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7
제67화. 형제
마리브는 활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겨 제 몸에 밀착했다. 바람이 부는 게 느껴지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활을 쏘았다. 짐승을 사냥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쉬익!
궤를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애먼 곳을 맞고 떨어졌다. 사슴이 놀라서 멀리 도망갔고, 옆에서 지켜보던 장관들은 안타까운 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아쉽습니다.”
“그러게요. 하필 바람이 불어서는.”
“자. 그러면 현재 1등은 데렌치오 님이시군요.”
“저하, 제가 쏘아보겠습니다.”
달에 한 번씩, 비공식적으로 열리는 행사였다. 황실과 주요 장관들 그리고 소수의 귀족이 모여 친목 도모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연장선을 그리는, 아주 지루하면서도 중요한 자리.
“그런데 오늘은 게일 저하가 안 보이십니다?”
활을 집어 들던 마리브가 멈칫거렸다. 그와 게일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황궁에서 제일 미천한 노예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태연하게 그 이름을 흘리다니.
몇몇이 은근슬쩍 1황자의 눈치를 보았으나, 마리브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영주 임명이 엎어지고, 몰린이 변경으로 내려가면서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게일이 이상할 정도로 마리브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딱히 특별한 소문이 도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언질로 보아 그쪽은 또 자주 방문하는 듯 보였다.
마리브만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뜻이다.
장관은 그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는 것도 모르고, 활시위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전하도 건강 악화로 안 나온 지 꽤 되셨고, 이거 참 아쉽습니다.”
“…아쉽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지요. 예전에 저하들께서 어렸을 때는 그리 시끌벅적하니, 참으로 즐거웠답니다. 소란으로 사냥감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
쉬익!
활시위를 놓으려고 할 때, 갑자기 옆에서 화살이 튀어 나갔다. 마리브가 아무렇게나 활을 쏜 것이다. 이내 다른 사슴 한 마리도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지금처럼요?”
“저, 저하?”
“저도 아쉽습니다. 장관께서는 저로서 만족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사냥 실력이 영 형편없어서 그런가.”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장관은 항변의 뜻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려댔다. 이내 손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부정해 보지만, 마리브는 그저 웃으며 등을 돌릴 뿐이다.
“계속들 하십시오. 저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아. 네네. 네. 저하.”
마리브는 장갑을 벗으며 자리를 떠났고, 장관들은 실수한 자에게 은근한 구박을 주며 활을 들라 재촉했다.
천막 아래 몸을 누인 마리브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괜찮으십니까?”
며칠간 쌓인 업무로 인해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활까지 쏘러 나왔으니, 무리인 것도 당연했다. 보좌관은 시원한 물을 따라주며 그를 살폈다.
“변경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로만드로인가?”
“아마 마리브 님께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만.”
마리브는 의아하게 보좌관을 올려다봤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우선 로만드로가 보고하길, 기근을 해결할 만한 작물을 발견했다 합니다. 이안이 주도하여 현재 브라츠에 보급 중이며, 이번 겨울 내로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 전했습니다. 평작 수준의 조세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번 겨울?”
당장 푸른 잎들이 누렇게 변하는 시기였다. 대체 어떤 작물이기에 겨울 내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하는 것인가? 재배 기간이 최소 두 달 안이어야 계산이 맞지 않겠는가?
“굴라라고 합니다.”
“굴라? 내가 아는 그 독초?
마리브가 단박에 어이없는 투로 되물었다. 변방으로 가더니만, 로만드로가 미쳐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더러운 곳에서 자라고 독성까지 있는 잡풀이지 않나.
그런데 그것으로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돌아버리겠군.”
“저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는데, 아래 상술한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굴라는 씨앗이 식용이라 합니다. 생각보다 맛도 좋고, 포만감이 훌륭하여 요리 연구도 그새 꽤 진행된 모양이더라고요.”
마리브는 마땅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까딱거렸다. 보좌관이 잽싸게 그의 앞에 서신을 내밀었다.
“재배법? 하! 잡초 재배와 무엇이 다른가?”
“재배 기간이 한 달로 아주 짧고, 씨앗 하나에서 다시 열 개 이상의 씨앗이 난답니다. 토질이나 수질도 상관없고요.”
마리브는 로만드로의 보고를 찬찬히 읽어내렸다.
확실히, 적힌 대로라면 기근을 잡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구황작물 중에는 가히 최고라 할 정도로 조건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굴라를 떠올리기만 해도 더러운 기분인데, 그걸 어찌 먹을까 싶다.
“다음은? 이게 다인가? 선물치고는 볼품없군.”
“아, 그리고…….”
보좌관이 허리까지 숙이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이안을 차기 영주로 추천하는 추천서와…….”
죄인의 핏줄이지만, 마력운용자라는 게 사실이라면 크게 상관없다. 아니지. 오히려 살살 구슬려서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두어야 할 판이다. 보아하니 로만드로와 영지민들의 신임을 제대로 붙잡은 것 같은데, 추천서까지 올라온 마당에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마리브에게 진짜 문제는…….
“몰린 경의 반지가 동봉됐습니다.”
