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85)
84악당의 휴식
“나는… 그만두겠네.”
꿈인가?
그가 내민 지도를 챙기며 나는 내심 생각했다. 과거의 일을 꿈으로 회상하는 것쯤, 내게는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 과거가 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있었던 일인지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만큼, 이것이 꿈임을 더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현명한 결정을 하셨소.”
“현명? 글쎄, 모르겠군.”
내가 과거의 기억을 따라 담담히 내뱉은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자조하듯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겁먹었을 뿐이야. 그런 괴물이 지키는 땅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으니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는 것뿐이지.”
그야말로 맥이 풀린 듯한 중얼거림, 비록 지금은 하찮은 시골 늙은이가 되었다지만, 궁극의 함정술인 ‘용의 무덤’을 완전히 터득하고, 대륙 곳곳을 뒤지며 수많은 유물을 발견해, 최고의 보물 사냥꾼으로 불리던 그답지 않은 모습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를 비난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다만 아무 말 없이, 텅 빈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나는 틀림없이 이 선택을 후회할 거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그곳을 잊지 못하겠지. 그리고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올 기회를 노리며 침을 삼킬 걸세.”
아아, 맞소. 당신은 분명 그럴 테지.
비록 겉으로는 드러낼 수 없었지만, 나는 내심으로나마 십분 동의했다.
그는 이 길로 은퇴에 접어들 것이다. 그리고 대륙 서쪽 끝의 시골 마을에 정착해 평범한 사냥꾼이자 숲지기로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끝내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그리고 다시 그곳을 정복할 기회가 오기를 앞으로 30년 동안이나 기다릴 것이다. 그곳에 자신이 찾는 보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면서.
“있지도 않은 보물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목숨을 건지는 편이 더 낫지 않겠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자네는?”
“물론이오.”
그의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은 30년 전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곳에 보물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대체 왜 그곳을 다시 한번 찾아가려는 건가? 자네 말대로라면 그건 정말이지 목숨이 몇 개라도 할 짓이 아니지 않나?”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내 목적을 함부로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말하더라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 때문에 나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건 당신이 알 일이 아니오. 그러니 이만 잊으시오. 그리고 은퇴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나 고민해 보시오.”
“하…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이미 은퇴한 내게 그건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지.”
내 말에 그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비록 함께 드라고니아를 발견한 동료라도, 이미 ‘드래곤 헌터‘에서 은퇴한 이상, 그런 것을 궁금해 봐야 쓸모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이였기에 그는 의문을 버리고 나와 술잔을 마주쳤다.
캉!
“크레이 R. 스트라이커, 자네의 앞길에 부디 행운이 있기를 기원하겠네.”
“당신도 부디 평안한 은퇴 생활을 누리길 빌겠소. 카이너 T. 램브.”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나는 시야가 점차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술에 취하듯 일그러지는 세상, 비틀리는 현실, 망가지는 사고. 그 끝에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젠장. 몸이 피곤하니 정말 별 꿈을 다 꾸는군.’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번 꿈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니, 정신적으로는 별다른 부담이 없었다.
문제는 오히려 몸 쪽이었다. 내 나이도 이젠 어언 50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쑤셔 오고, 자칫 잘못하면 뼈마디가 나가는 나이다. 거기에 그 괴물 새끼한테 박살 난 상태로 여행하는 와중에 전심전력을 다해 망치질을 하고 주술까지 쓰니, 이제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들 지경이었다.
끄으응…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야 없지,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영웅에게 개박살이 나더라도 금방 다시 활동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갖춰야 하는 법!
아무리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졌어도, 안 되면 되게 하는 게 악당의 논리인 거다.
때는 아직 이른 아침.
녀석과 계집애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는 옷가지를 챙겨 입고 안가를 나섰다. 혹시 내가 도망친 줄 알고 쫓아오면 골치 아프니,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편지까지 남겨 두고, 뭐, 마음 같아서야 이대로 날라 버리고 싶지만….
어째 우울한 마음을 씹어 삼키며, 나는 뒤의 약초밭에서 몇 가지 약초를 채집했다.
워낙 관리를 안 해서 마구잡이로 자라 있기지만, 그래도 수십 년을 계획하고 만들어 놓은 만큼, 약초밭에는 내가 찾는 대부분의 약초가 있었다.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 이 약재들을 적당히 챙겨만 가도, 한동안 여비는 걱정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만큼, 나는 채집한 약초들을 배낭에 집어넣은 채 산속 깊숙이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숨겨져 있는 온천을 향해서 온천은 신과 악마의 전쟁으로 만들어진 구멍.
그 뿌리는 지옥에 흐르는 화염의 강 아르넬타까지 이어져, 원래는 화염을 뿜어냈다고 한다.
