8레벨의 초인들을 모아두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발칸을 비호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자고?”
“견뢰.”
“복마전은 몰라도, 사도의 습격을 경계한다는 전제부터 틀렸어. 한 자릿수에 해당하는 최고위 사도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설령 교단 측에서 발칸을 가시권에 둔다 해도 이쪽에서 조직적으로 대응할 이유는 없지.”
교단과 여러 차례 충돌한 경험을 통해, 레녹은 고위 사도들이 서로를 반쯤 적대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같은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분류되지만, 그 근본부터 각자 다른 외신의 화신으로서 세계에 태어난 괴물들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도록 태어난 종말의 화신체가, 교리라는 목줄에 매여 공존하고 있는 것이 교단의 실체.
교주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묶여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끌끌…… 사도를 상대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은 유창하구려. 그쪽의 말이 타당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소?”
그 순간, 석상 위에 앉아 있던 아기 흑마법사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교단을 상대로 경험보다 우선시되는 논리란 있을 수 없는 법. 교리라는 광신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지.”
그가 레녹을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그렇기에 이번 회담에는 천번이 참석하길 바랬건만, 아쉬운 일이오. 그가 사도를 상대한 경험은 이곳에서 무엇보다 귀중한 가치였을 텐데.”
“천번이 여기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린 모양이군.”
레녹이 피식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
“틸리언. 쓸데없이 견뢰에게 시비를 걸지 마.”
키리야가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우리의 요청으로 인해 회담에 참석했어. 아까부터 이게 무슨 무례지?”
“키리야, 그럼 자네는 10사도 암리타가 어떤 식으로 영멸을 맞이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다는 말인가?”
틸리언이라 불린 흑마법사가 맞받아쳤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천번이 사도조차 영멸시킬 불꽃을 품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녹스 비블리오의 일원으로 그 사실을 규명할 의무가 있지.”
“…….”
“그 부분에 사도살해자의 식견을 듣고 싶었는데, 웬 미친 마법사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흑마법사가 도발하듯 레녹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레녹은 키리야의 말을 듣고 외려 대응을 멈추었다.
멸목의 파편을 강신시키려던 흑마법사 크레이그 틸리언.
그자의 성 역시 저 아기 흑마법사와 똑같은 틸리언이 아니었던가.
추후 그 부분에 대해 조사해 볼 여지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녹이 틸리언을 무시하고 화제를 돌렸다.
“됐으니까 아나테마의 현신이 필요한 이유부터 듣지. 그쪽이 말하는 발칸의 비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텐데?”
“그 말이 맞다. 난 처음부터 8레벨 간의 협력을 제안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견뢰의 말대로 그건 지나치게 서로를…… 신뢰하는 행위지. ”
슬레인의 붉은 눈동자가 자조하듯 휘어졌다.
“진짜 목적은 후천팔괘법진을 통해 아나테마의 현신을 마치고, 그 대가로 팔괘법진을 다른 식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팔괘법진을 다른 식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라니.”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 법진에 아나테마의 현신 이외의 다른 용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후천팔괘(後天八卦)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변화를 상징하며, 만물이 자리 잡은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는 힘이다.”
천천히 제단의 옆을 걸어 지나친 슬레인이 말했다.
“천지만물의 변화를 모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무한한 응용법이 존재하지만, 이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르스노바의 귀족뿐이지.”
“천지만물의 변화를 모방한다라…….”
슬레인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 모방이라는 건-”
발칸을 비호하기 위해 후천팔괘법진을 원하면서, 정작 다른 극위능력자들의 협력을 이번 한 번으로 끝내려는 모순.
그것은 팔괘법진을 통해 얻어내려는 결과물이, 슬레인이 언급하는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천지만물의 변화 통해, 발칸 정도 되는 거대도시를 비호할 수 있는 개념의 모방. 오직 중앙도시의 귀족만이 다룰 수 있는 힘.
올리비에라와의 대화를 떠올린 레녹이,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직감하고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벌써 깨달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군.”
제단 앞에 선 슬레인이 레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후천팔괘법진을 사용해 아르스노바를 둘러싼 [장막]을 모방해, 거대도시 전역을 둘러쌀 생각이다.”
* * *
“아르스노바의 장막을 모방해서 발칸을 보호하겠다고?”
슬레인의 말에 그제서야 이 회담의 목적을 이해한 다른 참석자들이 표정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 장막이 애초에 모방이 가능한 종류의 개념이라 생각하나?”
각자의 분야에서 위계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성까지 갖춘 이들이다.
방금 그가 설명했던 목표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발상인지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던 것.
