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120
00102 위험한 초대 =========================================================================
방 안의 누구도 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환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 바깥을 향해 눈을 돌렸다가 남조에게 물었다.
“눈이 거의 그친 것 같은데 통신은 재개되었습니까?”
“제가 지금 바로 확인을…….”
“아닙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요.”
방 안의 불편한 분위기 탓인지 후다닥 자리를 뜨려던 남조를 불러 세운 환이 방을 나갔다. 해경은 균철을 따라 들어온 사카모토를 보았다. 사카모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경친목회 간사 이덕완, 인천항만주식회사 사장 권중만, 죽은 변호사 허진남과 두 명의 형사, 그리고 자신과 소화가 한 방에 있기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해경은 능숙한 일본어로 사카모토에게 물었다.
“사카모토 다케야 씨가 맞습니까?”
“그렇소만.”
사카모토가 다소 경계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일본인 특유의 하관이 약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이라 얼핏 군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외모였으나, 안경 너머의 눈은 몹시 날카로웠다. 해경은 체격이 작은 탓에 언뜻 더 젊게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상당히 연배가 있음을 곧 알아차렸다. 사카모토가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해경을 마주보았다. 해경은 그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말을 건넸다.
“와타나베 이사오 씨와는 절친한 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만.”
“아니오.”
사카모토가 즉각 부정했다. 해경은 미간을 좁혔다. 분명 환에게 두 사람이 매우 절친한 사이라고 들은 탓이었다. 해경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두 분 모두 재조선보병대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팔 연대, 와타나베는 십육 연대라 소속이 다르오. 와타나베는 장교 임관도 얼마 전에 되었고, 그러자마자 조선에 온 거라 나와는 안면이 거의 없소. 내가 친분이 있는 이는 와타나베 이사오가 아니라 그의 부친 되는 히로시[博]요. 히로시가 처음 내지에 정착할 때 우리 가문에서 도움을 좀 주었으니까.”
뜻밖의 정보였다. 사카모토의 말대로라면 환이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듣고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최관, 그러니까 와타나베 히로시가 영선군을 모실 당시였다면 환 역시 아직 어린 나이였을 것이 분명했기에 환도 그의 아들을 상세히 기억하지는 못할 터였다.
“동향(同鄕)이신 모양이군요. 그 때 와타나베 이사오를 본 적이 없단 말입니까?”
“히로시는 이사오가 조선인인 것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소. 때문에 정착한 즉시 동경(東京)의 지인에게 이사오를 보냈지. 그곳에서 학교를 보냈던 걸로 알고 있소. 나도 입대한 이후로는 고향에 자주 들르지 못해 이사오를 만나볼 일이 거의 없었고. 후에 히로시를 통해 아들이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직접 만난 적은 없소.”
“여기서도 보신 적이 없단 말입니까?”
“올 때도 따로 왔고 음악회장에서도 본 일이 없소.”
사카모토의 말투는 단호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나갔던 환이 돌아왔다. 환은 방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눈이 그쳐 지금은 통신이 재개되었고, 내일 오후면 교통도 원활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그러면 서둘러 교통편부터 수배해야겠군요. 어떤 일이 더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우선 손님들을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환의 말을 들은 중만이 끼어들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환이 해경의 곁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양기홀병원에 있는 엔도 선생과 통화를 했소. 정 선생이 맞은 탄알은 군용 탄알이 맞다고 합니다.”
“확실합니까?”
“엔도 선생은 군의관 출신이오.”
엔도가 일본군 군의관 출신이라면 확실히 군용 탄알을 혼동할 리는 없었다. 해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팔 밀리미터 남부탄은 일본군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규격이었다. 자신과 허진남 양쪽에게서 나온 총알이 동일한 것이라면 같은 사람이 쏘았다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만약 중만의 주장대로 조선공산당의 소행이라면 굳이 구하기도 어렵고 특정되기도 쉬운 일본 총기를 구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일본군 전용 규격의 총알과 총기를 가장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는 이곳에서 두 사람,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사라졌다. 누가 보아도 사라진 와타나베를 범인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와타나베가 범인이라면 이 테러는 환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결국 다시 모든 가정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방 안의 사람들은 거의 들리지 않게 말을 주고받는 해경과 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해경은 바싹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축이는 덕완에게 물었다.
