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이미 녹은 빙하는 어쩔 수 없으니 남은 얼음이라도 지키자 (5)
“원래 질투에 눈이 멀면 뭘 못하겠어. 지금 이렇게 날 시련에 빠뜨리고서, 본인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
코카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네모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 순진해 보인다 했어. 아닌 척하지만 동요하는 게 다 보인다.
“내가 진짜 죽으면, 공작님이 좋아할 것 같니? 오히려 실망하고 충격받을걸? 보면 모르겠어?”
아네모네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나 예쁘잖아. 네 주인이 먼저 나한테 반한 거야. 난 죄 없어.”
“…….”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인데, 실제로 아네모네는 예뻤다. 여주인공이니까 그렇다.
세계관 최고 미인인 아네모네의 말에서는 기묘한 신빙성이 느껴졌다.
코카는 당황했다.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암살자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휘둘려서는 안 된다. 타깃을 찾았다면 죽이고, 자리를 뜬다. 당연하고도 단순한 원칙이다.
하지만 코카는 평범한 암살자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고 세상 물정에 어두우며, 시에라가 알게 모르게 달래주며 돌본 나머지 마음씨도 유해졌다.
속이기 딱 좋은 상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이번에, 남 속여먹는 데 재능이 넘치는 아네모네를 만나버렸다.
“다, 당신이 공작님의……. 공작님의 약혼녀라고요……?”
코카는 애써 정신을 차려보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공작님께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습니다. 약혼녀라니요.”
“아아, 역시 신임 받고 있는 신하한테도 말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사랑은 극비였구나……!”
아네모네는 종종 극단에서 잔심부름을 도우며 용돈을 벌기도 한다.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연기는 가끔가다 이렇게 쓸모가 있다.
아네모네가 가련한 척 이마를 짚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코카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두 분이 진짜 사랑하는 사이라면, 공작님이 그런 걸 왜 숨기시겠어요!”
코카는 나름대로 대항해 외쳤다. 아네모네에게는 반박할 말이 있었다.
“너 같으면 공작이 평민하고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봐, 평범한 평민도 아니고 도적단에 잡혀 있는 몸이잖아…….”
“잡혀 있다기보다는, 다스리고 계시지 않나요?”
“쉿. 길게 말하게 하지 마. 나도 내 처지가 처량한 건 알고 있으니까.”
“…….”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코카는 아네모네의 연극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저 말에 사실이 섞여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아네모네는 곧 죽을 목숨이다. 자신이 자리를 피하면 데지데리움이 단숨에 덮쳐 목숨을 끊어놓겠지.
그런데 사실 이게 사랑싸움이고, 데지데리움과 자신은 이용당한 게 맞다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질투 한 번에 약혼녀(?)를 잃은 시에라 글러토니는 무척이나 슬퍼할 것이다. 슬퍼하기만 할까? 막중한 실책을 범한 코카를 벌할 것이다. 지하감옥에 갇히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지. 애당초 코카는 아직도 지하감옥을 방으로 쓰고 있다.
‘공작님이 내게 실망한다면…….’
코카의 머릿속에는 일어나지도 않은 처벌의 시간이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피핀, 엔비는 물론 달리아까지 코카를 둘러싸고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 맨 앞에 선 시에라가 코카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실망이야. 너 같은 건 거두지 말아야 했어.’
코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극심한 체벌도, 손톱을 뽑는 고문도 아닌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코카는 오로반체 후작가에서 많은 고통을 배웠다. 희망 따위 없는 인생에 쉽게 단념하는 법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지만 시에라에게 거둬진 이후로 코카는 기대하는 법까지 배워버리고 말았다. 누군가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순진해서 살육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암살자는 순진해서 약점이 생긴 코카가 되어버렸다.
공작성의 모두는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듯하니, 그 안에서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나 문제는 지금이다.
코카는 혹여나 자신이 시에라를 실망시킬까 봐, 외로움조차 알지 못했던 과거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졌다. 암살자치고는 퍽 감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저는…….”
코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옆에는 아네모네가 있고, 앞에는 데지데리움이 있다.
“저는, 저는…….”
한참 고민하던 코카는 갑자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네모네가 흠칫하며 돌아보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뭐, 뭐야?”
“저는 생각하지 않을래요.”
“어?”
코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생각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공작님께 직접 여쭤보면 되겠죠. 만일 당신이 공작님의 진짜 약혼녀라고 하신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둘 수는 없죠. 하지만 만일 거짓말이라면? 저는 임무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 되잖아요?”
“그, 그렇지?”
“어떤 점이 공작님을 더 괴롭게 할지 고민해 봤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판단도 공작님이 하시면 될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
코카는 데지데리움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아네모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바보가 속았구나!’
그런데 코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네모네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죄송합니다, 데지데리움 님. 즐거움은 잠시만 미뤄주세요. 오늘은 반만 죽이는 걸로 할까요?”
“아, 야. 반만 죽인다는 건 무슨 뜻…….”
아네모네가 순간 풀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코카는 그녀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지 않도록 받쳤다.
순식간에 아네모네를 기절시킨 코카는 멋쩍은 듯 데지데리움에게 변명했다.
