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01
201
그토록 갈망하던 환상의 세계에 떨어졌다는 건 희대의 행운임이 틀림없다.
매달 생면부지의 아무개가 타간다는 로또 당첨금도 환상과 다를 바 없다지만, 적어도 신화와 전설이 생동하는 별천지에 떨어지는 건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하물며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것도 아니고,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은 어느 인디 게임사가 고전 RPG 게임들에 대한 향수를 집대성한 게임이었다.
평론가들은 독창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우며, 시리즈나 와 같은 명작들의 요소들을 저열하게 흉내 냈을 뿐인, 진부한 아류작에 지나지 않는다며 혹평했다.
전문가랍시고 거들먹대는 부류들의 평가가 늘 그렇듯이, , 속칭 ‘유클’은 당해 최고의 매출을 달성했다.
물론 경쟁 요소가 전무한 싱글 패키지 게임답게 세간의 관심이 식은 뒤에도 게임을 붙잡고 있는 건 향수에 젖은 중년층, 혹은 하드코어 RPG 팬보이를 자청하는 힙스터들이었다.
그는 후자에 해당했다.
유클은 인생 게임이었다.
얼리 엑세스 때부터 플레이하면서 게임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는 기상천외한 공략 글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커뮤니티에서 주목을 끌었다.
가령 힐러/탱커 직업군으로 설계된 성전사를 극딜 빌드로 육성하여 언데드들만 때려잡으며 레벨링 구간을 획기적으로 건너뛴다던가.
배경 문화가 상극인 제국에 투신하여 초반부터 내실을 다진 뒤 북부를 장악하는 ‘제국 앞잡이’ 공략.
수도승으로 일체의 살생 행위를 자제하고, 선업 수치만 극도로 파밍하여 레벨을 올리는 불살(不殺) 플레이.
이런 기행을 한두 해도 아니고 게시판에서 수년째 거듭하고 있으니 자연히 그는 유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유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비주류 클래스들의 희망, 진정 게임을 즐길 줄 아는 참게이머, 정식 출시 직후 게임사가 신성력 너프를 때리게 만든 악마의 재능이라는 등의 찬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100%를 달성한 인게임 업적과 별개로, 그의 현실 업적은 평균치를 밑돌았다. 그는 사회에서 이미 잊혀진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기억해주는 쪽에 더 몰두했다.
벌써 그가 달성한 만렙 캐릭터만 셋이었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남들이 외면하는 캐릭터를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RHANO]다른 세상으로의 초대장을 수락하는 절차가 신규 캐릭터를 생성하고, 엔터를 누르는 과정이었다면 절대 누르지 않았을 거다.
빠직.
눈을 떴을 땐 이미 축축하고 불결한 감옥 안이었고, 그는 여리여리한 체구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씨발, 실화냐.’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런 거지 같은 일이 벌어진 건진 알 길이 없다. 하물며 나보다 게임을 많이 한 놈도 수두룩했고, 더 극악의 컨셉을 잡은 놈들도 더러 있었는데.
「‘좀도둑’, 라노: Lv.1 암살자. 」
아무리 눈에 익은 세계라도 그는 혈혈단신이었으며, 여자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성가시고, 낯설었다. 게다가 경범죄자 신분으로 시작하는 암살자의 지랄 맞은 스타팅까지.
우습게도 암살자면서 누구 하나 죽이지 못하는 게 그의 현실이었다.
몸을 팔았다면 한결 진행이 수월했을지 모른다. 이 캐릭터를 만들 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진 몰라도, 용모는 그럭저럭 반반했으니까.
하물며 저지르지도 않은 절도 행각까지 덮어쓴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중세 랜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많지 않다.
1 레벨 암살자가 죽일 수 있는 상대라곤 약해빠진 현대인의 정신뿐.
그리고 이 가혹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가장 먼저 죽여야 하는 목표였다.
으득.
‘좆까라 그래.’
어떤 씹새끼가 이런 고약한 농간을 부렸는진 모른다. 다만 본래의 육신을 잃었을지언정 절대 영혼만은 내어주지 않으리라.
매춘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있다거나 비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사내새끼들의 손을 허락했다간, 마지막 남은 자신의 일면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서.
‘날 규정짓는 건, 오롯이 나야.’
라노의 주사위가 처음부터 높은 수만 나왔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암살자는 자신을 둘러싼 허물에 악착같이 저항했다.
‘난 남자야. 난 여기 잠시 갇혔을 뿐이라고.’
이 땅에서 그의 생애는 순종과 거리가 멀었다.
