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12)
*
통대 본관 1층에 자리한 행정실.
내 말을 다 들은 행정실 직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임주희 교수님께 상담 신청을 하고 싶다, 이거죠?”
“네.”
“진로 상담인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재빠르게 메모를 마쳤다.
“알겠습니다. 교수님께 전달 후, 일정 잡히는 대로 연락줄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길로 행정실을 나섰다.
어제 오후, 서지연 과장을 통해 프랑스 대사관의 잡오퍼 소식을 들은 이후.
임주희 교수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어차피 이달 말까지만 확답을 주면 된다 했으니.’
그리고 지금 이렇게 행정실에 들러 상담 신청을 하고 나온 것.
···솔직히 말하면, 간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민했으니 말이다.
‘왜냐면, 졸업 진후의 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회귀한 것이 벌써 1년 반 전이니 이제는 제법 희미해질 법도 하지만.
회귀 이전, 지금과는 여러모로 달랐던 내가 느꼈던 절망감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설프게 수료생으로 학교를 나와버리고,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필드에 던져졌으며.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무 일이나 받다가 엉망이 되어버린 커리어.
···그리하여 결국, 소모품처럼 아무렇게나 내버려졌을 때의 기억이 말이다.
“근데, 지나친 고민 아니냐?”
“응?”
행정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추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젠 국제미래포럼 같은 곳에서 통역을 다 하는 분이 뭔 그런 걱정을 하냔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졸업도 안 한 재학생이 포럼 통역하는 건 진짜 사기 아냐?”
“음,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멋쩍어하며 말을 흐렸다.
국제미래포럼.
2010년에 첫 선을 보였으며, 퓰리처상 수상자 토머스 프리드먼, 전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 노벨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 등···.
전 세계의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을 국내로 초청해 그들의 육성을 현장에서 듣는 것만으로 의미가 깊은, 국내 최고의 포럼이다.
그리고 올해는 로 크나큰 관심을 받은 토마 키페티가 기조강연을 맡게 되었는데.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사회, 가 주제라고 했지.’
주제만 놓고 보면 작년에 통대에서 했던 특강과 큰 차이가 없는 듯했지만.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과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의 난이도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에 새로이 출간한 내용도 들어갈 거라고 했는데.’
회귀 전에 내 손으로 번역한 적이 있는 만큼, 이 주제는 좀 더 자신이 있었다.
여하튼, 그런 저런 이유로 나는 이번 의뢰를 받아들이기 앞서 상당히 고민했다.
‘제일 많이 망설였다고 해야 할까.’
내가 했던 통역 중 난이도가 가장 높았던 다니엘 세노의 강연만 해도,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강연이었으니.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난이도 끝판왕’이라 불렸던 키페티의 최신 이론을 통역한다?
그것도 세계 석학과 전문 연구자들이 우글우글한 학회 자리에서···?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딪혀보는 것밖엔 답이 없을 것 같네요.’
서 과장에게 이번 포럼 통역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며 그렇게 덧붙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 뭘 그렇게 고민해요. 난 어차피 박 선생님이 받아들일 거란 걸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죠, 호호.
···내가 그렇게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스타일인가 싶지만.
‘하긴, 여태 서 과장이 추천해준 의뢰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
현장에서 진땀을 뻘뻘 흘릴지언정, 지레 겁 먹고 물러선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때, 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렇고, 너 이거 봤냐?”
추 녀석이 느물느물 웃으며 내게 보여준 스마트폰 화면.
‘···?’
거기에 나온 기사 제목에,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긴급 속보) 또찬영 열애설, 사실은 삼각관계로 밝혀져···]···뭐야 이건?
*
또찬영 삼각관계설.
···막장의 느낌이 다분한 기사 제목이 나온 데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었다.
함영사의 문예지 의 최신호는 서이준 번역가 인터뷰를 메인 기사로 삼았는데.
원 기사는 이런 점잖은 제목에다가, 실제 질문과 답변 내용도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기사 전반에 걸쳐 통대에서 해온 공부, 그리고 통대 생활에 관한 언급이 이어졌는데.
