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이왕 탈선할 거 확실히 탈선하는 게 어때 (4)
울며 겨자 먹기로 라스의 성에 달리아까지 동행했다. 각자 용의 등에 올라타 날아서 이동했는데, 용의 허리가 보여주는 풍경은 제국과 전혀 달랐다. 웅장하면서도 기괴한 돌과 거친 식물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은 끝날 줄을 몰랐다. 이 모든 게 레후아가 만든 장관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일어난 용과 신의 전투.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전투에 지친 레후아 님은 이 땅 자체가 되어 휴식을 취하고 계시지. 우리는 레후아 님의 허락 아래 용의 허리에서 살아가는 거야.”
“용의 허리라는 지명도 그렇다면…….”
“레후아 님을 뜻하는 거지. 레후아 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라스는 다시금 레후아의 업적을 떠올리며 감격한 듯했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였다. 라스는 펄럭펄럭 날갯짓을 하며 불평했다.
“우리의 터전인 레후아 님은 유스카에게 유독 자비로우시지. 그가 첫 번째 성자이기 때문인가? 용족과 거의 같은 존재인 용들을 멍청한 짐승 부리듯 하는 유스카를 내버려 두시다니. 저기 보여? 저 넓고 황폐한 땅이 전부 농장이야. 용을 기르는 농장.”
불퉁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모래밭이 넓게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용을 부리는 용족이라…….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사람도 사람을 노예로 만들면 비난받듯이, 용족이 농장을 만들어 용을 가둬두는 게 이곳에선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만일 유스카가 평범한 용족이 아니라면?’
나는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유스카는 심연의 악마와 아는 사이고, 대륙이 되어버린 레후아의 첫 번째 성자였다. 그의 나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 정도면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신치고는 경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도 안 되는 수명과 인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유스카가 심연의 악마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굳이 초월자 중 하나가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면…….’
시체포식자를 죽이겠다고 한 결심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껄끄러운 건 사실이다.
남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존재를 죽인다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니까.
드넓은 농장의 끝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규모가 상당한 성이 있었다. 양식은 무척 투박해서, 멀리서 보면 성벽처럼 보일 정도로 단순한 구조였다.
“유스카 님!”
돌로레스는 성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날아가서 빠르게 변신했다. 그녀는 품에 달리아를 안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나와 일행들도 뒤이어 성문 앞에 섰다.
“손님들이 모두 왔군!”
유스카는 성문 앞을 직접 빗자루질하고 있었다. 그는 달리아를 보더니 빗자루를 내던지며 쾌활하게 다가갔다.
“이곳은 오랜만이지요?”
“안녕하세요. 달리아 글러토니입니다. 다섯 살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오라버니랑 파란색이랑 마차 바퀴입니다.”
“반갑습니다. 잘 오셨어요. 마차 바퀴를 좋아한다니 의외네요.”
“네.”
달리아가 유스카의 손가락 두 개를 잡고 흔들었다. 유스카는 몸을 숙인 채 달리아의 악수에 응해주다가, 나를 발견했다.
“아! 역시 왔군! 라기아는? 데리고 왔나?”
[유스카! 나의 사고뭉치 친우여! 잘 지냈나! 집 없이 떠돌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번듯하게 살고 있군!]“아하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유스카는 달리아를 정중히 맞이한 것과 달리, 나와 다른 인물은 본체만체했다. 초월자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게 눈에 보였다.
“어라. 당신도 왔군요. 흠. 저분과는 사이가 안 좋지 않았던가요? 내가 이간질을 하려는 건 아니고.”
아네모네를 발견한 유스카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네모네는 유스카의 악수를 거절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내가 꼬맹이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아하하하.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여전하시군요. 하……. 세라가 무척 기뻐할 겁니다.”
“세라? 그게 누군데?”
“모르는 척하기는. 아니지. 아직 모를 시기인가?”
유스카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 다음에 성문을 활짝 열었다.
“따라오시죠!”
라기아가 유스카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유스카의 바로 옆에서 걸어야 했다.
무기 하나와 용족 한 마리(?)의 대화는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들의 대화와 같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 나는 바빴다, 아니다 내가 더 바빴다, 하는 이야기…….
“이번 주인은 꽤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제대로 선택한 게 맞나?”
[참나! 가끔 자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니까!]“그게 내 특기긴 하지!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자네가 환각의 마녀 편에 설 줄은 몰랐어. 원래 중립을 고수하지 않았나. 나처럼 테라가 남긴 힘을 지키며 소일거리나 하는 여흥을 즐기는……. 그런 삶 말이야. 아니지. 나보다 더 매정하게 자신의 삶을 고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아. 엘세노테 님을 떠난 이야기를 하는군. 이거 원. 사정이 복잡해. 내가 고깃배에 잡힌 얘기부터 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 전에…….]둘의 미묘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안내받은 장소는 연회장도 식당도 아닌 연무장이었다.
용족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다가, 유스카를 보자마자 넓게 흩어졌다. 마치 연무장 밖으로 아무도 나갈 수 없게 하려는 듯이.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역시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어!”