단지 악마가 봉인된 이후부터는 화염이 사라지고, 대신 수맥을 통해 끓는 물을 뿜어내게 된 것이다. 때문에 온천의 대부분은 동방에 밀집돼 있다.
아르넬타가 대륙의 십분의 일을 불태웠을 때, 그 주요 피해 지역이 동방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파괴의 여파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동방의 온천은 효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
반면 서방, 북방, 남방의 온천은 다르다. 이곳은 본래 신화시대 당시 악마들이 지옥에서 힘을 뽑아낼 때 사용한 구멍, 그렇기에 순수한 지옥의 힘은 물론, 용의 기운마저 일부 스며들어 있다. 어지간한 부상이나 잔병 따위는 잠시 쉬는 것만으로 깨끗하게 나아 버리는 것은 기본. 심지어 인간 본연의 잠재력을 일깨워 주기에 마법사라면 마력이 증가되고, 검사라면 강인한 신체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이참에 몸도 회복할 겸, 온천 주변에 자생하는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온천은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기에, 모르고서는 절대 찾아갈 수 없다.
하지만 과거 대장장이 노릇을 할 때 이 산을 몇 번이나 뒤지고 다닌 덕분에 나는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 당시에는 말이지.’
“망할….”
깎아 내린 듯한 절벽 위에서, 나는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지층이 불안전해도 그렇지.
고작 몇십 년 만에 없던 절벽이 생겨난다는 게 말이 되냐? 말이 되냐고!!
그나마 고지대에 지각 변동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안가까지 홀랑 날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좀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찾아볼 수밖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절벽 주변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는 울창한 수풀, 그 한가운데서 걸어 나오고 있는 멧돼지가 나를 경악하게 하고 있었다.
‘멧돼지라니?!’
이 산에 멧돼지 같은 맹수는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대략 수십 년 전쯤에는 말이지. 젠장할.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는 씩씩 콧김을 내뿜는 멧돼지를 두고, 나는 애써 냉정을 회복했다.
좋아, 침착하자. 냉정하게 생각해 보는 거다. 굳이 멧돼지를 상대로 도망칠 필요는 없다.
멧돼지가 늑대도 피해 다니는 맹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위협하지 않는다면, 꼭 달려들 이유는….
뀌이익―!
두두두두두――!
‘…그래, 있을 수도 있지’.
사나운 울음소리를 허공에 흘리며, 두 눈을 번들거리던 멧돼지가 달려든 순간, 나는 절망할 틈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렀다.
‘크윽, 가족이 인간에게 다치기라도 했나?’
어쨌든 이 새끼, 보통 흥분한 게 아니다.
어쨌거나 무사히 도망치기는 틀렸군. 아니지, 일단 나무 위로 피신하면….
쿠웅―!
쩌저적――!
…안 되겠군.
멧돼지가 들이박은 나무가 부러지는 것을 보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곰 못지않게 크고 우람한 덩치 때문인지, 멧돼지의 돌진력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웬만한 나무는 박치기 두세 번이며 부러질 것이고, 그럼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끝장나는 수가 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튀고 싶지만….
이곳은 대규모 지각 변동이 일어난 장소, 길도 잘 모르는 이런 곳에서 멋대로 뛰어다녔다가는,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산속에서 멧돼지를 따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제길. 싸우는 수밖에 없나?
마지못해 결심을 굳힌 후, 나는 멧돼지를 주시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향했다.
오냐, 네가 아무리 흉포한 맹수라지만 나 또한 지상 최강의 인간을 상대로 살아남았던 몸! 방패나 비도까진 아니더라도, 칼 한 자루만 있으면 너 따위쯤은… , 한 자루만 있으면….
‘…없구나.’
식은땀이 순식간에 등을 가득 적셔 든다. 원래 휴식을 목적으로 가볍게 쌌던 짐이다.
더구나 어제 워낙 무리해서 삭신이 쑤신 탓에, 무게를 줄이려고 검은커녕 비도도 안 챙겨 왔다. 내가 가진 게 목걸이와 팔찌뿐임을 자각했을 때, 멧돼지는 이미 제2차 돌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
이런 빌어먹을, 이거나 먹어랏!
옆으로 피할 틈도 없이 위로 뛰어올라, 가까스로 멧돼지의 돌격을 피해 낸 직후, 나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멧돼지의 두툼한 목덜미를 발로 내려찍었다. 흑야의 축복 3장 3기 심야의 그림자를 사용해 체중에 원심력을 더한 일격! 이거면 어지간한 장정도 단숨에 쓰러진다!
뀌이익―!
근데 왜 상대가 인간이 아니냐고!!
흑야의 축복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타격기인 심야의 그림자를 정통으로 맞고도, 사나운 콧김을 푹푹 뿜어대는 멧돼지를 보며, 나는 내심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흑야의 축복은 원래 관절기가 중심인 체술, 그렇기에 권각술조차 파괴력보다는 유연함을,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을 중점으로 삼고 있다. 멧돼지를 상대로 관절꺾기나 메치기를 할 수도 없으니, 타격만이 유일한 공격법이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강의 타격조차 안 통한다면…!