///
“···흐으, 그랬어도. 진짜 뒤지게 재수 없는 날이 있더라고.”
라노가 피를 뱉었다. 등에 걸친 사내를 들쳐메곤, 다시 힘겹게 발을 옮겼다.
“엉? 듣고 있어, 콘라트? 지금보다도 더, 개거지 같은 상황이었단 말이야. 그땐 온몸이 걸레짝이었다니깐. 그 중개인 새끼 이름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 슈미트! 그놈이 거짓 정보를 넘겼어.”
완연히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깜빡였다. 홍채와 반대로 새카만 공막은 짐승, 혹은 주변에 널브러진 마귀들을 연상케 했다.
“반대파 패거리 놈들이 내 무릎이랑 발목을 다 끊어놨었지. 그때 골목에서 백 명 넘게 쳐 죽였는데, 끝이 없더라. 거기서 꼼짝없이 돌림빵이나 당하고 매음굴에 던져지는 게 내 운명이었어.”
어깨를 들썩인 암살자는 온통 식은땀으로 얼룩진 사내의 볼을 쓸어올렸다.
“하필 거기서 호기심 많은 도련님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
미련한 새끼. 그러게 내가 흑마법사 놈들은 편리해도 끌어들이지 말자니깐. 핏덩이일 때나, 지금이나 저놈의 황소고집은 패 죽여도 꺾질 못하겠어.
라노는 연신 콘라트의 뺨을 두드렸다.
“···죽지 마. 콘라트. 황제가 되겠다며. 새끼야.”
대충 옷가지를 묶어놓은 옆구리가 축축했다. 악마들은 기어코 호위들을 찢어 죽이고 녀석을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콘라트는 라노 못지않게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노. 난 이미, ···글렀다.”
“글러 먹은 건 네 고집이고. 병사들로 충분하긴 무슨. 죄다 도망치기 바쁘더만.”
허덕인 콘라트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너라도 여길 빠져, 나가라. 놈이 와있지 않나. 지금이라도 내 몸뚱이는 태워서··· 놈이 손에 넣지 못하도록···.”
코웃음 친 암살자는 억척스럽게 시신으로 가득한 요새를 헤쳐나갔다. 대강 상황은 종료되었는지, 곳곳에서 시체들이 배회했다.
라노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하! 콘라트. 저거 보여? 시체들이 시체들을 나르고 있어. 장관이네.”
삽을 들고 땅을 파거나 수레를 옮기던 망자들이 작업을 하다말고 묘한 눈빛으로 라노를 응시했다. 입가를 씰룩인 암살자는 당당히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한가운데를 통과했다.
그녀를 목격한 파멸의 기사가 장검을 치켜들었다.
【하, 하! 하. 이게 누구신가. 그 좀도둑 계집이로군. 알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오신 건가?】
이미 바닥엔 성전사들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암살자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벌써 거나하게 해치웠네?”
성전사들을 심문하던 사령술사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걔넨 날 퇴치하러 콘라트가 부른 놈들이야. 아무리 족쳐봤자 네가 원하는 걸 캐내진 못할걸.”
젠장. 놈을 보니 겨우 잊고 있던 갈증이 치밀어 오른다. 애써 흡혈 충동을 억누른 암살자는 사령술사를 꼬나보며 말했다.
“내가 네 쫄따구 노릇이건, 갖고 놀 장난감 취급이든 간에 뭐든 해줄게.”
라노가 어깨에 매달린 콘라트를 가리켰다.
“이 녀석, 악마의 발톱에 당했어. 고위 성직자의 성사가 필요해. 저놈들이 놋그릇수도회 소속이라니, 돌려보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줘.”
암살자와 대공을 번갈아 보던 사령술사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흐음. 내심 계약 관계 이상일 거라 짐작하긴 했는데, 두 분이 꽤 돈독하신가 봅니다?”
씨익 웃은 라노는 콘라트를 가볍게 흔들어댔다.
“아무렴. 내가 남자만 아니었어도 진작 잡아먹었을걸. 얘랑 난 끈끈한 우정, 그 이상으로 맺어진 관계니까.”
이를 갈아붙인 콘라트가 미간을 구겼다.
“······라노!”
“확실히. 당신의 몰골로 보아 흡혈 욕구를 참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여기까지 끌고 온 걸 보면 당신의 기개나 자제력만큼은 가상하군요.”
문득 토드가 싸늘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런데 저번과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라노.”
망자들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사자의 무리가 라노와 콘라트를 빽빽이 에워쌌다.
