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54
◈ 다섯 검, 여섯 별
* * *
하나의 초식에 삶을 녹여낸 절세고수.
달리 공월무를 소유한 자.
북왕 아래로 들어가거나 그 휘하의 군주가 되지 못하는 존재다.
이미 절대자의 격을 얻은 상태이기에, 스스로 북왕의 자리에 오르거나 홀로 된 몸으로 북방 대지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토 하나에 둘 이상의 왕이 존재해선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어떤 왕도 자신의 침실 인근에 위협적인 존재를 두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정연신은 생각했다.
‘풍토가 달라.’
절세고수를 대전사로 둘 수 있고, 또 둔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라는 의미. 북왕으로서 무적(無敵)이 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검성은 원래도 천하에서 손꼽히던 검객이다.
한때는 신검단주에 비견되기도 했고, 지금 보기에도 몇 합의 손속으로는 승부를 판단하기 힘든 강자였다.
당연히 북왕 야율이 군영마저 내팽개치고 달려올 만했다.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어떤 말로 설득해야 할지 막막해진 형편이지만.
우웅!
정연신은 우선 넓고 반투명한 기막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맹(盟)이지만, 제갈세가의 정보력 덕에 알고 있었네. 자네의 환골탈태를.”
노검객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연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느새 자신의 철검을 귀신같이 칼집으로 집어넣은 채였다.
“자네가 태모산성주의 귀천에 일조함으로써 날 살렸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 당돌했던 소년이 사내가 되었어. 나는 부끄럽게도 노인이 되어 있고.”
“지금 어르신의 모습이 제 꿈입니다.”
정연신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 세월을 찾은 노검객의 모습이 전혀 추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시간만이 선사하는 무게감을 전신에 둘렀는데, 마치 정연신이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없었던 진귀한 노리개를 보는 느낌이었다.
“…가련한지고.”
검성 현소백의 눈시울이 빠르게 붉어진다. 언젠가 한눈에 정연신의 체질을 알아봤을 때처럼.
노검객은 여전히 정이 많았다.
“허나 이 늙은이가 마냥 가엾게 여기기엔 참으로 큰 인물이 되었어. 어디, 자네를 한 번 안아봐도 되겠나?”
일전에 무림맹에서는 묻지도 않고 정연신을 안아주려 했었다.
지금의 정연신은 그때만큼 질풍노도의 시기를 짙게 겪고 있지 않지만, 그는 어쩐지 겸연쩍어 말을 돌렸다.
“이렇듯 여전히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가면을 벗어 보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디서나 눈이 따라붙는지라…….”
“자네 마음에 여유가 없군. 그래, 여기서 그 행색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네. 북왕 야율. 몹시 위험한 신분 아닌가?”
“놀라지 않으십니까?”
정연신의 물음에 검성이 빙그레 웃었다.
“더 기막힌 일도 많이 겪어 봤네. 당장 자네가 내게 북왕 휘하의 군주가 되길 청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저의 대전사가 되어주십시오.”
“…….”
담담히 건넨 말에 인근의 적막이 완전해진다. 천천히 입을 다무는 검성. 정연신은 오랜만에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를 신검단주라 여기고 있기에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던 제안.
염치와 체신보다 임무를 우선시한다.
침묵은 길었다.
* * *
대낮의 거대한 석실.
천장이 넓게 뚫린 곳인데, 정작 장내에는 차가운 어둠이 흘렀다. 달리 북풍(北風)에서 비롯된 서늘함이 아니라 어떤 무공의 여파였다.
“투신 아래 만인지상의 남제… 일권(一拳)으로 밤을 불러낸다더니, 풍문에 과언이 없었구나. 햇살을 밀어내는 무공이라. 묘리가 무엇인고?”
허름한 장삼을 기워 입은 노년의 거지가 중얼거린다. 이 순간 어둑한 공기에 깊숙이 몸담은 모습이었다.
