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3)
목 차
42장. 영웅의 분노(2)
43장. 마왕의 분노
44장. 악당의 분노
45장. 인간의 방문
46장. 삼류 악당의 비애(외전)
47장. ???
48장. 마왕의 곤경
49장. 영웅의 곤경
50장. 악당의 곤경
51장. 마왕의 노동
52장. 영웅의 노동
53장. 악당의 노동
54장. 마왕의 고뇌
55장. 악당의 고뇌
56장. 영웅의 고뇌
57장. 영웅의 동요
58장. 마왕의 동요
59장. 악당의 동요
60장. 영웅의 절망
61장. 마왕의 절망(1)
42영웅의 분노(2)
어차피 내게 목적은 하나.
그를 죽인 도적들을 베는 것뿐.
다른 것은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런데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아이를 부탁했던 그의 마지막 말이 내 발길을 잡기 때문일까…?
“여기다! 여기 침입자가 있다!”
“무기고다! 무기고 앞으로 모여!”
드디어 발각됐나.
고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과, 고민을 멈추게 해 준 것에 대한 반가움.
두 감정이 희미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암기를 던져!”
좁은 통로로 우르르 몰려드는 도적들의 손에서 단검과 암기가 날아든다.
겨우 이런 거로 뭘 하려는 걸까?
숨을 삼키며 손목을 미세하게 흔들자, 검 끝이 수십 갈래로 나뉘며 모든 암기를 튕겨 낸다.
홍염의 불꽃 제3식 ‘홍련의 분화’.
상대를 교란하고 급소를 뚫는 검식. 하지만 응용에 따라서는, 수백의 화살조차 튕겨 내는 방어식이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돌진.
홍염의 불꽃 제1식 ‘홍색의 섬화’로 정면에 있던 도적의 심장을 꿰뚫고.
제2식 ‘홍옥의 참화’로 세 명의 연이어 베며 놈들 사이에 파고든 뒤, 몸을 회전하며 제6식 ‘홍혈의 염화’에 따라 사방을 꿰뚫는다.
“뭐, 뭐야, 이건!”
“괴물, 괴물이다!”
괴물? 그래, 맞는 말이다.
나는 분명 검귀.
검만을 추구하여 세상을 버린 끝에 이제는 오직 검만이 남게 된 마귀니까.
그렇기에 더욱더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으아아아―!”
방패를 내세운 도적을 홍염의 불꽃 제5식 ‘칠흑의 염화’로 방패와 함께 양단한다.
휘둘러진 도끼를 제7식 ‘홍광의 염화’에 따라 튕겨 내고, 그 미간을 꿰뚫는다.
뒤이어 제8식 ‘암흑의 염화’에 따라 검을 느릿하게 밀어 넣자 검에 꿰인 도적의 머리가 산산이 터지며, 뒤쪽에 있던 도적이 내장을 쏟아 낸다.
아아, 결국, 이렇다.
단 한 번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다.
내게서 그와 함께하는 ‘기쁨’을, 그에게 직접 검을 배우는 ‘환희’를, 그를 죽이는 ‘쾌락’을 뺏어 간 주제에 정작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하다니.
짜증을 넘어 분노마저 일어날 것만 같다.
그 분노를 담아 도적들을 베던 나를 일순 한 자루의 검이 막아 들었다.
카앙!
한 줄기 날카로운 울림.
동시에 떨어지는 것은 나풀거리는 옷자락.
복면을 뒤집어쓴 얼굴 옆으로 길게 베어진 어깨와 세 걸음이나 물러난 발. 그리고 부르르 떨리는 검은 충격의 증거.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멈추게 했다.
내 검을, 받아 냈어?
원래대로라면 검을 날려 버리고 목까지 갈랐어야 할 필살의 검이 겨우 어깨 하나만을 베고 끝났다.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우연을 허용할 만큼 내가 그에게 배운 검은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자.
잔영을 남기며 옆으로 이동해 제1식 ‘홍색의 섬화’를 내뻗는다.
‘귀검자’가 창안한 대륙 제일의 쾌검 ‘그림자 베기’.
그것에 ‘전장의 불꽃’의 착시 효과를 더해 투검자의 마지막 후예가 창안해 낸 이 필살의 일격을, 받아 낼 수 있을까?