라스가 버럭 화를 내며 몸집을 키웠다. 거대한 용으로 변한 라스는 순식간에 유스카에게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나까지 공격당할 상황이었는데, 유스카가 나를 밀쳐낸 덕분에 안전했다.
그런데 밀려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짧은 순간에 라기아를 훔쳐냈다.
“이봐!”
“잠깐만 손을 빌리지. 손이 없는 친구지만 말이야.”
[아하하핫! 역시 유머 감각이 남다르다니까. 시에라 잠깐만 기다려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유스카의 손에서 라기아는 기다란 창으로 변했다.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크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사용자에 따라 저만큼 차이를 보일 수 있는 무기였다고?
순간 내가 무척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내가 넘어진 것을 본 달리아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달리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다섯 살짜리의 부축은 별 도움은 안 됐다. 오히려 불편했지만, 이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나는 엉덩방아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공작님!”
코카도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나는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라스 녀석, 물불 가리지 않는 건…….”
게임에서 본 그대로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아아아악! 라스 님!”
우리를 따라온 라스의 시종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용으로 변했다. 유스카의 용족 기사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었고, 저항은 빠르게 제압됐다.
[역시! 피 중의 으뜸은 용의 피지!]라기아의 유쾌한 목소리와 눈앞의 장면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라기아가 라스의 목을 꿰뚫었다. 내가 넘어져 한눈을 판 사이에.
라기아 때문인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라스는 유스카가 창을 빼내자마자 쿵 하고 쓰러졌다.
“조금 더 제대로 시범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유스카는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라기아를 돌려줬다. 내 손에서 라기아는 익숙한 낫의 모양으로 변했다.
[아, 유스카와 합을 맞추는 건 오랜만인데. 젊어진 기분이 드는구먼!]“무슨, 무슨……. 라기아, 지금 뭘 한 거야?”
[뭘 하긴! 사냥이지. 설마 내가 바람 피웠다고 질투하는 거야? 아하하핫! 농담이야, 농담. 나는 친구를 배반하는 짓은 하지 않아. 시에라 너까지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잖아. 그러니 협력해 준 것뿐이야.]“…….”
라스가 죽었다.
아니, 죽어가고 있나?
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까까지 나와 떠들던 존재가 아닌가. 지금 저렇게 목에 구멍이 난 채로 털썩 누워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용의 모습을 한 채로, 놈은 이 세상이라는 연극에서 퇴장했다.
자기가 주인공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퇴장해 버리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믿기지 않았다. 라스는 남주인공 중 한 명이다. 타이머스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름대로 비중 있는 남주인공.
내가 아는 배드 엔딩 중 라스가 죽는 엔딩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공략하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던 걸까?
아니, 지금 이야기는 그 어떤 루트로도 진행되고 있지 않은걸.
“당신, 정체가 뭐야? 어떻게 라스를 죽일 수 있었지? 왜 죽였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마치 자네가 이해해야 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로군.”
“…….”
“부탁을 받았거든.”
“부탁? 부탁이라니…….”
유스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날파리 한 마리를 죽인 것처럼 무덤덤한 태도다.
“평범한 용족은 아니야. 정체가 뭐야? 당신도 초월자를 노리고 있나?”
“초월자를 노리긴! 나는 무관해. 거인을 만나본 적이 있나? 거인들도 아마 이 일에 관심이 없을 거야. 이건 인간들이 살고 있는 땅과 바다에 관한 문제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괜찮아. 인간은 이런 걸 잘 모를 수도 있지. 그렇게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러니 차근차근 알려주겠어. 우선 말해두는데, 나는 자네의 적이 아니야. 물론 아군도 아니지. 하지만 나는 초월자의 사도가 하는 부탁은 들어주려고 해. 나는 착하고 친절한데다가 매일매일 심심하기 때문이지.”
“…….”
유스카의 부하들이 라스의 사체를 가져갔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챈 아네모네가 코카와 함께 내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꼬맹이 아가씨를 지켜. 저 젊어 보이는 영감탱이는 보통 녀석이 아니야.”
이 심각한 상황에서 아네모네가 돌연 닭싸움 자세를 취했다. 미친 건가?
이상한 자세로 바짓단에서 뭔가 꺼낸 아네모네가 유스카를 겨눴다. 그 물건을 알아보고 나는 이마를 치며 한숨을 쉬었다.
“데지데리움……. 데지데리움이 왜 아네모네의 손에 있지?”
“…….”
코카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봤다. 어색하게 웃는 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고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오호라! 이거 데지데리움 아니야! 폭풍의 마녀가 이번엔 제 사도를 꽤 빨리 손에 넣었군.”
“우리를 보내줘. 순순히 말을 듣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보석이나 돈 되는 물건도 남김없이 내놔.”
아네모네는 이 상황에서 유스카에게 금품까지 갈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쪽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뒤를 돌아봤다.
“스승으로서 알려주는 거야. 배신은 이런 식으로 하는 거란다.”
“테네리페…….”
“참. 배신은 아니지. 우리는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테네리페가 나를 보며 웃었다. 퍽 상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