“중앙전선의 거두들조차 쉽사리 손대지 못하는 장벽이야. 해석조차 불가능한 그 개념을 모방하겠다고?”
“주문연맹이나 이능개화전단조차 당장 관문을 통과하는 일에 집중할 뿐, 장막을 뚫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건만.”
“중앙에는 아르스노바의 귀족들이 몇몇 남아 있어. 주문연맹주가 그 사실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하지만 슬레인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반박에도 차분하게 답했다.
“구조를 완전히 규명하고 장막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레녹의 등 뒤에서 회전하는 법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후천팔괘법진을 통해 모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막의 무한한 ‘변화’ 그 자체. 따지자면 발칸에 두르는 것은 중앙에 존재하는 장막의 열화품인 셈이지.”
“…….”
“에타노크에 설치된 팔괘법진은 계획의 현실성을 검증하기 위한 시운전이다. 이번 회담에서 아나테마의 현신을 끝내고 나면, 발칸에 설치할 두 번째 팔괘법진은 아나테마 본인이 직접 처리하도록 예정되어있지.”
붉은 눈동자가 의식장의 어둠 속에서 강렬하게 빛났다.
“견뢰의 지적대로 그 이상의 협력은 비효율적인 데다, 서로 신뢰할 수 없는 무가치한 약속에 불과할 테니.”
“…….”
슬레인의 설명이 끝나자, 의식장이 숨이 멎을 듯한 적막에 잠겼다.
회담의 목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이들도, 뒤늦게 설명을 들은 이들도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묻고 싶은 것이 있군.]그 순간, 이제껏 아무런 말없이 설명을 듣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를 뒤집어써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 데다, 목소리조차 흐릿한 기계음이다.
“뭐지?”
[장막의 재현만이 목적이라면 의식에 협력할 이들만을 모아도 될 텐데, 굳이 8레벨을 모조리 소집해 회담을 연 이유가 뭐지?]바이저를 쓴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의식에 필요한 지원자를 모으는 일에 자신이 없었나?]여태껏 아무런 말도 없던 것 치고는 꽤 질문이 날카롭다.
“마커스 트랭귈러. 미러 다이버의 수장이군. 발칸에서 최초로 사건의 지평선을 넘었다던 초인이오.”
레녹이 남자를 주시하자, 옆에 서 있던 크로드 아즐란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육체를 초월했다는 소문도 있고, 딥웹 저편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이 무성했는데. 모두 헛소문이었던 모양이구려.”
“…….”
“왜 그렇게 보시오?”
“못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군.”
레녹이 지나가듯 던진 말에 크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해 주시오. 감옥에 갇혀 있는 사이 귀동냥했던 이야기라고는 다 이런 것들뿐이라.”
“시의회와 사법거래라도 한 건가?”
결백, 크로드 아즐란은 25구역의 마력입자 피폭사태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군사재판에 넘겨져 반역 혐의를 받고 수감되었다.
기억을 잃고 미쳐가는 자신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작전을 사사로이 이용한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레녹을 비롯한 일행을 죽일 뻔했기 때문.
그런 결백이 이제 와서 풀려나 회담에 참석했다면, 그것 자체가 시의회와 합의를 거친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결백은 레녹의 질문에 떨떠름한 웃음을 지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으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좀 많이 복잡한 이야기인지라.”
“…….”
“추후 기회가 된다면 설명을 해드리겠소.”
미심쩍기 그지없는 말에 레녹이 눈을 가늘게 뜬 사이, 슬레인이 입을 열었다.
“장막의 열화품이 발칸에 펼쳐진다면 모두가 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겠지.”
[…….]“회담을 연 것은 이 안건 자체가 양지와 음지를 아울러 통보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슬레인이 제단 아래 펼쳐진 의식장을 붉은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의식에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 공성결계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에타노크를 떠나도 좋아. 장막에 대한 정보를 유출하거나, 반대하는 것 역시 상관없다.”
아나테마의 현신과 장막의 재현. 그 두 가지 일을 반대하든, 외부에 유출하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겠다는 슬레인의 대답.
회담이 여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을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자신감일까.
다른 이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슬레인이 손을 들어 올린 직후.
쿠구구궁!!
광대한 지하 의식장의 천장이 활짝 열리며, 자정을 훌쩍 넘긴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식에 참가할 이들은 15분 이내로 각자 맡을 방위를 정한 뒤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이미 법진을 손에 넣은 레녹과, 올리닉을 비롯한 양지의 거인들 사이로 내려선 슬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곧바로 아나테마의 현신 의식을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