곧이어 웬 사내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장내를 채웠다. 분명히 늙은 거지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장소인데도.
그저 한 가지만 분명했다.
천하 북도가 강호인명록으로 척살의 우선순위를 매겼듯, 남제는 반대로 제국 명나라가 만든 살생부의 첫머리에 이름이 적힌 존재였다. 투신이 사라진 지금의 북방제일인이기에.
[남녘 비렁뱅이들의 우두머리여, 우리 땅의 신투만큼 겁이 없구나.]서릿발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의 음성. 순간적으로 하늘에서 내리꽂히던 빛살들 중 한 가닥이 어둑한 연기로 화한다.
그리곤 지붕이 뚫린 석실 아래로 천천히 내려앉으며 장내의 어둠을 짙게 만들었다.
천하의 섭리가 일그러지는 광경.
말 한마디였을 뿐임에도 절세의 음공(音功)과 같았다.
강호사에 밝은 인물이라면 무심코 연화나타 섬예의 ‘검가’와 견주어 볼지도 모르는데, 다름 아닌 개방주 주광신개가 그런 존재였다.
“…….”
그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늙은 거지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늘 일진이 아주 좋다! 용음사사왕을 떨쳐내다 도착한 곳이 북방제일인의 거처였다니? 기이한 전음의 기파가 그녀와 이곳을 잇고 있는 것이 느껴지길래 걸음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네.”
[바람의 길을 바꿔야겠군. 네 말은 참고가 된다. 더 지껄이도록 해라.]“누가 고개를 끄덕일지 궁금한가? 듣고 놀라지 말게. 다름 아닌 구대문파의 수장들일세! 이 늙은이의 입이 두려워 천하의 용두방주를 따돌리기 일쑤이나, 그들의 무공만큼은 이 땅의 북왕들 못지않으니…!”
어둠에 스민 남제는 주광신개가 말을 끝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말했다.
[남녘으로 도주할 셈인가? 네 발재간이 그 유명한 남하오검(南下五劍)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천하오검일세.”
[육원성군(六元星君)만 못한 이름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는.]“특별히 비범하다는 여섯 북왕 말인가? 그 명칭에 자네와 북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낯짝이 두껍구만? 미안하지만 그쪽이야말로 우리 강호에선 생소한 이름일세.”
용두방주, 곧 개방주 주광신개의 등골을 오싹하게 저미는 말.
낱낱이 분석당하고 있는 것이다.
남제는 오만하지 않다. 모든 이야기를 잘라 놓고 보면, 철저히 사실만을 내뱉었다. 단 한 번의 대승을 위해.
늙은 거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바닥을 척 강하게 밟았다. 경공의 추진 경파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쿵!
그 발 구름이 피워올린 먼지는 곧장 장내의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심지어 반동으로 치솟은 충격파마저 찰나지간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게, 이미 어떤 발경도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공월무(共越武)
남면능제(南面能帝)
전조도 없이 발동된 공능이다.
앞서 발을 구른 주광신개의 다리에서 쿠구궁― 하는 울림이 일었다. 그것은 호신강기가 우그러지는 소리였다.
“……!”
현 북방제일인이 만들어낸 절대 권역.
묘리를 조금이라도 파헤쳤던 자들 중 살아있는 이가 없다는 공방일체(攻防一體)의 한 수.
[너는 천하제일의 신법가다. 당연히 산 채로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필시 자결할 터. 지금의 네 말들이 몹시 귀중한 이유다.]주광신개의 주름진 입매에 억지로 만든 웃음이 맺혔다.
“…투신의 오른팔은 자그마한 일에도 만전을 기한다고 했지. 여하간 내 발재간마저 헤아리고 있었다니, 지금부터 이 거지가 등을 보이리란 것도 알겠군?”
[물론 안다. 네놈의 억센 다리를 부러뜨리면 그 경공이 무색해진다는 것도.]“그럴 리는 없겠지만, 패협 마연적이 반로환동하여 더욱 고강해져도 해내기 힘든 일을 자네가…?”