“초청장을 발송하신 것은 이덕완 씨가 직접 하신 것이겠지요?”
갑자기 이름을 불려 놀랐는지 흠칫한 덕완의 눈꼬리가 순간 가늘게 경련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해경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조선보병대에 장교 분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 굳이 이 두 분만을 여기에 초청한 까닭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여, 여기 계신 사카모토 씨는 조선화학공장의 고문을 담당하고 계시지요. 그래서 우리 친목회에 꼭 계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해 조선화학공장 박문종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초청한 것입니다. 와타나베 씨는 조도전 출신이기도 하고, 이번에 조선으로 발령을 받았다기에 조도전 동문들의 이야기를 듣고 초청장을 보낸 것이고요.”
덕완이 말을 약간 더듬으며 대답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군수 화학 공업이 상당한 열풍이어서 조선에서도 군수 공업을 일으켜 보려 하는 중이었고, 조선화학공장은 그 시도 중 하나였다. 사카모토가 그곳과 관련이 있다면 여기에 초청받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와타나베였다. 해경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본래 와타나베 씨와 잘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동문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저도 얼굴을 모르고요.”
덕완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해경이 중만 쪽으로 시선을 주자 중만이 무슨 말을 할지 바로 알아차린 듯 해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저도 와타나베 이사오 씨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대한제국 황실 친위대 정령의 아들이자 재조선보병대의 장교. 마치 유령 같은 형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청받은 자, 그러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 해경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두 형사 쪽을 바라보았다.
“통신이 가능하다니 형사님들께서는 일단 조선공산당의 소행이 확실한지 먼저 확인해 보십시오. 이미 정보를 알고 계셨다니 오계영의 행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으시겠지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와타나베 이사오를 수배해 주시거나 최소한 그를 본 자라도 찾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경실업친목회의 누구를 목표로 삼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해경은 잠시 말을 멈추고 덕완을 흘끔 보았다. 덕완은 다소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사라진 와타나베의 짓이라면, 그가 환을 노렸다면 동기는 분명 자신의 아버지 때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이 있는 자는 단 한 사람 덕완 뿐이었다. 그가 애초부터 와타나베와 공모하고 그와 환을 동시에 이곳에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덕완은 해경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움찔하며 눈을 피했다. 해경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누가 목표가 되었든지 간에 두 번째는 범인이 더 위험한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두 번째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요. 교통이 곧 재개된다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일단 눈은 그친 것 같으니 서둘러 움직이지요. 이 방은 폐쇄하고, 시체를 처리할 수 있는 인원이 올 때까지 모든 난방을 끄고 창을 열어 최대한 낮은 온도로 유지해 주십시오. 소화 양, 우리는 일단 방으로 갑시다. 이환 형도요.”
우선 보는 눈이 없는 쪽으로 옮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해경은 아직도 방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는 소화를 데리고 나가며 환에게 눈짓을 했다. 세 사람은 해경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해경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권 사장이 무척 의심스럽지만 물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군요. 일단 사카모토는 와타나베 이사오와 잘 모르는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카모토가?”
환이 놀란 눈을 하며 되물었다.
“자기가 친한 건 와타나베 이사오의 아버지인 히로시, 그러니까 최관 씨라고 하더군요. 일본에서 정착한 곳이 사카모토의 고향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카모토의 말로 최관 씨는 정착하자마자 곧 아들을 동경으로 보내 거기서 자라게 했다는군요. 조선인인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답니다. 혹시 와타나베라는 성만 듣고 최혁강으로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까?”
