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02
202
잔화는 쉽사리 그칠 줄 모른다. 정작 발화의 원류는 그쳤음에도.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자유로이 왕래하던 이웃 봉역 간에 울타리를 세우고 창칼을 겨누는 건 이제 관습이 되었다.
말머리에 내건 깃발의 색에 따라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지역 간의 교류가 끊기자 굶주린 자들은 들개로 돌변해 무차별적으로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눈깔이 돌아간 이들에겐 깃발이나 의복, 가문의 문양마저 무의미했다.
어느 것도 여로의 안녕을 책임져주질 못하니 도처에 약탈자들과 민병대의 대립이 들끓었다.
그나마 광륜표를 매달아둔 덕에 마차는 불길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었다.
빛의 표상은 저물어가는 세상에서 안전을 담보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징표였다.
까악, 까악.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쇳소리에 라노는 물수건을 짜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제법 먼 길을 떠나왔음에도 저 재수 없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눈알은 말랑말랑해서 뜯어먹기에도 편하다. 까마귀들이 별미를 차지하려 저들끼리 푸닥질 하느라 시끄럽게 울어댔다.
어딜 가도 교수대가 전신주처럼 늘어섰다. 특히 발판에 고인 피와 오물이 마른 꼴을 못 봤다. 나날이 인간들의 죽음은 갱신된다.
죽어간 이들의 꼴은 가지각색이면서 몸통에 붙은 사유는 ‘반역자’, ‘이교도’, ‘죄인’ 따위의 판에 박힌듯한 구색에 불과했다.
그나마 교수대에 내걸린 몸뚱이들은 가판대에 고상하게 진열된 진상품들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길거리에 내버려 진 채 병든 들개들의 군것질거리로 전락했다.
“······.”
작금의 양상을 자아낸 원흉은 코앞에 누워있다. 그가 간헐적으로 뱉는 호흡은 당장이라도 끊길 것처럼 위태로웠다.
무저갱의 열기가 나약한 필멸의 육신을 살라 먹는다. 형색은 백지장과 같은데, 반대로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성전사들이 신성을 물 붓듯이 끼얹지 않았다면 산 채로 익었을지 모른다.
“콘라트. 조금만 버텨. 거의 다 왔다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도 그는 낮게 신음할 뿐, 대꾸조차 못 했다. 일평생 업보나 징벌 따위를 믿어본 적 없다. 그럼에도 권좌에 앉겠답시고 인세의 지옥을 열어젖힌 대가는 실존하는 걸까.
“···코헨. 우리가 여명의 도시에 왔어. 믿겨져?”
유년기 시절의 친숙한 이름으로 호명하니 비로소 대공이 눈을 떴다. 그는 낮게 허덕였다.
“우습군. 성할 적엔 순례는커녕, 예배당에도 잘 들리지 않았는데.”
여명의 도시라는 이명과 달리, 뜻밖에도 길거리엔 응달이 짙게 드리웠다. 하물며 경건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냉담자의 눈에도 태양 교단의 심장부는 흉측한 노파들의 손가락이 꼬불꼬불 얽힌 것처럼 보였다.
“다 죽어가서야 이곳의 문턱을 두드릴 줄은.”
자조 어린 넋두리에 라노가 혀를 찼다.
“약한 소리 마. 대주교들이라면 네 멱살을 부여잡고 끌어올려 줄 거라고.”
성전사들을 힐끔거리던 대공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내가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을 거다. 난 쓸모를 다했지. 저들이 날 살려둘 리 없어.”
인상을 찡그린 라노 역시 목소리를 낮춘 채 화답했다.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리야. 서부 대교구는 네 편이잖아.”
“교회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부터가 착각이었다.”
“뭐···?”
“생각해봐라. 라노. 내가 모든 대계를 성공시켰다면 모를까, 이미 벌려놓은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라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군대가 와해되긴 했어도, 네 기반이 끝장난 건 아니잖아. 아직 후일을 도모하기엔 충분한데 저들이 왜 널 내치겠어?”
대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춤을 묶은 붕대에서 진물과 더불어 유황 내음이 미약하게 코를 찔렀다.
“라노. 애당초 인간의 힘으로 대세를 거스를 수 있다는 게 착각이었을지 몰라. 신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선택했다.”
암살자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방금 제 입으로 불신자 고백을 해놓은 놈이. 그럼 누구 편을 들어준다는 건데?”
죽어가는 대공의 눈동자는 기묘한 확신으로 차 있었다.
