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25
125
예의 대주교의 유해, 라우렌지오는 진지한 모습으로 산시아와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흐음, 흠··· 피에 대물림되는 저주라. 흔치 않은 만큼,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한고.】
—달그락, 달그락.
그가 어깨에 얹어둔 해골이 턱뼈를 부딪치자 망자가 낮게 시름을 흘렸다.
【으음. 으르신 계실 적일랑, 이 처자가 살았던 때랑 환경이 다르지 않소. 설마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디, 아직도 사람들이 가축과 뒹굴고 살 거라고.】
“여전히 빈궁한 이들 중엔 더러 가축과 더불어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토드의 첨언에 라우렌지오가 두개골을 부여잡고 탄식했다.
【허어, 전혀 발전하지 않은고로···】
그것 보라는 듯 해골이 신나서 떠들어댄다.
【나가 생전에 돌본 병자들만 몇인디, 으르신이 뭘 안다고 이게 병이라고 일컬으시는교? 이건 저주여!】
—따닥, 따닥! 딱!
【성수를 갖다 들이붓는다고 해결될 거였으면, 진즉에 나았겄지!】
대개 노인들의 논쟁이 그렇듯, 두 성자의 대립은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만 추태를 토드뿐만 아니라 후대 성직자들 앞에서 계속 보이기엔 민망했는지, 라우렌지오가 헛기침했다.
【미안허구만. 도움이 되지 못해서.】
“아니에요. 주교님. 하물며 저는 흑색 학파의 일원이고, 저주받은 몸임에도, 기꺼이 진찰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고개 숙인 산시아가 나직이 읊조렸다.
“저주나 병이거나, 제 기질을 지연할 방법이 가문의 악행을 속죄하는 것뿐이라면. 이게 저에게 부여된 사명이라 믿고 계속 지속하겠나이다.”
그 사이 대주교는 산시아의 기구한 사연도 들었던 것인지, 뼈만 남은 눈시울을 훔쳤다.
【이 어찌 갸륵할고. 죄짓고도 참회하기를 마다하는 이들도 많거늘, 가문의 원죄로 말미암은 대가마저 치르겠다니.】
—달각.
【나도 늙어서 주책이구려. 눈물 흘릴 육신마저 남지 않았는디.】
은은하게 산시아를 돌아보던 라우렌지오는 돌연 자신의 손목을 부러뜨리더니, 선뜻 건넸다.
【받으시게. 산시아 양. 나는 평생토록 이 손으로 병자들을 돌봐왔으이. 생김새가 조금 흉측허더라도, 간직하고 있으믄 증세가 잠시 괜찮아질 터이니.】
“아, 아뇨! 아무리 그래도 고결하신 분의 신체 부위를, 제가 어찌···”
놀란 산시아가 사양하니 라우렌지오가 그녀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어차피 우리는 이미 오래전 순명한 몸일세. 곧 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 순리일진대, 어찌 구주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몸까지 내던져 헌신한 이에게 작은 선물조차 내어주지 않겠는고.】
앞서 세쿤다스가 말했듯, 성인의 유해는 교회법에 따라 최상급의 성유물로 분류된다.
하물며 치유의 성사를 지녔던 성 라우렌지오의 손뼈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세쿤다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 귀한 걸··· 어찌 교인도 아닌 외인에게 반출하신다니.”
인상을 구긴 카셀미어가 눈을 번뜩이자, 세쿤다스는 입을 다물었다.
【본디 나는 가진 거라곤 비루한 몸뚱이뿐이었으니, 부디 보잘것없는 노인의 호의를 마다하지 마시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정말 감사해요.”
산시아는 공손히 손뼈를 받아들었다. 오래된 유해치고 곰팡이도 슬지 않았고, 망자로 살아나며 신성을 부린 탓인지 은은한 빛무리마저 흘러내렸다.