캉!!
아아, 과연.
가슴이 옅게 베어지는 것만으로 내 검을 피해 낸 복면 검객을 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능히 일류를 넘어 검경을 보는 수준. 그렇기에 내 검을 받아 냈을 것이며, 내게 그를 뺏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조금 기대해 보자.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
즐기기 위해 누르던 힘을 풀어내며, 검을 휘두르는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좀 더 빨리.
좀 더 세게.
좀 더 현란하게.
카강― 카가강! 쿠웅―!
결국… 이 정도인가.
처음 몇 수만을 가까스로 받아 냈을 뿐.
결국 채 5합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가 뒤쪽의 문을 부수고 처박힌 복면 검객을, 나는 차갑게 바라본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그뿐.
부러진 검의 파편이 몸 곳곳에 박혔다.
근육이 끊기고, 주요 혈관이 터진 이상 길어 봐야 십여 분 정도 버티다 죽을 뿐.
더 이상 싸우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마저 불가능해진 복면 검객의 모습이 나를 실망케 한다.
채쟁― 채재쟁!!
누구지, 이건?
복면 검객이 문을 부수고 처박힌 창고.
그 안쪽에서 울려오는 날카로운 금속음.
검과 검이 목숨을 노리고 맞부딪치는 치열한 사투의 소리가, 식어 가던 흥미를 돋워 낸다.
걸음을 옮겨 문을 넘자 벽에 달린 몇몇 횃불의 어둠 속에 맹렬히 튀어 오르는 불똥이 비친다.
“크캬캬! 이거냐? 겨우 이거냐?! 응? 좀 더 제대로 해 봐! 캬캬!”
“크윽…!”
한 자루의 검을 휘두르는 광인과 신음을 삼키며 그것을 받아 내는 중년인. 비록 한쪽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광인의 우세는 명백하다.
그 현란한 검광과 맹렬한 기세.
무엇보다 폭발적인 광기가 빚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자, 자. 간다. 간다. 간다―!!”
검을 비스듬히 겨누고, 땅을 박차는 광인.
중년인은 검으로 그것을 막으려 든다.
나는 안다.
무모한 돌진에 담긴 것은 일격 필살의 검.
일격으로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기에 그만큼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공격임을.
그리고 둘 중, 누구의 실력과 기세가 더욱더 뛰어난지는 명백하다.
촤―악!
순식간에 근육과 혈관이 갈라지며 생명을 잃은 몸이 서서히 쓰러진다.
남은 것은, 광기로 물든 ‘두’ 명의 광인뿐.
“크크, 뭐냐, 너는? 응? 뭐야, 그 눈은? 뭐지, 그 검은?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쁘다고!”
이글거리는 붉은 안광.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음성.
그 타오르는 적의 속에서 휘둘러져 오는 검을 받아 내며 나는 웃는다.
이자가 대체 누군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단지 그 광기를 따라 펼쳐지는 검이, 나를 기쁘게 만든다.
그래, 이게 당신의 광기인가.
그렇다면, 나의 광기도 보여 주는 게 예의겠지.
홍염의 불꽃 제9식
‘홍염의 날개’
“크캬, 너, 이건, 뭐…야?!”
무수히 펼쳐진 18개의 검영이 6방을 베고, 6위를 찔러, 6명을 끊는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물러나는 광인.
그것은 쓸데없는 발버둥.
방어 불가, 회피 불능, 생존 불명의 검에 끝내 왼팔이 잘리고, 오른쪽 눈이 터지고, 양쪽 귀가 떨어지며, 전신이 피로 물든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필살의 검이기에 하나만 놓쳐도 절명할 수밖에 없는 18개의 ‘죽음’을 모두 막아 내고, 생존을 쟁탈한 것 자체가 놀라운 실력의 증거.
그리고 어떤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찔러 들어오는 맹렬함은 용기일까, 아니면 광기일까.
화르륵―!
광인의 움직임에 호흡을 맞추듯, 사방의 불길이 거칠게 일어난다.
하지만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불꽃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뒤에서 뛰쳐나온 복면 검객의 기습.
이미 사지의 근맥이 끊어졌을 텐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사소한 의문 따위는 묻는다.
그저 치솟는 광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른다.