“···사령술사.”
라노가 진절머리를 냈다.
“돌겠네, 진짜.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아가리에서 별 개소리가 다 튀어나오는구나. 괜히 기력 쓰지 말고 눈이나 붙이고 있어라. 그냥.”
“너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거다. 그가 진정 신앙의 적대자였다면 아무리 빛의 신이라도 방관할 리 없어.”
힘겹게 기침을 쏟아낸 대공이 덧붙였다.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희석되었지만, 태양의 본분은 군신(軍神)이다. 누구보다도 관용과는 거리가 멀어. 아직까진 신이 안배한 바와 사령술사의 행적이 합치되기에 그의 존재가 용인되는 거다.”
“순 맞는 구석이 없잖아. 그러면 교회는 왜 여태껏 그놈을 배척했던 건데? 게다가 지들 신이 뒷배 봐주는 놈이랑 싸우려 드는 이유는 뭐고?”
콘라트는 고개를 틀어 마차 밖을 응시했다.
정오를 한참 넘긴 시점임에도 으레 주교령에서나 들릴 법한 종소리나 어린 가경자들이 읊는 성가가 부재했다. 신은 눈을 감았고, 거룩한 목소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빛은 없다.
“글쎄. 사람 간에 대화를 나누더라도 의사가 오롯이 전달되던가. 하물며 신이 직접 뜻을 설파하더라도, 결국 해석하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얼마든지 왜곡의 여지가 있지.”
“어이구! 대단한 신학자 납셨네. 주일도 거르고 사냥이나 나가던 놈도 아는 걸, 정작 열렬한 추종자를 자청하는 놈들이 모를까?”
라노의 비아냥에 콘라트가 쓴웃음을 흘렸다.
“···사람에겐 고약한 습성이 있다. 꼭 말미에 이르러서야 깨닫고, 후회하는 버릇 말이야.”
와락 인상을 구긴 라노는 퍽퍽 대공을 후려쳤다.
“이 등신아! 이제 와서 회개라도 하게? 여태껏 네가 일궈놓은 것들을 부정할 셈이야?!”
연신 기침한 대공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죽어가는 처지라지만 꽤 아프다. 라노. 넌 가끔 보면 자신이 사람쯤은 맨손으로 죽이는 초인이라는 걸 망각한다니깐. 자중해줬으면 좋겠는데.”
눈가에 맺힌 물기를 훔친 라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것도 최대한 힘 조절한 거야. 멍청아. 마음 같아선 마차째로 반 토막 낼 수도 있었어.”
대공이 태연히 너스레를 떨었다.
“흠, 그건 좀 무섭군. 그나저나 허리 쪽이 아린다. 붕대가 느슨해진 것 같아.”
이를 박박 갈아붙인 라노가 한숨을 흘리며 붕대를 갈아 끼웠다.
“아. 내가 암살자인지, 이새끼 전속 시녀인지 모르겠네.”
그녀의 푸념에 콘라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흘렸다. 각기 대공이나 조합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둘의 관계는 변함없었다.
조금 분위기가 환기된듯하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처음부터 매듭이 잘못 지어졌던 걸지도 몰라. 라노. 난 내가 사람들을 장기 말처럼 부리는 거라 생각했지만, 나 역시 대국에서 놀아나는 일개 말에 불과했던 걸지도.”
암살자가 눈을 번뜩였다.
“입 닥쳐, 코헨. 이 이상 내 앞에서 다 뒤져가는 늙은이처럼 넋두리 늘어놓지 마. 신의 뜻이니, 운명이니 자시고, 엿이나 처먹으라 해.”
이빨로 붕대를 끊곤, 그녀가 분명한 어조로 뇌까렸다.
“정 여의치 않으면 대주교 모가지에 칼이라도 겨눌 거야. 저놈들은 널 살리고, 우린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간다. 그럴 작정으로 여기 온 거라고.”
“너무 무모한 계획인데.”
“난 라노야. 사람들이 괜히 내게 필연적이라고 거창한 별명을 붙여줬겠어? 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반드시 이뤄. 토드, 그 망할 새끼랑 엮였던 적을 빼면···”
콘라트가 어깨를 들썩였다.
“넌 모든 일에 좀처럼 고분고분하게 구는 경우가 없지. 자기가 정한 길이라면 타협하지 않고 나아가잖나. 성난 사자처럼.”
그녀를 바라보던 대공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항상.”
대뜸 낯간지러운 소리에 라노는 볼을 긁적였다.