【비록 그대는 구주의 품을 떠나, 다른 신의 슬하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그대처럼 절박한 지경에 처한 이들을 보살피지 못한 건 나를 비롯하여 교단의 부덕일세. 그대의 앞길을 구주께서 굽어살피시길, 진심으로 기도하겠네.】
자연스레 무릎 꿇은 수습생의 머리를, 성자가 천천히 쓸어내린다.
사령술사의 제자가 화답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주시길. 라우렌지오 예하.”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믿음에 상관없이 너그럽게 축복하는 모습이라.
처음엔 케케묵은 노인 특유의 괴팍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지금은 연장자의 인자함이 느껴진다.
토드가 알고 있던 성직자들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성인다운 아량에 걸맞은 관대함일까.
아니라면 저게 태양 교단의 원래 모습이었을 지도.
산시아를 물러 세운 망자는 찬찬히 토드를 돌아봤다.
【···사령술사.】
“라우렌지오 예하, 그리고 플라쿠스 전하.”
고개를 끄덕인 라우렌지오는 어깨 위의 해골을 가리켰다.
【이분이 네게 내어줄 게 있다 하시느뇨.】
—달그락.
폴짝 어깨에서 내려온 해골은 탁자 위의 함을 두들겨댔다.
“이건···.”
먼지투성이 함에 든 건 유리로 세공된 물병.
형태는 얇은 조각들을 정교하게 깎은 것이 깃털에 휩싸인 듯했다. 혹여 놓치기라도 하면 손을 떠나 날아오를 것만 같다.
【추기경께서 카렌시아의 기적을 발현하시었을 적, 천상에서 내려온 사절의 눈물을 담은 것인고. 그대에게 도움이 될 거라 하시었다.】
물병의 정체를 파악한 토드가 신음했다.
“천사의 눈물이군요.”
동행한 카셀미어와 세쿤다스는 전율에 휩싸였는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리 가치 있는 유물을 내어주시다니. 제 제자에게 베풀어주신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달그락, 달그락.
【저 으르신의 부장품으로 묻혔던 건디, 기젤라, 그 기특한 아해가 묘소를 잘 돌본 덕분에 후세까지 잘 보존된 것인고. 그리 가치가 높다면 애꿎게 관짝에 유골과 덩달아 묻힐 바에야, 누구라도 쓰는 게 낫지 않겠는고.】
토드는 멍하니 물병을 들여다봤다.
굳이 흔들지 않아도 병 속에 담긴 은루는 잔잔하게 물결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이토록 정결한 기운은 토드도 처음 보는 종류였다.
홀린듯이 물병을 응시하는 모습에 라우렌지오가 씨익 웃었다.
【마음에 드는고?】
“예···. 무척이나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사명을 다하거라. 가뜩이나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디, 너무 많이 움직였어!】
허리를 두들긴 라우렌지오는 다소 힘겨운 모양새로 잔해에 걸쳐 앉았다.
—달그락.
동의한다는 듯, 턱뼈를 부딪친 해골도 라우렌지오의 어깨에 올라탔다.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고결하신 분들. 안식을 바라신다면 부디 떠나셔도 됩니다.”
눈가를 비비는 망자의 손길이 다소 무겁다.
【으음··· 현세의 일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하는 게 맞지 않겠는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뼈마디만 남은 늙은이를,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로 한다면······ 내, 언제라도 나서고 싶은 것이, 주책이라면, 주책이오, 죽어서도 놓지 못하는, 내 연민인지라···】
휘오오오—
홀연히 바람이 불어오고, 유해는 움직이지 않았다. 토드는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은 채 향로를 흔들었다.
언뜻 희미한 손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누군가 단지를 부은 것처럼 눈물의 업이 일거에 쏟아졌다.
대강 헤아려봐도 50을 가뿐히 넘을 만한 수치였다.
이루고 떠나가는 이들을 환송하는 것.
사령술사에겐 이보다 더한 환희도 없다.
토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부디 영면하소서.”
성령들이 다시 잠든다. 그들이 바라는 구주의 도래가 올 때까지, 유구한 꿈을 거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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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는 그 뒤로도 일주일간 수녀원에 머무르며 일일이 망자들의 유해를 담고, 장례를 돕는 데 힘썼다.