우드득.
주광신개는 발목을 슬쩍 돌려보며 도발에 임했다. 다행히 상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자에게도 흥미가 있었다. 내게 데려와 줬다면 좋았을 것을.]“장담컨대 자네는 그의 공월무를 태연하게 대하지 못했을 걸세. 이건 거짓부렁이 아니야. 명백한 사실….”
남제가 주광신개의 말을 끊으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순간 주광신개의 웃음이 짙어졌다.
“들켰구만. 명 황실 삼대고수의 일좌일세. 내가 반로환동을 괜히 입에 담았겠는가? 고금의 강호사를 통틀어 지금만큼 강자가 많은 시대는 없으니, 나도 마땅히 이러한 시국을 이용해야….”
그때 굉장히 앳된 소년의 음성이 햇볕을 타고 아래로 질주해 왔다.
“튀어!”
오랫동안 준비한 듯, 속된 말과 함께 지체 없이 발동된다.
어전(御殿:임금이 있는 곳)의 공월무.
높은 허공이었다.
여덟 살쯤 될 법한 아이가 전신 갑주로 무장한 채 태양을 가리고 떠 있다.
심지어 존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적황색 투구마저 쓰고 있었다. 마치 투창 직전의 기수식처럼 허리를 비틀고, 손은 뒤로 멀리 뻗은 모습으로.
[천심범일령(天心氾一翎).]절세고수 특유의 의념이 메아리마냥 몸 바깥으로 흘러넘친 직후.
순간 상공에서 짙게 모여들어 창처럼 길쭉해진 햇살이, 아이의 손아귀에서 원형의 충격파를 터뜨리며 장내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인근의 땅이 해일마냥 통째로 뒤집히며 팔방을 흐릿하게 물들인다. 실로 먹먹한 굉음이 보일 듯 말 듯 주변을 광역으로 긁어대는 것은 물론이었다.
천지간의 광채를 자신의 발경력으로 삼는 한 수.
창이 수직으로 굵직하게 지나간 공간에서 햇살이 물결처럼 일렁이는데, 일종의 경력 파동이었다.
그처럼 황실삼대고수 어웅공(御雄公)의 공월무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한한 연격. 태양빛 충격파가 어둑한 장내로 끊임없이 때려 박혔고, 그 경파의 영향에 지진처럼 굵직한 실금들이 석실 주변으로 광활하게 뻗어나갔다.
들판이 움푹한 분화구로 바뀌고 있었다.
키이이이이잉!
한없이 집약된 광채의 기둥에서 기이한 마찰음까지 일어나는 한편.
그럼에도 온전한 석실에선 남제의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산자락의 중턱 곳곳에 도시들이 자리 잡은 거악.
멀리서 사자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일상적으로 긁어대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구름 너머의 천둥처럼 아스라이 번져 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지붕 모서리가 까맣고 뾰족한 집으로 종종걸음 치곤 했다.
그들의 가옥은 곡선이 많고 지붕의 끝단이 날카롭게 올라간 형태인데, 한없이 인위적이면서도 전투적인 면모가 있어 거친 산자락과 잘 어울렸다.
광혼산(鑛魂山).
크기에 압도당한 이들은 광혼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먼 땅에서 건너온 한족들이 그렇다.
굉장히 깊은 골짜기를 옆으로 두르고 있는데, 물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황톳빛 토양만 적나라하게 드러난 풍경. 그래서 계곡이 아니었다.
오직 싸늘한 공기만 짙었다.
그것은 광혼산의 도시들 중 혼멸(魂滅)이란 이름을 지닌 곳도 마찬가지였다.
몹시 기이한 명칭에 걸맞게, 이 순간 도시의 입구로 들어선 일행을 멀거니 바라보는 사람들.
“시선이 뜨거운데요?”
회색 피풍의의 옷단을 궁장처럼 넉넉하게 늘어뜨린 소녀가 중얼거렸다.