[Q: 박찬영 통역사님과 친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을 처음 발견한 게 박찬영 님이라는 얘기도 있던데요.A: 맞습니다. 원래는 찬영이가 검토한 책이었는데, 이후 제가 번역을 맡게 되었죠. 찬영이는 종종 함영사 책을 검토하곤 했는데, 작품 보는 눈이 좋은 친구라···(후략)]
박찬영과의 교류 덕분에 출판번역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고.
특히 찬영과 신레아, 이 두 사람과 1년간 함께한 스터디가 어떻게 자신을 발전시켰는지가 후반부의 주된 내용이었지만.
[‘나랑 하자’ ‘아니, 나랑 해요.’‘그럼··· 셋이서 할까?’
···이 예상치 못한 삼각관계의 향방은?
최신호 서이준 번역가 인터뷰 보러가기↓
http://www.liter.co.kr/v/2011113120280820
#서이준번역가#리테르최신호#박찬영통역사#또찬영#대학미래통역사들]
···리테르의 공식 SNS 홍보 담당자가 속칭 ‘어그로’를 끌겠다며 이상한 부분을 발췌해 게시물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결과만 보면 어그로는 성공했고, 이를 인용한 기사들이 널리 퍼져 나갔으며···.
‘삼각관계설’ 기사에 깜짝 놀랐던 팬카페 회원들은 의 인터뷰 전문을 확인하고는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 아니 ㅋㅋㅋ 삼각관계가 이런 삼각관계였어?
ㄴ 난 또 찬영 님과 서이준 번역가가 레아님 두고 사랑의 라이벌이었다는 줄
ㄴ 어 둘이 라이벌이 아니면 뭐죠?
ㄴ 의외로 이준님과 레아님이 라이벌이었다는 결론
ㄴ 아 이건 좀···
그리고 그 시각.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기사 제목들을 살펴보던 찬영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좀.”
*
한국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미래포럼이 몇 주 앞으로 다가온 시점.
토마 키페티는 소르본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된 자신의 저서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 짤막한 소논문이 이 정도의 명성을 안겨다주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
그는 이 소논문을 완성하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작년 중순, 한국의 어느 대학원에서 했던 학생 대상 강연.
어쩌면 그거야말로 크나큰 행운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도 이미 세금제도 개혁에 관한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부유하던 생각들이, 외부의 누군가가 지나가듯 해준 조언 덕분에 더욱 확고한 형체를 지니게 되었다고 할까.
원래대로라면 가시밭길을 오래도록 걸어가 도달했을 목적지에-
지름길로 한결 순탄하게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런 조언을 해준 건···.’
엉망진창에 가까웠던 그날 강연에서, QNA 시간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학생.
근로소득보다 금융소득의 세율을 높인다면 빈부 격차가 줄어들지 않을까, 라는 그의 한마디에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일어났으니.
지금은 그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답고 강렬한 인상만큼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여하튼.
그렇게 탄생한 소논문 는 초고 단계서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았고.
정식 출간된 이후로는 가장 큰 대중적 성공을 안겨준 저작물이 되었다.
덕분에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미래포럼의 기조강연자로 초청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간 그래도 제법 많은 수의 강연을 진행했던 게 다행이랄까.’
그 과정에서 청중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고,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말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터.
그러니 작년에 비해 이번에 자신이 선보일 강연의 질이 훨씬 높을 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딱 한 가지, 통역이 걱정되는군.’
어디서 본 바로, 한국어는 프랑스어가 포함된 인도유럽어족과 가장 거리가 먼 언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통번역을 거치는 경우 원 메시지의 손실이 비교적 더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사실, 작년에 나부터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한국 최고의 통번역대학원이라는 통대생들이 동시통역을 맡았는데도.
자신의 강연 중 절반조차 청중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으니까.
(물론, 토마 키페티는 자신의 이론이 워낙 어렵기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한 그의 우려를 알아챈 담당 에이전트는, 통역사 선정에 그 무엇보다도 신경을 기울였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사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는 키페티 자신도 인지하고 있다.
통역사들의 외국어 실력이나 통번역 스킬이 문제라기보다는, 연사의 이론을 온전히 파악하고 이해한 채로 통역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니까.