마지막 날까지 이스라와 단련을 거듭한 알베르투스는 동이 트기 전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의 관을 봉하는 것으로 모든 유해의 수습이 마무리되었다.
비로소 아덴티아 포스텔룸을 떠나는데, 기젤라는 마지막까지 토드 일행을 배웅했다.
묵묵히 토드를 뒤따르던 그녀는 성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눈먼 수녀원장은 손을 모은 채로 서 있었다.
“채 회포를 풀지도 못했는데, 이리 금방 헤어져야 하는 게 아쉽군요.”
토드의 말에 기젤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영영 작별하는 것도 아닌걸요. 구주께서 보살피신다면, 언젠가 다시 인연이 닿을 겁니다.”
안톤을 플레이하면서 99개의 업적을 달성했지만, 막상 크게 와닿지 않았다.
반면 자신이 초반부터 데리고 다녔던 동료 캐릭터가 영웅으로 거듭났고, 이젠 전설로 남아 살아있는 걸 보는 심정이란.
이루 말하기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젠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가서도 할 일은 많았고, 황제의 죽음이 임박한 와중에 대비할 것도 넘친다. 촉박한 상황이 이렇게 야속할 때가 없었던 것 같은데.
마차 발판에 발을 올린 채, 토드가 읊조렸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기젤.”
“저도요. 토드. 당신의 헌신을 교구도 잊지 않을 겁니다.”
토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암살자는 저를 쫓아온 겁니다. 인과를 따져보면 제가 화근을 불러들인 셈인데, 헌신이라기보단,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자 기젤이 서슴없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니요. 토드. 너무 늦게 당신을 찾아서 미안해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던 토드는 조용히 기젤의 손을 잡아줬다.
“저는 앞으로도 제게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겠습니다. 필연적으로 제 행보가 남들의 이목을 끌 테고, 언젠가 안톤과도 마주칠 일이 있겠죠.”
“······.”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진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합치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드.”
“그럼.”
그가 오르고, 사령술사 일행을 태운 마차는 홀연히 거룩한 도시를 떠나갔다.
하염없이 마차를 응시하던 기젤라는 낮게 속삭였다.
“···부디, 그를 구해주세요.”
한편, 마차에 오른 토드는 괜히 손끝이 근질거리는 기분이라 성가셨다.
‘묘한 느낌이네.’
기젤의 태도는 호의를 조금 웃도는 느낌이 강했다.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안톤에 비추어 비롯된 선망인지, 분간하기 모호했다.
옆에서 책장을 넘기던 이스라가 스리슬쩍 안광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네. 수녀원장과는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건가?】
“음, 과거의 전우라고 해야 할까요. 옛 동료였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투구 속 안광이 음흉하게 휘어진다. 헛기침한 파멸의 기사는 괜히 팔꿈치로 토드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본인이 요즘 탐독하는 서적의 범주를 점차 넓히고 있는데, 서정문학이라는 게 유행이더군.】
“기사도 문학 외엔 읽을 가치도 없다면서요?”
【커흠, 뭐··· 기사도에서도 흔히 사랑이란 것이 낭만적인 미덕으로 그려지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서정문학을 읽는 것 또한 기사도 정신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슬쩍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이스라가 휘파람을 불며 책장을 덮어버렸다.
“···좀 삽화가 많은 것 같은데요. 그 책.”
【아무튼! 본인이 요즘 여러 서정문학을 탐독한 바론, 수녀원장이 저렇게까지 애틋한 눈빛을 보낼 이유가 그것 밖에 없단 말이네!】
건틀렛으로 토드를 가리킨 이스라는 안광을 이글거렸다.
【어떤가, 본인의 추측이! 혹여 수녀원장과 자네는, 소위 말하는 이러쿵, 저러쿵하는 사이가 아닌지!!】
“그니까, 대체 그 이러쿵, 저러쿵이 뭔데요.”
호탕하게 웃은 이스라는 건틀렛으로 토드의 등을 턱턱, 내려쳤다.