해경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환이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요.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꽤 오래 전이기는 합니다. 사카모토가 재조선보병대에 온 뒤로 조선 군수 산업에 줄을 대는 바람에 와타나베 이야기를 들은 거니까요. 연배가 최 정령보다는 아래라 무심코 그리 생각했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결국 다시 이덕완 씨에게로 이야기가 돌아가는군요. 사카모토가 군수 산업에 줄을 대고 있고 와타나베와 친하다고 가정했을 때라면 와타나베가 이 모임에 초청받은 것이 이해가 갑니다만, 사카모토가 그와의 친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재조선보병단의 장교가 한두 사람이 아닌데 굳이 와타나베를 이 자리에 불러와야 했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노리고?”
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해경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환은 방 안을 천천히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해경은 환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소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화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멍하니 앉은 채 바닥 어딘가에 눈을 두고 있었다.
“소화 양.”
해경이 부르는 소리에 소화가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해경은 동그랗게 뜨인 소화의 눈에 웃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저어, 베개가 어디로 갔을까 하고요.”
소화가 주저하다 대답했다. 진남의 방 침대에 베개가 없었던 일에 대해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없어진 베개를 떠올리던 해경의 머릿속에 망가진 안경이 함께 지나갔다. 그러자 질문들이 순식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누가 와타나베를 이곳에 불렀는가? 와타나베는 왜 허진남을 만났는가? 그가 허진남에게 총을 쏜 이유는 무엇인가? 인삼과 캄펠을 먹인 것도 와타나베일까? 그는 왜 사라졌을까? 어디로 사라졌을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소화가 문에 귀를 대고는 숨을 죽였다. 한참 바깥에 귀를 기울이던 소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문이 두꺼워서 그런가요? 총을 쏘았으니 분명 누군가 총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데요.”
“이쪽의 건물들은 대체로 문이나 벽이 아래 지방에 비해 두꺼운 편이기는 하지요. 난방을 위해서지만 어느 정도 소리를 막아 주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총소리라면 바로 옆방에서는 들었을 수도 있겠군요. 백이 호와 백사 호에 누가 묵고 있는지 기억납니까?”
소화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다 잠깐 사이를 두고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이 호에는 엔도 고로 선생님, 백사 호에는……권중만 사장님이 묵고 계세요.”
해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엔도는 평양기홀병원에 있었으므로 그 방은 비어 있는 것이 당연했고, 중만은 자신들과 함께 있었다. 하필이면 양쪽 방이 모두 비어 있었다니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중만이 덕완과 진남을 데려오겠다며 나간 지 십여 분쯤 뒤에 종업원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 십 분 사이에 사람을 죽인 뒤 총으로 쏘고, 총으로 쏜 자는 도망치고 공모한 자는 경찰을 불러 호텔 안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가정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쉬워 보이지도 않았다. 해경은 방 안을 서성거리는 환에게 물었다.
“아까 인삼과 캄펠의 상호 작용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대략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 아무리 빨라도 십 분 이상일 거요.”
대답한 환이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허진남이 캄펠을 복용하면서 우연히 인삼차인지 인삼주인지, 아무튼 그런 것을 마신 것이 아니라면 허진남을 아주 잘 아는 자가 일부러 먹인 거겠지요. 인삼과 캄펠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는 있지만, 이 부작용이 모든 사람에게 다 나타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인삼주였다면 술 때문에 혈관이 확장되면서 심장 발작을 유도해 확률을 약간 올릴 수는 있을 거요. 하지만 확실히 허진남을 죽일 목적이었다면 그 방법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겠지요. 평소 허진남의 지병을 알고 있고, 그에게 인삼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곳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마…….”
“권중만 사장이지요.”
환은 소파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으며 한쪽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해경은 자리에 앉은 채 혼잣말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뱉었다.