“뭐?”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서인지, 멀리 서 있던 장관 중 한 명이 힐끔거렸다. 마리브는 천막 커튼을 치며 놀라서 되물었다.
“몰린의 반지?”
“네. 로만드로의 말에 따르면, 몰린이 이안을 죽이려 했다는군요. 그의 부하인 페트레이오가 주도하여 용병을 모아 습격했으나 실패. 현재 모두 구금 중이라 합니다.”
마리브는 보좌관의 설명을 들으며 보고서 뒷장을 넘겼다. 테이블 위에 고급스러운 반지 하나가 놓였고, 이내 안쪽에 몰린의 가문을 증명하는 문구가 쓰여 있음을 확인했다.
“저하께 처분을 맡긴다고 하네요.”
“하.”
마리브는 정신이 점점 맑아지는 걸 느꼈다. 천려족을 끌고 들어앉았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심히 하는 짓이 쓸 만했다.
‘영주 추천을 받기에 몰린과 관계 있음이 걸림돌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몰린과, 정확히는 게일 쪽과 연관이 없으니 안심하고 저를 영주로 만들어 달라고. 이보다 확실한 간청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마리브의 손끝이 빠르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톡.
“저하?”
“이안에게 남은 가족이 있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모가 있긴 하지만,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행방불명으로 실종되었다 들었다.
“서신을 쓰게. 마력운용자라면 중앙으로 올라오는 게 용이할 것인데, 대체 어찌할 생각인지.”
일차적으로 브라츠가 게일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지만, 이안이 하는 짓으로 보아 그 이상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잘 됐다. 마법부에 넣어두면 유용하겠어.’
실제로 마법사 수가 적은 것도 있고, 그로 인해 결집력이 대단하여 대부분이 게일의 수하인 탓도 있다.
마리브는 보좌관의 말대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기분 좋게 일어나 다시 활을 들었다. 영주 임명을 진행하려면 황제의 허락이 절대적이지만, 그걸 종용하는 것은 저 장관들의 연속된 간청이다.
“좀 잡으셨습니까?”
“아. 저하. 오늘따라 사슴들 명이 아주 깁니다.”
마리브가 웃음을 흘리며 활을 잡아 든 순간.
쉬이익-!
뒤에서 꼬리를 길게 단 화살이 그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너무 순식간이라, 화살에 묶인 검은 천만이 잔상으로 남을 뿐이다. 질겁한 장관들과 달리 마리브는 얼굴을 굳히며 뒤돌았다.
“게일.”
검은 머리에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 길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는 여느 때처럼 건방지다.
게일은 말 위에서 활을 들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서둘러 쏘는 바람에.”
“…실력이 영 형편없어졌구나.”
“그런 것 치고는 제대로 박혔죠.”
마리브는 게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목이 뚫린 사슴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화살에 묶인 검은 천이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게일은 장관들에게 다가와 고개를 까딱거리며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아닙니다. 저하. 오랜만에 뵙는 것 같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게일은 자연스럽게 장관들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황제에게서 물려받은 벽안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두 사람이 피를 공유했다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형님. 제가 잡아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시죠?”
게일은 한껏 눈썹을 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댔다. 둘이 붙었다 하면 항상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장관들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쭈뼛댔다.
“이제, 그, 우리도 목 좀 축임세.”
“그럴까? 아우. 더워. 응. 날이 더워.”
“저하, 잠시 쉬었다 하시지요.”
“이봐라! 여기 활 통을 채워 놓거라.”
소란스러운 노인들을 뒤로하고, 마리브는 살포시 웃었다.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로 보아, 용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짐작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는 방금 브라츠에서 올라온 서신을 읽은 상태.
“그래. 바쁜 와중에도 이리 모습을 보여주니, 아우께 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제가 형님만큼 바쁘겠습니까. 국정이다 뭐다 아주 정신이 없으실 터인데, 이런 시시한 사냥 모임에도 꾸준히 나오시고…….”
적통이자 공식 후계자인 마리브는 황궁에서 업무가 제일 많다 볼 수 있었다. 황제가 병상에 드러누운 이후로는 더더욱 심해졌다.
게일은 뒤쪽에서 허허, 실없이 웃고 있는 장관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물며 변경에도 그리 신경을 쓰시니. 당장 과로로 쓰러지신다 한들,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 네놈이 요즘 그쪽에 관심을 쏟고 있음은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다.”
“자문관에게 보고서는 계속 받으십니까?”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게일이 천천히 마리브의 얼굴을 훑었다.
어느 순간 몰린의 보고서가 뚝 끊어졌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 로만드로의 것은 계속 올라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분명 브라츠 영지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다.
마리브는 방긋 웃으며 게일에게 경고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게일이 속으로 코웃음을 쳐댔다. 총회에 갑자기 참석하여 훼방 놓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마리브 역시 뭔가를 눈치채고 있음을.
“브라츠 영지에 관한 것은 관심 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차기 영주 추천서가 올라왔거든. 나 또한 이의가 없으니, 서둘러 진행할 생각이다.”
게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것에 반해, 마리브는 환하게 웃으며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시원하게 궤를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죽어있는 짐승의 모가지에 그대로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