【하, 하! 하. 자네가 굳이 밝히기 무안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역시는 역시군! 이처럼 다방면으로 안목을 기르기에 독서만 한 것이 없지! 과연 독서 최고!】
기사도 전집에 실린 관상학을 설파할 때부터 낌새가 있긴 했지만, 이젠 연애 소설을 보곤 관심법까지 통달할 줄이야.
굳이 오해를 정정하기에도 피곤했던 탓에, 토드는 그냥 한숨을 쉬고 마차벽에 등을 기댔다.
‘파멸의 기사한텐 정기 흡수 오라가 없던 것 같은데, 왜 기력이 빨려 나간 것 같지.’
문득 옆에 있던 산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스승님. 정말 아빠티사 기젤라 님과···?”
너까지 왜 이러냐.
“이스라가 헛소리하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무시하세요.”
고개를 기울인 산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뭔가.”
토드는 지금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국면을 반전시킬 게 없는지 두리번대던 중, 토드는 산시아 옆에 놓인 성인의 손뼈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저 손뼈, 다음에 야영할 때 솥에다 고아서 국물을 우립시다.”
말 그대로 성유물 뼈곰탕.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산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인의 유해는 지닌 동안엔 당신의 기질을 억제하지만, 인골은 생각보다 파손되기 쉽고, 보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 자체만으로 권능이 깃든 유물이니, 체내에 섭취해도 효력은 동일할 겁니다.”
상상도 못 한 발상에 산시아의 동공이 요동쳤다.
“스승님, 그건 너무 불경하잖아요! 기껏 성자 분이 베풀어주신 건데.”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사용하라고 내어주신 건데, 괜히 보관에 미숙하여 파손되는 것보단 낫지요. 언젠가 또 당신이 라이칸스로프로 변신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도 손뼈를 계속 들고 다닐 순 없지 않겠습니까?”
홱 손뼈를 낚아챈 산시아는 토드 옆에서 부쩍 거리를 벌렸다.
“제가 어떻게든 보관은 해볼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걸··· 솥에 끓이겠다는 스승님의 생각엔 동의할 수 없어요!”
“허허, 식인을 하자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육신은 어디까지나 잔재에 불과하거늘.”
평소 토드에게 순종하던 산시아는 드물게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죄송한데, 스승님. 이번 여정 동안엔 제게서 떨어져 주세요.”
손뼈는 꽤 적지 않은 눈물의 업이 담겨 있었다. 저걸 우려낼 때 옆에서 국물 한 입 얻어먹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럼 딱 레벨 51을 달성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아쉽게 됐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차라리 이런 상황이 더 토드에겐 편안했다.
사령술사는 아무런 부담 없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문제없이 잘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
헤르만은 뫼를렌푸르트에서 손꼽히는 부호였다.
그는 중개업으로 빠르게 돈을 벌어들였고, 심지어 제후들조차 그에게 채무를 지고 있었다.
거듭된 성공은 필연적으로 제 분수를 망각하게끔 만든다. 기세등등하던 헤르만은 손대선 안 되는 사업 분야까지 침범하고야 말았다.
이를 심히 거슬려 한 위정자들은 은연중에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헤르만은 수중에 벌어들인 돈으로 란츠크네히트들을 고용했다.
이제 추락할 시간이었다.
“흐, 흐···!”
그토록 자신감 넘치던 부호의 얼굴은 사색이었다. 그의 저택은 궁전을 방불케 했으나, 이 공간엔 그 외에 살아 숨 쉬는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인당 금화 한 자루를 들여 고용한 용병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움직이질 않는다.
손을 뻗은 그림자가 나직이 동전을 확인했다.
“···넌 운이 나쁘네.”
일렁인 촛불에 스틸레토의 날이 번뜩인다.
눈을 까뒤집은 헤르만이 애걸했다.
“살려만 준다면 저택에 있는 유물뿐만 아니라, 내 명의로 작성된 차용증과 권리들도 넘겨주겠소!”
고개를 저은 라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누가 날 고용했을 거라 생각해? 날 돈으로 회유할 생각이라면 포기해.”