홍염의 불꽃 제10식
‘홍염의 바람’
18번의 검세에 남은 반탄력을 끌어내 검에 응축해서 수평으로 휘두른다.
빠르진 못할망정, 철벽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거대한 압력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폭풍을 일으킨다.
콰앙―!
“크헉!”
일검에 광인의 가슴을 가르고.
일식에 다가드는 불꽃을 몰아낸다.
남은 것은, 단 하나뿐.
허공을 날아간 광인을 집어삼키고 더 거세게 덮쳐드는 불꽃은 보지 않는다.
몸을 돌리며 검에 담겨 있던 폭풍을 개방할 뿐.
홍염의 불꽃 제11식
‘홍염의 칼날’
응축돼 있던 힘을 한 번에 쏟아 시공을 꿰뚫는 하나의 섬광을 그려 낸다.
힘을 속도로 바꿔, 보이지 않는 허상의 영역까지 도달한 궁극의 검이 노리는 것은 복면 검객의 심장.
그 절대적인 죽음을 상대로 복면 검객은 손을 펼친다.
바로,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죽고 싶은 건가?
아니면 포기했을 뿐인가?
무심코 생겨난 의문을 품고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나를 덮치는 것은 서늘한 전율.
포기한 자의 눈이 아니다.
죽으려는 자의 눈도 아니다.
그 어떤 공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 어떤 혼란에도 흐트러짐 없고, 그 어떤 위기에도 절망치 않는다.
한없이 냉정하게 스스로의 ‘길’을 추구할 뿐인 이러한 눈을….
단 하나, 나는 알고 있었다.
푸욱―!!
무언가 채 떠오르기도 전.
손안에 느껴지는 것은 묵직한 감각.
살을 자르고 뼈를 끊는 익숙한 느낌은 어째서인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온다.
그 절대 필살의 검에 꿰뚫린 채 나를 덮쳐 오는 복면 검객 앞에, 나는 석상처럼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나를 끌어안고 엎드리는 복면 검객의 등 뒤로 파도와 같은 거센 홍염이 몰아치며, 뜨거운 열기가 몸을 적신다.
치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메케하게 퍼지는 가운데, 불에 타 너덜너덜해진 복면이 스르륵 떨어져 내린다.
아아… 그래.
필살이어야 할 검을 맞고도 살아 있는.
무표정하지만, 그렇기에 낯익은 얼굴.
“어리석은 녀석.”
무뚝뚝한 음성으로 차갑게 질책하면서도 칼날과 불길을 맨몸으로 받아 가며 나를 구해 준 그를 보며, 나는 뜨겁던 피가 식어 감을 느꼈다.
―그는, 살아 있었다.
―나는, 지옥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에게 구원받았다.
“크―크큭. 크하하, 네놈! 네놈이었구나!”
전신을 덮은 화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에서 튀어나온 광인의 검은 살기를 품고 그를 겨눈다.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감히 ‘내’ 앞에서 ‘그’를 위협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다.
검을 쥔 손에 다시 힘을 줄 때.
하나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아 온다.
“쉬어라.”
“…하지만….”
“더 이상, 네 손을 피로 더럽힐 필요 없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검사로 태어나 검사로 살아왔고, 손에 피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싸우지 말라는 배려도.
다른 누군가의 보호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다.
그러나 내 앞을 가로막은 이 넓은 등은, 나를 검사가 아닌 한 명의 여인으로서 배려하고 지켜 주고 있었다.
검사로서의 긍지, 명예, 자존심.
그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더욱 소중한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일까?
단지 여인으로 인정받았을 뿐인데.
이토록 가슴이 뛰는 것은, 어째서인지.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박동 속에서 나는 광인과 맞서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육신은 이미 엉망진창.
필살이어야 할 검에 몸이 꿰뚫리고, 타인을 감싼 등은 화상으로 얼룩졌다.
왼쪽 어깨는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상처 입고, 온몸은 검상과 피로 가득 뒤덮여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태.
하지만, 그에 대한 걱정은 내게 없다.
그는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 중 하나. 환검술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전장의 불꽃’을 이은 ‘투검자’의 진정한 후계자.
그리고…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오직 한 명뿐인 나의 스승이니까.
그 굳은 믿음 속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