한 발 앞에서 걷고 있는 북왕 야율의 날개뼈 어림까지 올라온 키에, 은가면에 가려진 얼굴의 양옆으로 매끄럽게 떨어져서 모이는 턱선, 그리고 둥그스름한 귀.
누가 봐도 한족이다.
군주 천극이란 이름을 쓰고 있는 신소빈이었다.
“네 행색을 봐라. 어디 북경 아래쯤에서 건너온 도망자의 복식 아니냐? 아주 전형적인 옷차림이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중년의 도객, 마마광멸도가 그녀를 타박했다.
하지만 신소빈은 굳이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여정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그럼에도 마마광멸도는 별달리 거친 방법으로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못했다.
앞에서 북왕 야율과 나란히 걷고 있는 노검객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던 까닭이다.
노인은 자신을 소개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기어이 이곳까지 따라왔다. 광혼산맥. 북왕이 둘씩이나 거하는 곳인데도.
노검객을 힐끗거리던 마마광멸도의 미간이 모였다.
‘정말로 대전사라고?’
허리춤의 철검 한 자루를 낭인마냥 절그럭거리는 몸가짐. 볼품없이 깡마른 육체.
어디서 모진 고초를 겪었거나 오랜 시간 섭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경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길고도 벼락처럼 빠른 상념이 마마광멸도의 뇌리를 스쳤다.
‘반박귀진을 저만큼 깊게 습득한 초고수는 많지 않다. 그중 북방에 올 만한 남쪽 인사라면 입황성의 보혈대주나 공명령주(共鳴靈主), 그리고 진주 언가권룡이나 형산 대제자 정도… 대문파의 장로 배분 중 삼화취정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몇 없을 텐데, 어디서 저런 자를 구했지?’
당장은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과 별개로, 이 순간 야율 일행의 목적은 하나였다.
남부 평정.
장성을 기준으로는 북쪽이며, 치극왕과 용음사사왕을 비롯해 무려 네 명의 북왕이 머물고 있는 땅. 광활하게 펼쳐진 북방 강호에서 남쪽에 해당하는 대지다.
마마광멸도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더 물어봤음에도 사실이었다.
여타 군주들은 저마다 다른 북왕의 측근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지라, 새로운 왕의 곁에서 만인지상의 위치를 누리고자 했는데.
그는 간곡히 조언을 건넸다.
“…지금이라도 재고해 보시오. 염열신왕 이후로 그간 다른 북왕들은 잘 피해 다니지 않았소? 이 땅이 얼마나 위험한지 명료하게 깨달은 것 같았거늘.”
그제서야 북왕 야율의 음성이 은가면 속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 하지만 머무름이 후퇴와 다르지 않은 이들도 있다. 나는 충분히 어물쩡거렸어.”
담담한 이야기였다.
이제 마마광멸도는 일행과 조금 멀어져 있었다. 다소 발걸음을 늦추는 보신경인데, 전진보법과 후퇴보법 사이의 어딘가로 몹시 자연스러웠다.
‘풍진 강호에선 줄을 잘 서야지.’
그는 생존의 달인이다.
신검단주 대리의 날벼락 같은 이기어검에 적중당할 때도 그랬고, 다른 북왕의 세력과 마주하기 직전인 지금도 그러했다.
화아아아악―!
어느새 용맹한 구경꾼들로 채워진 산맥 도시의 초입. 얼굴이 희멀겋고 상처투성이인 요족들이 한족과 명족보다 많은 곳.
[광혼산의 동무들은 보아라.]거뭇한 기운이 푸른 하늘의 일부분을 밀어내듯이 덮는다.
분명히 사람에게 쌓인 내공의 기파였다. 하지만 교룡을 따라다니는 먹구름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무능한 북왕이 끝내 자신의 군영마저 버리고 이곳에 왔다. 나는 용음사사왕을 모시는 군주이자 대전사로, 이제는 저자가 진정으로 북왕인지 의아하다.]말도 안 될 만큼 막대한 축기량 탓에 상시 육합전성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사락.