그렇게, 여전한 불안감을 안은 채로 어느 경제학회 모임에 나간 그는 또다른 저명한 석학 다니엘 세노와 마주하게 되었다.
「Quelle surprise!(이게 웬일이야!)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왔나?」
「피죠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의 대학 시절 은사 모리스 피죠.
평소라면 발을 들일 일이 없을 이곳에 온 것은, 전부 다 은사의 요청 때문이었다.
「아하.」
그 말에 다니엘 세노가 저 멀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리스 피죠 교수를 돌아보았다.
「모리스가 자넬 이 모임에 반드시 부르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더니, 웬일로 성공했나 보군. 저 친구가 자네의 새 소논문에 관심이 많았거든.」
키페티의 소논문이 자연스레 대화에 등장하더니, 화제는 어느새 곧 다가올 국제미래포럼으로 넘어갔다.
기조강연자로 초청받아 한국에 가게 되었다는 토마 키페티의 말에, 다니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소식 들었네. 다시 한 번 축하하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금 걱정이 되는 게···.」
통역에 관한 그의 우려를 들은 다니엘 세노는 자신 또한 비슷한 걱정을 한 적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아주 유능하고 무엇보다··· 내 이론을 하나부터 열까지 꿰차고 있는 통역사를 만나 해피엔딩에 이르렀지.」
「하하, 그 통역사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자네도 이름을 아마 들어봤을 텐데, 라고 말문을 연 다니엘 세노가 말을 이었다.
「박찬영 통역사라고,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주로 찬(Chan)이라고 불리지.」
···어?
토마는 어쩐지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고, 곧바로 스마트폰 메일함을 확인해보니···.
‘그 이름이잖아!’
그의 담당 에이전트가 간신히 섭외했다는, 엄청난 실력의 통역사.
분명 ‘Chanyeong Park’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국제미래포럼에서 자신의 강연을 통역하기로 한 인물 또한 박찬영이다.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 하고 토마가 말하자, 다니엘 세노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걸세. 여하튼, 그 인기 많은 통역사의 일정을 잡는 데 성공한 자네 에이전트에게 감사하게.」
「네···?」
「찬, 그 친구는 아주 바쁜 친구거든.」
다니엘 세노가 그 말과 함께 스마트폰을 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노레그라스의 새로운 향수 ‘앙코르찬’에 관한 기사였다.
「울랄라.」
토마는 저도 모르게 놀람의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은 향수를 뿌리지 않지만, 오노레그라스라는 브랜드는 익히 알고 있다.
아니, 프랑스 사람 중 모르는 경우를 더 찾기 어려울 터.
「오노레그라스의 새로운 이미지 모델이라고요?」
그러한 놀람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다니엘 세노.
「그래. 나도 얼마나 놀랐던지.」
「···.」
「나중에 궁금하면 너튜브에서 Encore Chan으로 한 번 검색해보게나. ···이 친구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테니.」
그 말에 문득 호기심이 인 토마는 구글에 ‘Chanyeong Park Honore Grasse’를 검색해보았는데.
‘이 얼굴은!’
···그때 그 통대 강연에게, 내게 영감을 준 그 인물이 아닌가!
토마가 기분 좋은 경악에 휩싸인 채 작년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던 그때.
다니엘 세노는 자랑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허허, 내 팬이 이런 대단한 유명인사가 됐다고 하니 괜히 내가 다 고무적인 기분이 들지 뭔가.」
「···교수님 팬이요?」
「본인 입으로 내 팬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내 저서 중 한국에 번역 출간된 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어봤다더군.」
그저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 전반을 폭 넓게 꿰뚫고 있더라는 것.
「설마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그런 골수 독자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뭔가, 하하하.」
「···그렇군요.」
세노 교수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준 토마는 어쩐지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근데 그 찬이, 내 초판본을 구해서 갖고 있었단 말이지.’
자신이 대학 때 쓴 기고문을 모아서 낸 첫 책이자, 이제는 절판되고 만 비운의 책.
그런 걸 들고 와 자신에게 사인을 받았을 정도라면···.
‘세노 교수님보다는 내 팬에 가깝지 않으려나?’
문득 든 생각에 그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의 토마 키페티는, 그 당시 찬영의 진짜 속내가 ‘책테크’였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