뀌익!!
두두두두―!
“크윽…!”
멧돼지의 3차 돌격을 완벽하게 피해 내지 못하고, 살짝 스친 것만으로 옆으로 튕겨 나가 땅 위를 서너 바퀴 구른 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뀌익. 뀌이익!
다음 돌격 때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콧김을 뿜어내며 발굽으로 땅을 긁어 대는 멧돼지, 그 모습에서 죽음의 위기를 직감하고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라, 생각해!’
숙련된 악당이란 아무리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법!
숱한 영웅을 상대하면서도 포기 안 했던 나다! 이제 와서 멧돼지 따위에게 죽을 듯싶으냐!!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은 계산을 거듭한 끝에, 나는 가까스로 한 가지 대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물론 이대로 맞서 싸우는 거나 무작정 산길을 내달리거나, 허약한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성공 확률 자체는 훨씬 높은 방법이다.
잘하면 무사히 이 난관을 타파할 수도 있고,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 온 숱한 경험, 숙련된 악당으로서의 직감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 방법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다른 방법은 없냐? 응? 다른 방법은?
나는 온 힘을 다해 다른 대책을 짜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때, 멧돼지는 이미 완전 임전 태세로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부디 이 불쌍한 악당을 보살피소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즉시, 등을 돌린 나는 달려드는 멧돼지를 뒤로하고,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하여 내가 멈춰 선 장소는, 깎아 내린 듯한 절벽의 끄트머리.
일단 이렇게 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 이상 아무리 난폭한 멧돼지라도 무조건 돌격하지는….
두두두두―!
“이 미친 돼지 새끼 같으니!!!”
그야말로 눈이 획 돌아간 채, 뒤에 절벽이 있든 바다가 있든 상관없다는 듯, 달려오는 멧돼지를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나는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 B!
치이기 전에 피해서 놈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생사가 오락가락해질 터,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셋, 둘, 하나… 지금!!
멧돼지가 나를 들이박기 직전, 간발의 차로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순간, 발밑을 지나가는 멧돼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희열을 느꼈다.
크하핫! 어떠냐, 이놈! 숙련된 악당을 얕보지…!
쫘악――!
“…어라?”
막 멧돼지가 밑을 지나가려던 순간, 그 짧은 꼬리가 발목에 휘감기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그리고 보았다. 완전 뒤집혀 있던 멧돼지의 눈이 어째서인지 뒤에 있는 나를 노려보는 것과 멧돼지의 발굽이 땅 아닌 허공을 밟으며, 그 육중한 몸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물론, 내 발목에 꼬리를 휘감은 그대로 말이다.
…이런 제기라아아알―――――!!
뀌이이익――!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온몸을 덮치는 것은 세상을 초월한 듯한 무력감, 그러나 나는 넋 놓고 떨어지지 않았다.
체중이 사라진 듯한 무중력의 시간 속에서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내서 절벽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촤아악!!
끄으으윽――!
몸이 주르륵 미끄럼에 따라 손이 불에 덴 듯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나는 결코 손에 힘을 빼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조차 대비해 두지 못했을 성싶으냐!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조차 계획 C에 있는 일! 이 고통도 어차피 상정 범위의 요소일 뿐이다!!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쩌저적―!
‘아니, 잠깐. 이러면 안 되는데. 응?’
희열에서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채, 나는 암울한 눈으로 나무뿌리를 보았다.
온갖 재앙 요소를 예상하고 대응하여, 나무뿌리가 부러지는 사태까지도 대비해놨다. 하지만 나무뿌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균열은, 그런 나로서도 상상도 못 한 사태다.
‘잠깐, 잠깐만’.
아무리 지반이 약하고, 멧돼지가 위에서 마구잡이로 날뛰고 다녔어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응?
합리성, 개연성, 논리성. 이성은 그 무엇을 따지더라도,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나의 이성적인 판단이 무색하게도, 거미줄마냥 절벽까지 번져 나간 균열은 암반 깊숙한 곳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든든한 지반을 잃고, 압도적인 무게만이 남게 된 바위 절벽은 너무나 당연하다시피….
쿠궁―쿠구궁―――!!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충격으로 절벽에서 쑤욱 뽑혀 나온 이제 쓸모없어진 나무뿌리를 손에 쥔 채, 나는 공허하게 한마디 말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망할.”
악당을 희롱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도와주진 못할망정, 제발 훼방이나 놓지 말란 말이다, 이 X새끼들아아아――!!
그 처절한 저주를 내뱉으며, 나는 거암 괴석들과 함께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른바 내 악당 인생을 통틀어, 최고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처절한 추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