사령기사들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각자 장검을 쥔 채 만반의 태세를 갖췄고, 측면에는 살점 거인이, 머리 위엔 유해룡이 활공한다. 더군다나 발밑에는 눈알 없는 유령들이 땅바닥 위로 반쯤 고개를 내민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석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참칭파의 전력은 전멸했고, 조금만 인내하면 어차피 당신은 제 손아귀에 떨어질 테죠.”
토드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협상을 제안한 위치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노는 입술을 훑었다.
“이 녀석들 소속, 못 들었어? 그 악명높은 놋그릇수도회잖아. 태양교단의 엑소시즘 스페셜리스트들이시지!”
싱글거리며 웃는 그와 달리, 가뜩이나 얼어붙어 있던 성전사들의 얼굴은 한층 생기가 날아갔다.
“쟤네 대가리가 누군진 알지?”
토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미 기젤에게서 그자의 동향은 전해 들었습니다. 제 흥미를 유발하기엔 다소 부족한데요.”
여전히 라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글쎄. 네가 걔에 대해서 뭘 아는진 몰라도, 콘라트는 대교구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아. 나에게도 일부를 귀띔해준 적 있거든? 게다가 너도 신경 쓰이잖아. 이 사달이 벌어졌는데도 태양교단이 잠잠한 게.”
무저갱의 준동. 반면 수상쩍을 정도로 고요한 교회의 동향. 성전사들을 심문해봤지만, 놋그릇수도회는 철저한 보안을 지키는 탓에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다.
“···더 말해보세요.”
라노는 콘라트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서부 대교구로선 이 녀석이 죽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이미 라이히슈타크에서 공공연히 지지를 표명했으니, 까딱 얘가 죽었다간 교단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릴 테고.”
낄낄거린 토드가 스산하게 속삭였다.
“이대로 대공이 죽으면, 전쟁도 깔끔하게 종결되고. 교단의 내부 구도도 정리되는데, 저로선 살려둘 까닭이 없어 보이는데요.”
“정말 얘가 뒤진다고 전쟁이 끝날 것 같아? 군대가 전멸하긴 했어도 아직 황소 대공령은 건재해. 카이저한테 반기를 든 제후들도 호락호락하게 항복하지 않으리란 건 알잖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구심점을 잃은 집단이 언제까지고 유지될진 의문이군요.”
라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악마들은 어떻게 하게? 넌 이 땅을 지키고 싶다며? 거기에 제국 도처에서 반란이 들끓고, 교회의 절반을 적으로 돌린 상태에서 싸울 수 있겠어?”
안광을 이글거린 파멸의 기사가 낮게 읊조렸다.
【토드, 하등 들어줄 가치도 없는 궤변일세. 그들이 전부 우리를 적대한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지 않은가? 결국엔 모두 우리의 군세에 합류할 테니 말이야.】
이에 클라우스가 머리뼈를 닦으며 조심스레 지적했다.
【헌데, 이스라 경. 스승님께선 삶과 죽음의 균형을 추구하십니다. 우리의 본질은 영가들에게 안식을 베풀고, 세상의 혼탁한 업을 바로잡는 것이지, 정복자로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훌륭한 모범 답안이다.
그간 제자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며 염습을 행하고, 진혼 의식을 주도한 보람이 있었다.
한때 아무렇지 않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흑마법사 출신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장이었다.
산시아 역시 동조했다.
“이미 이 땅엔 많은 피가 뿌려졌어요. 사상자들이 발생할수록 가뜩이나 기울어진 업의 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지겠죠. 그거야말로 무저갱의 존재들이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에요.”
수제자의 차분한 설명에 이스라가 건틀렛을 곱씹었다.
【끄응···! 그 불충한 놈들을 죽일수록, 악마들이 더 날뛴단 말인가.】
영 저 좀도둑 계집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스라가 씨부렁댔다.
【그럼 악마들도 죄다 처단하면 그만 아닌가? 기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전원 섬멸하는 것이다!】
콧물을 삼킨 살점 거인이 순박한 미소를 흘리며 지껄였다.
【헤헤, 대작은 좋다고 생각한다. 악마들 때린다! 하루 종일 때릴 수 있다! 왜냐면 대자악은 위대하니까!】
가만히 멈춰 서있던 아즈트룽엔까지 거들고 나섰다.
─본녀 역시 동의하노라. 악마 놈들··· 너무나 못생겼다! 그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이다.
네크로폴리스 중진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마르커스와 스트레이커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한 번 안톤을 만나보고 올게.”
의외의 제안에 토드의 눈썹이 까딱였다.
“당신이요?”
“어차피 저 녀석들도 복귀할 거 아냐. 놋그릇수도회 본부 어딘가에 유폐되었다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침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냐.”
