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승리를 향하여 (2)
1942년 8월 31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한편으론 이상하군. 왜 이제야 강화를 제안해 온 거지?”
“어디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자신들이 곧 전세를 역전할 수 있다고 자신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요.”
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아니고 왜 이제 서야 휴전을 타전해 온 건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전쟁을 끝낼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일단 만나서 얘기는 한 번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리벤트로프 장관, 소련이 날짜와 장소는 우리 마음대로 정해도 좋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날짜와 장소를 우리가 정하도록 한 것을 보면 소련은 진심으로 휴전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여유가 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장소는 당연히 독일로 해야 하지 않겠소? 날짜도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잡으시오. 9월 첫 주 안으로. 기왕 할 거면 빨리 만나는 게 좋을 듯하니.”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께선 정말로 볼셰비키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실 생각이십니까?”
괴링이 말했다. 소련의 회담 제의가 스탈린의 속임수라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소.”
“회담을 핑계로 저들이 회담 기간 휴전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경우엔 아군의 작전에 여러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그런 걱정은 마시오. 나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이 왜 없겠소? 휴전회담은 진행하되 전쟁은 계속할 거요.”
만약 괴링의 우려대로 스탈린이 휴전제의로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라면 엄청난 착각이다.
정말로 전쟁을 끝내자고 합의하지 않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전쟁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진격해 모스크바까지 가야 하는 아군 입장에서 휴전은 독이면 독이지 실이 될 게 하나도 없다.
고로 리벤트로프에겐 소련이 회담을 들먹이며 며칠간의 휴전을 요구하면 무조건 거절해두라고 일러뒀다.
그래도 일단 회담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소련에 무엇을 요구하면 좋을지 의논해야 했다.
처음 전쟁이 터졌을 무렵에는 드네프르 강 서부점령지에 대한 할양 정도로만 만족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아군이 이미 레닌그라드와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한 이상 드네프르 강 서부만을 요구하면 스탈린 입장에선 쾌재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할양받고 배상금을 받는 선에 끝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너무 관대한 조건이십니다, 총통 각하. 먼저 전쟁을 일으킨 건 소련이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제 생각도 괴링 원수와 같습니다.”
괴링, 괴벨스, 힘러 등은 내가 생각한 휴전 조건이 너무 관대하다며 반대를 표했다.
이게 너무 관대한 조건이라니, 대체 무슨 조건을 생각 중이길래 그러는 건지.
“이미 발트 3국과 벨라루스는 완전히 넘어온 상태고, 우크라이나 역시 한 달에서 두 달 뒤면 모두 아군의 수중 안으로 넘어올 것입니다. 따라서 카프카스까지는 받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괴링의 제안. 괴벨스는 여기에다 광물과 석유, 목재 등의 물자를 전쟁 전에 공급하던 양과 같은 양으로 독일에 무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로 붙였다.
힘러는 한술 더 떠 러시아 남부까지 할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힘러의 주장대로라면 소련은 흑해와 아조프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데 당연히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으므로 즉시 기각시켰다.
아무튼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고, 내 의견에는 오직 리벤트로프와 바이츠제커 정도만 동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우리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지 않소? 오히려 저들을 자극해 적의 항전 의지만 높이게 되는 불상사만 생길 수 있을 텐데.”
“총통 각하, 이번 기회에 다시는 소련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밟아주지 않으면 놈들은 분명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휴전을 제의해 온 것은 소련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먼저 협상을 타전해왔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상태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전쟁하래야 할 수 없는 상태이니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든 간에 저들은 우리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것입니다.”
“오히려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가는 독일도 사정이 좋지 않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습니다.”
으으음.
체급 상으로 한계가 있는 독일에 전쟁을 오래 끈다는 선택지는 너무 위험했다.
비록 지금 소련은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지만 역사에서도 소련은 더 큰 피해를 보고도 끝끝내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나치 독일을 멸망시켰다.
실제로 독소전쟁 중에 소련은 독일에 휴전을 여러 차례 제안했지만, 그때마다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만약 히틀러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을 조기에 끝냈다면 2차대전의 결말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달라졌겠지만, 소련을 멸망시키고 레벤스라움을 완성하겠다는 야욕에 눈이 먼 히틀러는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고, 이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괴링과 괴벨스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빵빵한 지원을 받으며 독일과 싸웠고 바쿠 유전도 전쟁 기간 내내 멀쩡했었다.