훤칠한 소년이 풀잎을 걸어온다.
깊은 동굴에서 울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신형이 드러났다.
거무스레하게 줄기줄기 피어오른 연기의 틈새로 샛노란 눈동자가 빛난다. 그 속에 북방의 창처럼 길쭉하게 세워진 동공.
환골탈태를 두어 번 한 것마냥 흠 없는 몸태에, 백자처럼 티 없는 얼굴의 살갗이 돋보인다.
검단(劍緞)이 그의 이름이었다.
신검단주처럼 반룡지체라 알려진 군주이자 대전사.
한참 뒤편에 그의 북왕이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거대하게 솟아올라 있는 동상의 어깨 위, 웬 전투마를 품에 안고 누워있는 여인이 용음사사왕일 터였다.
어느새 마마광멸도는 그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교묘하게 멈춰 서 있었다.
북왕 야율이 한동안 자중했기 때문일까.
용음사사왕은 검단이 무슨 일을 벌이든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당장 투신이 세운 율법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명백히 북왕 야율보다 하수인 검단이 그의 앞까지 다가가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를 어찌 예우하면 되겠나?]검단이 도시의 양민들을 둘러보며 묻는다. 북왕의 그릇을 상징하며, 때로는 자신이 모시는 왕과 동일시되는 신분답게 백성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것이다.
그때였다.
북왕 야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 옆의 노검객이 나섰다. 곧장 검단의 물음이 이어졌다.
[늙은이가 대전사인가?]“한 수 놀아보세.”
[읽히지 않는다. 너는 강자로군.]순간 검단의 몸이 거무스름한 연기를 둘러쳤다. 엄청나게 짙은 공력이 그 안에서 스스로 마찰하며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항시 강대한 힘을 꺼내놓는 연화나타 섬예의 종극뢰처럼.
[보다 어린 내가 먼저 손을 쓰겠다.]검단의 왼발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허공을 갈랐다.
뒤늦게 발꿈치 뒤편에서 거뭇한 파문이 쾅 하고 터져 나왔고, 짧은 순간 각법의 궤적이 아래위로 미미하게 대여섯 번 흔들렸다.
소리보다 빠른 강격에 변초마저 실린 것이었다.
직후에 노검객의 손등이 위로 솟구쳤다.
쩌어어어엉!
정확히 발목을 올려 치며 불꽃처럼 꺾인 손이 날카로운 수도(手刀)로 바뀐다.
동시에 미처 완전히 올라가지 못한 발바닥의 용천혈을 정면으로 베어내고, 쩌저적―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호신강기가 벗겨진 다리 앞에서 옆으로 손을 내쳤다.
후우우웅!
흐릿한 칼바람이 일었고.
순간 검단은 발을 뻗은 자세 그대로 검풍(劍風)에 휘말려 날아갔다. 태풍마냥 강한 바람소리가 뒤늦게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희끗한 칼바람에 갇힌 그의 살갗에서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요란스럽게 터졌다.
“너무 어려서 진심으로 손을 쓰기 힘들구나.”
노검객이 뒷짐을 지며 물었다.
“야율왕, 혹 내가 잘못한 것이오?”
“그렇지 않다.”
북왕 야율이 대답했다.
마치 낯선 것을 대한 것처럼 어색한 언행이었다. 과분한 빈객을 들인 장원의 장주 같은 느낌이기도 했는데, 야율은 곧 덧붙이듯 물었다.
“무슨 무공인지 알 수 있을까?”
“당연히 삼재검법 아니겠소? 천하 모든 검공(劍功)의 원점 말이오. 칼은 물론 손발로도 펼칠 수 있지.”
“아.”
어느새 북왕 야율의 등 뒤엔 마마광멸도가 곧은 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신진 북왕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