“허진남 씨는 조선공산당의 이중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고, 오계영이 권중만 사장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만약 범인이 오계영이라면 그가 허진남 씨까지 죽인 데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일본군의 총기를 써야 할 이유도, 굳이 죽은 뒤에 총을 쏘아 위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 와타나베는 어떨까요? 그는 이환 씨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동기가 있습니다. 최관은 일본으로 이주해 일부러 아들을 멀리 보내면서까지 철저히 일본인으로 키우려 했다고 했지요. 조선인이 일본 군대의 장교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조선 황실을 원망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용한 총알도 두 번 다 일치합니다. 그를 여기 불러들인 이덕완 씨에게도 같은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허진남 씨를 죽여야 할 동기는 없습니다.”
“그럼 안경을 망가뜨린 건 대체 누구일까요?”
해경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소화가 물었다. 해경은 대답 대신 잠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체격이 좋은 편인 진남과 그 정도의 격렬한 몸싸움이 가능할 만한 자라면 역시 풍채가 좋은 편인 중만이 가장 부합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 해경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가정할 때, 여기에 와타나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키가 어느 정도인지, 목소리는 어떤지조차 알 수가 없군요. 이 호텔에서 그를 보았을 만한 사람이라면 아마…….”
“접수대에서는 혹시 기억하지 않을까요?”
소화가 해경의 말을 끊으며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이 호텔 안에서 와타나베의 얼굴을 보았을 만한 사람은 접수대의 직원뿐이었다. 열쇠를 받기 위해서는 초청장을 반드시 확인해야 했으므로, 아주 잠깐이라도 분명히 어떤 직원이든 와타나베를 본 직원이 있을 터였다.
“가서 물어보는 편이 좋겠군요.”
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소화가 해경의 양 어깨를 붙들어 도로 침대 위에 앉혔다. 해경이 당황하며 소화를 올려다보자 소화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선생님은 여기 계셔요. 제가 다녀올게요.”
“소화 양, 위험합니다.”
“누군가가 이환 씨를 노릴 수도 있고, 선생님은 이미 총에 맞으셨으니 제가 제일 안전하지 않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말릴 틈도 없이 소화가 후다닥 방을 뛰어나갔다. 해경이 서둘러 뒤를 따라 일어나서는 문을 열었으나, 얼마나 빨리 달려갔는지 이미 복도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일단 다시 문을 닫은 해경은 환을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은 채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환이 거기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범인이 오계영이든 와타나베든,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좋지 않군요.”
“무엇 때문에요?”
“만약 오계영이라면 그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동료를 밀고한 자에게 복수를 하려 하는 것일 텐데 내가 그를 잡는 것이 옳은지, 놓아주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소. 또 와타나베라면 그는 우리 가문 전체에 적의를 품고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인데 내가 저지른 적도 없는 일로 목숨을 위협받는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지요. 이것이 예수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라는 것인가…… 예수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군요. 자식은 부모를 택할 수 없는데, 내가 황실에서 태어난 것이 나의 죄가 되어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것이 온당한가 싶은 한편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재미있지요.”
환이 내뱉은 말의 뒷부분은 거의 독백처럼 들렸다. 해경은 말없이 환을 보았다. 침묵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따금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 외에는 방 안이 온통 고요함으로 가득 찬 채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해경은 시계를 보았다. 소화가 나간 지 십오 분쯤 지난 뒤였다.
“무슨 소득이라도 좀…….”
있었습니까, 하고 말하려던 해경은 순간 말을 멈췄다. 소화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화와 함께 들어온 것은 중만이었다. 해경이 입을 열기도 전 중만이 다소 흥분한 표정을 하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중만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해경에게 내밀었다. 해경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고는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 대여섯 명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얼굴은 모두 낯설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해경이 묻자 중만이 손을 뻗어 가장 오른쪽에 선 남자를 가리켰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이 자가 와타나베입니다.”
“와타나베라고요?”
해경은 고개를 숙이며 사진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그 때 해경의 머리 위로 중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오계영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