“오늘 죽일 수 있도록 약속했는데 못 지켜서 죄송해요. 하지만 만일 이 사람이 공작님에게 소중한 분이라면, 막상 죽인 뒤에 제가 버림받을까 걱정되어서요…….”
[나는 죽인다고 한 적은 없다. 겨뤄보겠다고 한 거지.]“아! 그런데 공작님은 죽이기를 원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분의 말을 듣고 보니, 감정적으로 죽이겠다는 건지 물리적으로 죽이겠다고 하신 건지 헷갈려서요. 정확한 임무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것도 실책이죠……. 하지만 괜히 지금 죽였다가 더 큰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인간의 일에는 크게 관심 없다. 하지만 네 뜻을 존중한다.]“감사합니다.”
코카는 아네모네를 데지데리움 위에 짐짝처럼 실은 뒤, 자신도 용의 등에 올라탔다.
“나머지는 공작성에서 하실까요?”
데지데리움은 날개를 활짝 펴고,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
“그러니까……. 심연의 악마가 원하는 건 세계 멸망이고 초월자는 그 도구다…….”
스위트피와 소이 자매를 돌려보낸 나는, 정원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단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디건을 가지고 나와 내 어깨에 가볍게 걸쳤다.
“고, 공작님…….”
“단델. 내 어깨까지 떨리잖아. 손 좀 그만 떨어.”
“하지만 오늘 그렇게 큰돈을…….”
단델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울먹거렸다.
“그렇게 큰돈을 저 조약돌 사는 데 쓰셨잖아요!”
단델이 손가락질하는 곳에는 피핀이 있었다. 피핀은 달리아 앞에서 조약돌 세 개로 저글링 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뭐가 원념의 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그 돌멩이는 값어치 없어 보이는 것이다.
물론 단델의 눈에만 그렇겠지.
“아하하하! 재밌다! 피피! 하나 더 얹어줘! 네 개로 해줘!”
“아, 네 개는 어려워요, 아가씨! 악! 돌 던지지 마세요! 악!”
나는 달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달리아! 돌 대신 다른 걸 던지렴! 돌을 던지다간 네 손이 까지잖아!”
“나으리! 가정교육의 방향이 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결론적으로 네가 돌을 안 맞으면 되는 거잖아? 저글링이나 계속해!”
피핀의 저글링에 그저 즐거워하는 달리아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저런 애가 어떻게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거야?’
달리아는 모래성도 무너뜨릴 줄 모르는 순진한 아이였다. 물론 아까는 피핀에게 돌을 던졌지만, 지금은 인형을 던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테네리페가 울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본래 사람의 모습이어야 하는 시체 포식자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라……. 그래서 더 시체를 구하러 다녔던 걸까? 인간보다 괴물의 먹성이 더 좋을 거 아냐.’
혼자 궁리한다고 나오는 답은 없었다.
결국 밤늦을 때까지 혼자 끙끙 앓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식사 시간에 알베르토에게 갑작스러운 지출에 관해 해명해야 했으나, 어차피 공작가의 재산 권한은 나에게 있었다. 알베르토 또한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귓속말로 죽은 공작부인의 사치 비용이 더 컸다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아. 피곤하다. 오늘은 이만 피곤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지친다…….”
침대에 누워 보송보송한 시트를 목 끝까지 올리고, 모로 누웠다. 창밖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그래,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니 하루는 쉬어도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
찌르르르 잘만 울던 풀벌레 울음이 갑자기 멈췄다. 요즘 나는 불길한 일을 감지하는 감각이 비상하게 발달한 듯하다. 지금이 딱 그랬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뭔가 그랬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함이 덮쳐왔다.
뒤이어 창문이 후득후득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익- 하는 요란한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저런 소리를 낼 만한 건…….’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내 예상 범위 내의 일이 벌어지려는 참이었다.
‘데지데리움이구나.’
코카에게 데지데리움을 딸려 보낸 지 꽤 됐다. 데지데리움이 직접 날갯짓을 하며 돌아왔다는 건, 아네모네가 패배했다는 소리겠지.
“흠…….”
어쩐지 가슴 한편이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나 하나의 욕심을 채우자고, 이 세계관의 주인공을 없애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오늘 알게 되지 않았나.
초월자는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 달리아를 희생시킬 수는 없고, 시체 포식자는 테네리페가 지키고 있으니 건드리기 어렵다.
가장 처리하기 쉬운 건…….
약자인 아네모네다.
“어쩌면 나는 악당이 체질에 안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곧 코카가 돌아와서 이러쿵저러쿵 보고하겠지. 이상한 데서 상식이 없는 코카는 아네모네의 사체를 그대로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이거 한밤중에 일이 또 늘었는걸.
몸을 일으켜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그때.
와장창! 창문이 깨지며 뭔가 잔뜩 들이닥쳤다.
“자, 자기야!”
“뭐야, 이게 뭐야!”
창문을 깨고 들이닥친 건, 내가 죽인 줄 알았던 여주인공이었다.
목숨줄 질긴 이 자식은 내 멱살을 쥔 채 마구 흔들었다.
“자기야? 우리 사랑하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죽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