하지만 지금 소련은 랜드리스도 없을뿐더러 설상가상으로 기름까지 부족한 상태.
정말로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인지라 휴전을 타전해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괴벨스 말대로 여기서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간 오히려 적들이 전황을 오판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당장 전쟁을 끝내고 눈앞의 평화를 쟁취할 것이냐, 전쟁을 지속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래의 후환을 제거할 것이냐.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따르기로 했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소련에 전쟁을 일으킬 힘을 남겨두는 것도 상당히 위험했다.
차라리 전쟁을 조금 더 끄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소련이 다시는 독일에 덤비지 못하도록 확실히 물리적으로 거세시키는 게 독일과 유럽의 미래를 위해 이로운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막 전쟁을 끝냈다가 소련이 유럽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극동으로 눈을 돌린다면?
이 경우 생각지도 못했던 재난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될 바엔 모두의 말대로 소련이 전쟁 자체를 시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줘야지.
휴전회담만큼이나 신경 써야 할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레닌그라드 공략.
옛 러시아의 수도이자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이면서 발트해로 통하는 창구인 레닌그라드는 소련에서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도시였다.
레닌의 이름이 붙은, 이토록 중요한 도시가 함락시킨다면 소련에 정치, 군사적인 타격을 줌과 동시에 소련인들의 사기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었다.
그렇게 소련도 레닌그라드 방어에 상당한 공을 기울였다. 현재 도시는 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지만 레닌그라드의 방어가 워낙 견고한 탓에 아군은 진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의 독일군은 실제 역사와 달리 판터, 티거, 브룸베어 등 중전차들로 무장한 상태인데도 말이다.
허나 아군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레더 원수. 이번에도 기대해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총통 각하. 언제 해군이 총통 각하께 실망을 안겨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이번에도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듣는 사람에 따라선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레더의 발언에 공을 빼앗기게 된 육군 장군들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들 중에서 해군의 도움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레닌그라드의 조속한 함락을 위해선 해군의 지원이 꼭 필요했기에.
***
1942년 9월 1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서기장 동지, 독일이 제안에 응했습니다.”
예상대로 독일은 소련의 휴전제안에 반응을 보였다. 이걸로 1차 관문은 통과군. 스탈린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날짜와 장소는?”
“회담 장소는 브레슬라우, 날짜는 9월 6일입니다.”
역시 장소는 독일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애당초 소련이 먼저 날짜와 장소를 원하는 대로 잡아도 좋다고 말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날짜가 빠른 것은 다행이었다.
그만큼 독일도 소련과의 휴전회담에 진심이라는 방증이었으니까.
스탈린이 독일과의 휴전을 서두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디에프에서 연합군이 참패한 후의 일이었다.
믿었던 영국의 제2전선 형성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스탈린은 영국에 대한 희망을 접고 전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독일과 휴전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뱉어낼 게 하나라도 더 많을 때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소련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였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뒤로는 휴전회담 준비에 몰입했다.
소련이 독일과 휴전회담을 한다는 사실은 소련에서 스탈린과 몰로트프를 비롯해 극히 일부만 아는 극비였다.
휴전을 계획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군과 인민들의 사기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도 있거니와 스탈린 스스로 전쟁에서 진 것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스탈린은 휴전 계획을 극비에 부치고 평소처럼 장군들에게 독일군을 막을 대책을 세우라고 엄명을 내리면서, 뒤로는 측근들과 함께 독일에 어느 범위까지 양보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몰로토프 동무. 소비에트 연방의 운명이 그대에게 달려 있소. 이 점을 명심하고 회담에 의하시오.”
“예, 서기장 동지.”
스탈린은 으레 한 말이었지만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그냥 한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결연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몰로토프의 모습에 짜증이 난 스탈린은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1시간 뒤 회의가 잡혀있으니, 그때까진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었다.
몰로토프가 나가려는 찰나, NKVD 소령 한 명이 손에 전보를 들고 나타났다.
전보에 적힌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
1942년 9월 1일 시점에 소련 발트 함대는 사실상 전멸 판정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개전한 뒤로 발트 함대는 독일 해군에게 밀려 도망만 다니기 바빴다.
압도적인 전력의 독일 해군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에 교전은 최대한 회피하고 전력을 보존하는데 집중한다는 발트 함대의 전략은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도망만 치고 다니면 싸움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한심한 착각이었다.