그러자 반쯤 죽어가던 콘라트가 눈자위를 부릅떴다.
“안돼···! 그자와 대면하겠다니, 그건 자살만도 못한···”
라노는 단호히 콘라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내가 직접 그놈의 의중을 떠보지, 뭐. 듣기론 폐인 신세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배후에서 교단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던데.”
토드가 낮게 속삭였다.
“그곳은 서부 대교구의 심장부이니만큼, 적잖게 위험할 텐데요. 더욱이 당신은 신성이 미치는 곳에서 은신을 활용하지 못하잖습니까.”
자신만만하게 웃은 라노는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아, 그거. 혈족 능력 중엔 타인의 그림자에 의태하는 스킬도 있더라고. 적어도 침투하고, 복귀하는 것까지 문제없어.”
손을 떼어낸 암살자가 하수인들을 가리켰다.
“카타콤 때 눈치챘지만, 네 쫄따구들이랑 시야를 공유하잖아? 내가 피를 마시면 사실상 나를 대리인 삼아 안톤이랑 독대할 기회인데? 위험 부담은 전적으로 내가 지고. 넌 원격으로 안전하게 다른 플레이어를 떠볼 수 있고.”
토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톤이 살아있다는 게 확인된 시점에서 서부 대교구가 믿는 최후의 보험이 그라는 건 분명하다.
‘여태껏 만나본 화신들로 미루어보아, 생성 순서대로 이 세상에 떨어진 건 분명해.’
안톤은 최초의 화신이다.
오드람과 라노 외에 3번째 캐릭터인 수도승은 행방이 오리무중이었으나, 적어도 현시대의 실태에는 그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간 서부 대교구는 내게 적대적이었지만, 그는 유폐된 신세라고 했으니 의중이 별개일 수도 있어.’
성전사 안톤을 플레이했을 때 정했던 규칙.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
‘그가 교단의 방종도 용납할까? 이 세상에 악마들이 풀려나는 걸 방관하는 실태도?’
하지만 오드람의 경우엔 지나친 세월의 풍파 끝에 신념을 잃고 꺾여버렸다.
성전사로서의 생애를 살아온 안톤이 어떤 상태일지, 아직도 캐릭터 룰을 준수할진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신들이 지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태양신의 침묵은 너무 미심쩍어.’
설정상 화신들은 각 신들의 대전사.
누구보다도 솔마르와 직접적으로 맞닿은 안톤이라면 실마리가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레벨 99의 성전사가 합세한다면 무저갱과의 일전이 한층 수월해질 거란 건 자명한 일.
‘불확실성은 최대한 걷어내고 가는 게 나을지도.’
고민하던 토드는 손바닥을 긋곤, 라노를 향해 손짓했다.
“좋습니다. 이리 오세요.”
반신반의하던 암살자는 손바닥에 맺힌 핏방울을 보곤 침을 삼켰다. 조심스레 콘라트를 내려놓은 라노는 고양이 걸음으로 사뿐히 다가왔다.
“대공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앞으로 당신은 하수인으로서 절 섬기게 될 겁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떤 암살자는 굴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숙였다.
“···멋대로 해. 저 녀석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녀 앞에 주먹을 쥔 토드가 낮게 속삭였다.
“혀를 내밀어, 라노.”
똑, 똑.
비릿한 혈향. 끝에 가선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진정 괴물이 되면서 기호마저 뒤틀린 걸까.
통 햇빛을 안 봐서 그런지 손등에 돋은 혈관이 도드라진다.
‘이 망할 놈···.’
괜히 히죽히죽 웃고 있는 낯이 마음에 안 든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라노는 득달같이 토드의 손을 낚아챘다. 가볍게 손바닥을 깨물곤 게걸스레 혈액을 탐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이스라의 안광이 폭발했다.
【저, 저! 화냥년이!!】
양옆에서 마르커스와 스트레이커가 파멸의 기사를 뜯어말렸다. 어찌나 힘이 센지 주변의 백골 근위병들까지 몰려와 그녀를 붙잡아야만 했다.
입가를 떼어낸 흡혈귀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괜히 이상한 생각은 말어. 그간 네 새끼 때문에 시달린 게 며칠인데, 그깟 몇 방울 떨궈준다고 성에 찰 것 같아?”
확실히 갈증을 해소해서 그런지 라노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어렴풋이 희미한 홍조도 깃든 것 같았다.
어깨를 으쓱인 토드가 샐쭉 웃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요. 더 마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흠칫 어깨를 움츠린 라노는 그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꺼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