“존나 뜬금없네.”
“정말 맥락이 없다고 생각하나?”
콘라트의 물음에 라노가 한숨을 흘렸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새끼가. 멀쩡히 마누라랑 자식도 있는 놈이. 10년 넘게 동고동락한 친구한테 눈독을 들여?”
“엘리사에겐 미안하지만, 순전히 후계자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략혼이었다. 지금에 와선 하등 의미 없는 관계지.”
“쓰레기 새끼.”
“분명 엘리사는 흠잡을 데 없는 여인이다. 정숙한 부인이고, 아이들의 현명한 어머니지만··· 내겐 그리 큰 인상을 주진 못해. 올곧게 내 마음이 향하는 건─”
라노는 손가락을 들어 콘라트의 입술 위에 올렸다. 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만. 코헨, 넌 내가 받아줄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마차가 멈춰섰다.
“라노, 난 누구보다도 네가 여정을 마무리 짓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
“난 비록 여기서 고꾸라졌지만, 그렇다고 덩달아 너까지 함몰될 순 없는 노릇 아니냐. 넌 살길을 도모해라.”
“됐어. 등신아. 다신 못 볼 것처럼 굴지나 마. 이래놓고 멀쩡히 살아나가면 개 쪽팔릴걸. 두고두고 놀려먹는다?”
어깨를 으쓱인 암살자가 시선을 돌렸다. 눈치만 살피던 성전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반드시 살려내. 그리고 알지? 입 한 번 잘못 뻥긋했다간···”
그들의 발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천천히 목덜미를 감싼다. 진조가 흘리는 기세에 성전사들조차 벌벌 떨었다.
“즉시 저 세상 갈 줄 알아. 너희가 그토록 믿는 신이 과연 흡혈귀에 물려 죽은 놈들 따위를 받아들여 줄까?”
“바, 반드시 이행하겠소.”
손을 까딱인 암살자의 신형이 그늘 속으로 흩어졌다. 여긴 카타콤 때와 마찬가지로 신성이 만연한 곳이었으나, 흡혈귀로 거듭난 암살자에게 더 이상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눈자위를 번뜩인 라노는 빠르게 회랑과 석주 사이를 훑었다.
‘인간이었을 때랑 보는 시야 자체가 달라졌어.’
왕래하는 이들이 오래전 남긴 잔흔마저 속속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암살자의 특성인 「색적」까지 결부되어 파편으로만 남은 정보들이 저절로 취합된다.
특히 성직자들이 오가는 장소라 그런지 반짝대는 자취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제일 대가리.’
눈에 거슬릴 정도로 가장 밝은 경로를 쫓는다. 내부로 들어서니 주교들뿐만 아니라 제법 강력한 성전사들도 돌아다녔음에도 누구 하나 라노를 목격하지 못했다.
창틀의 화려한 색유리 너머로 오색의 빛깔이 교당 곳곳을 비췄지만, 볕이 들지 않는 그늘은 곳곳에 많았다.
기척을 죽인 라노는 신중하게 예배당까지 발을 들였다.
제단 앞에 무릎 꿇은 노인.
예배 시간도 아니면서 홀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들긴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암살자가 주변을 살폈다.
적어도 5분 내 거리에 인기척은 없다.
‘함정이라 하더라도··· 무방비해.’
판단은 신속했다. 단숨에 목덜미를 점한 암살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일어나. 노인네.”
복색으로 보아 수도원장이다.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네가 그 콘라트의 사냥개로군.”
칼날로 지긋이 목을 누르자 노인이 움찔거렸다.
“안톤 어딨어.”
“그분을 만나 뵙게 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가를 비튼 라노는 칼끝으로 발치를 가리켰다.
“아, 그래? 마냥 동네 아저씨처럼 쉽게 만나 뵐 수 있는 분이면서 왜 지하에다 꽁꽁 가두셨대?”
경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분은 뭇 피조물들이 범접할 수 없는 반열에 등극하신 분이니까.”
여러모로 여지가 많은 모호한 말이었으나, 일대를 돌아다니는 사제들의 잔광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눈부신 광채가 지하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여러모로 기분 나쁜 곳이다. 지상보다 도리어 땅밑이 더 밝다. 여긴 뒤틀려 있다.
“안내해.”
“바라는 대로. 헌데 늙고 노쇠한 몸인지라, 발걸음을 지탱할 지팡이라도 있어야···”
수도원장이 엉거주춤 고개를 기울이려 하자, 라노가 거침없이 지팡이를 걷어찼다.