“···제발, 나, 난. 살고 싶어.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고. 차라리 기회를 더 주시오, 한 번이라도! ”
그녀는 단검으로 헤르만의 턱을 세웠다.
“원래 인생은 운에 따라 갈리는 거야. 그리고 네게 주어진 기회는 많았어. 헤르만.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그걸··· 고작 동전 던지기 따위로 결정한다고?”
라노가 미소지었다.
“고작이 아니야. 헤르만. 우린 살면서 언제나 목숨을 걸고 판을 벌이는 거라고.”
그녀가 동전을 튕기며 덧붙였다.
“죽느냐, 사느냐. 앞면, 혹은 뒷면. 인생의 이치도 크게 다르지 않지.”
“내, 내가 살아온 인생은··· 그렇게 쉽게 결정될 만한···”
“아니. 똑같아. 헤르만. 하긴, 그걸 네가 깨달았다면 굳이 내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지만.”
사악!
단말마조차 흘리지 못한 부호의 몸이 기울어졌다. 라노는 그의 눈 양쪽에 동전을 올려놓곤, 열린 창틀 너머로 몸을 던졌다.
사뿐히 테라스를 타고 내려온 암살자는 주사위를 던졌다.
빠르게 그녀의 신형이 걷히고, 어느새 라노는 인적 드문 골목길에 서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어가다가,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씨발. 아직도 어깨가 쑤시네.’
성전사들이 입힌 열상은 좀처럼 낫질 않는다.
그사이 빠르게 의뢰를 달성했으니, 모은 동전으로 도박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죽은 듯이 바닥에 누워있는 광대를 향해 다가갔다.
“야, 일어나. 뽑기 굴리게.”
잠들어있던 광대의 눈자위가 뜨이더니, 가면처럼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라노를 응시한다.
—오, 오! 또 노름하러 왔어?
혀를 찬 라노는 그의 앞에 놓인 모자에 동전을 요란하게 털어 넣었다.
“소모품 뽑기로 내놔.”
그런데 모자를 들여다보던 광대는 라노를 번갈아 보더니, 머리를 꺾었다. 머리끝에 매달린 방울이 시끄럽게 짤랑거린다.
—흐음! 음. 부족한데?
“뭔 개소리야 씨팔. 금화는 모아왔고, 그간 의뢰 3개도 처리했어. 점수는 모였을 텐데?”
—아니! 부족해! 더 모아와!
인상을 일그러트린 라노가 광대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개소리하지 마. 분명 조건은 채웠잖아. 이제 와서 자리 값이 올랐다느니, 판돈을 올리라느니, 이딴 개소리 지껄이면 아가리를 찢어버릴 줄 알어.”
어깨를 들썩인 광대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라노의 가슴팍을 흔들렸다.
—히, 히히! 멍청이 라노! 너, 감당도 못 할 걸 가져왔구나!
“갑자기 뭔 씹소리야.”
광대가 기이하게 조소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라노? 네 목에 걸린 게.
무의식중에 손을 뻗은 라노는 끌려 나온 것을 보곤 광대를 놓쳤다.
낡은 목걸이.
“···뭐야.”
이런 걸 목에 건 적 없다.
이젠 누구도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 없는데, 어느 사이에 이런 게 걸려 있었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는 것에 라노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게 가로챘어. 그래서 부족해. 안 됐네, 라노! 히히히!
와락 인상을 쓴 라노가 광대를 다그쳤다.
“이게 뭔데. 뭐 때문에 점수를 가로챘다는 거야! 구체적으로 말해!”
—히, 히히. 지독한 걸 주워왔네.
목걸이가 희미하게 속삭인다.
광대는 과장되게 몸서리치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건 직조하는 거미가 자아낸 선물. 허락되지 않은 자에겐,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불운을 가져다주는 낙인.
목걸이를 거머쥔 라노의 손이 흔들린다.
—네가 살상으로 거두는 점수는 앞으로 꼬박꼬박 빼앗길 거야.
청천벽력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