“개수작 부리지 마. 늙다리 퇴물이라 하더라도 성구를 손에 쥐게 해줄 것 같아?”
암살자의 엄포에 노인의 입가가 비뚤어졌다.
“감이 좋구나. 이교도 계집아.”
주름진 목덜미에 핏방울이 맺혔다. 목에 돋은 솜털을 긁어내며 라노가 속삭였다.
“영감. 자꾸 얼마 남지도 않은 명줄 재촉하지 마. 난 중늙은이라도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는 방법을 많이 알거든?”
송곳니를 내보인 암살자는 턱을 까딱였다.
“또 까불어봐. 여생을 모기만도 못한 신세로 지내고 싶으면 말이야.”
“허허, 그것참 두려운 일이로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수도원장이 엉거주춤 발을 옮겼다. 암살자와 더불어 고해소로 들어간 수도원장은 천사가 그려진 성화 앞에 이르렀다.
“아버지, 저를 악으로부터 구하소서.”
그림이 들썩이더니, 나팔을 치켜든 천사가 고개를 비틀었다.
놀란 라노는 단검을 휘둘러 그림을 찢어발기려던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런, 씨발···! 이딴 게 교회에 왜 있어.”
천사의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수도원장은 이를 훔치며 태연히 중얼거렸다.
“눈에 바르게. 그렇지 않으면 눈이 마르고, 뇌가 녹아버릴 테니.”
라노는 영 꺼림칙한 표정으로 수도원장의 행동을 따라 했다.
“···성인이라고 떠받들더니, 무슨 악마라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광구의 빛은 육안으로 보기엔 눈부시지. 피조물들로 하여금 언제나 천상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평시엔 지상을 돌보도록 구주께서 안배하심이라.”
성화가 옆으로 젖혀졌다. 저편엔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나선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누구보다도 태양에 가까우신 분이니, 그 일면을 닮으셨을 수밖에.”
입술을 오므린 라노는 괜히 수도원장의 등을 쿡 찔렀다. 노인을 앞세운 채로 하염없이 바닥으로 향한다.
얼마나 눈부신 암흑 속에서 헤맸을까.
비로소 계단이 끝났다.
라노는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무수히 쏟아지는 시선들을 느꼈다.
‘···이런 걸, 왜 성지의 지하에.’
봉랍에서 피어오르는 향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라노의 시선이 빽빽하게 들어찬 쇠사슬에 묶인 사이, 수도원장은 고개를 숙인 채 양초를 밝혔다.
“안토니오 할아버지,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앙상하게 말라붙은 사내가 걸려 있었다. 이내 사내는 수염이 무성한 노인으로 돌변했다. 광채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머리가 벗겨진 건장한 청년으로 변했다가, 묘령의 여인으로, 종래에는 아이의 모습으로 일렁였다.
라노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어느새 공허한 눈두덩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 광채가 샛별처럼 명멸한다.
“잘 했다.”
겹겹이 울리는 음성에 라노의 몸이 휘청였다.
숨이 막힌 것처럼 들썩이던 암살자는 기어코 배를 틀어쥐었다.
“우욱.”
급기야 바닥에 엎드린 라노는 새카만 핏덩어리를 한 움큼 토했다. 시선만으로 육신이 무너지고 있다.
가만히 암살자를 들여다보던 이가 나직이 말했다.
“넌 화신의 긍지마저 저버리고 졸개로 전락했으니, 성결마저 얼마 얻지 못하겠구나.”
절그렁.
사슬에 묶여 있던 팔이 그녀를 가리켰다.
“그림자 뒤에 숨어있는 것아. 빛이 닿는 앞으로 걸어 나오라.”
사내의 호령에 꿈틀대던 암살자의 그림자로부터 홀연히 왜소한 인형이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던 형체가 빙긋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토드를 응시하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작 73이라니. 실망스럽군. 그만한 목숨을 던져줬다면 족히 80은 달성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그의 말을 헤아리던 사령술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이었군요.”
허덕이던 라노를 일으켜 세운 토드는 재차 눈 앞에 펼쳐진 글귀를 확인했다.
《 ‘HOST’, 안톤: Lv.101 교구장. 》
멀티 로비라면 처음 방을 개설한 장본인이 있으리라고 추측하긴 했다.
막연히 주최자가 신이나 더 고등한 존재라고 여겼었는데.
“우릴 이 땅에 초대해주신 감사한 분이.”
어쨌거나 토드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