독일 해군은 집요하고 꾸준하게 발트 함대를 사냥했다.
그나마 발트 함대에서 제대로 된 전력이었던 전함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와 마라는 독일 해군의 전설적인 유보트 에이스 귄터 프린에 의해 발트해 밑으로 가라앉았다.
겨우 남아있던 몇 대 안 되는 순양함과 구축함들도 독일 해군과 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부분 격침당하거나 손상을 입었고, 현재 발트 함대에 남은 전력은 몇 척의 어뢰정과 수리 중인 구축함 2척이 전부.
소련 해군이 공들여 건조 중인 차기 전함 소비에츠키 소유즈는 선체만 겨우 완성된 상태.
당연히 완성까지 한참 남은 전함을 전력으로 칠 수는 없는 노릇.
그런 그들이 레닌그라드 앞바다에 나타난 독일 해군의 대함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란 치타가 성체 코끼리를 사냥할 수 있는 것과 동급의 확률이었다.
독일 해군은 레닌그라드 공략을 위해 보유 중인 9척-도이칠란트급까지 합치면 12척-의 전함 중 3척의 전함을 동원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edrich der Große, 프리드리히 대왕)로 개명한 전 프랑스 해군 소속 리슐리외 전함, 38cm 주포로 업그레이드한 샤른호르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 최대의 전함 티르피츠.
도시 하나를 상대하는데 금쪽같은 전함을 3척이나 동원하는 건 낭비가 아니냐는 지적이 해군 내부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레닌그라드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기 위해선 고화력을 가진 전함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총통의 특명과 육군과 공군보다 활약할 기회가 드문 해군의 입지 강화를 위해선 크나큰 한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레더의 지시로 이들 3척의 전함은 레닌그라드로 보내졌다.
여기에 독일 해군 유일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셰어와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뜯어낸 르 아르디급 구축함 8척, 그리고 수송선들로 구성된 ‘발텐플로트 함대’가 레닌그라드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레닌그라드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3척의 전함과 아트미랄 셰어는 육중한 함포로 레닌그라드를 조준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항구에 정박 중인 발트 함대의 부스러기들.
“발사!”
슈투카의 공격으로 기관실과 함수에 손상을 입어 수리 중이던 2척의 구축함과 자잘한 어뢰정들은 전함들이 쏘아대는 38cm 함포탄을 막아내지 못했다.
코틀린 섬의 크론슈타트 항구에 정박한 발트 함대의 잔존함들이 모두 불길에 휩싸여 가라앉음으로 발트 함대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코틀린 섬의 해안포대들 역시 38cm 함포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해안포대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그들이 쏜 포탄은 전함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해안포대가 모두 침묵할 때까지 발텐플로트 함대는 해안포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탄을 쏟아부었다.
페니키에서 출격한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도 코틀린 섬 공격에 동참했다.
해안포대까지 모두 정리한 발텐플로트 함대는 코틀린 섬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섬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
“이제 우리 차례다!”
“나가자! 가서 본때를 보여주자!”
수송선과 개조한 포경선에 꽉꽉 들어찬 육군과 해군육전대 병사들은 육지에 발을 내딛는 즉시 마구 날뛰며 포격과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코틀린 섬을 헤집고 다녔다.
수송선에 실려 코틀린 섬에 상륙한 헷처도 보병들과 함께 이동하며 화력을 지원했다.
독일군의 상륙에 대비해 소련군은 코틀린 섬에 전차와 장갑차를 15대나 배치했다.
섬의 크기에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로 코틀린 섬의 중요성을 감안한 조치였지만 안타깝게도 섬에 배치된 기갑차량들은 T-26, BA-20처럼 이미 퇴물 취급을 받는 물건들이었다.
도로를 따라 달려오던 T-26 6대는 헷처 한 대를 만나 꼼짝없이 전멸당했다.
T-26의 45mm 주포는 헷처의 전면장갑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고, 헷처의 75mm 철갑탄은 T-26의 얇은 장갑을 앞뒤로 관통해 뒤에 있는 차량까지 격파했다.
해가 저물 무렵, 코틀린 섬은 완전히 독일군 수중에 떨어졌다.
***
“코틀린 섬에 독일군이 상륙?”
“그렇습니다. 현재 섬 수비대와 교전 중입니다마는 전력이 전력인지라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 레오니트 고보로프 중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레닌그라드를 지키는 성벽 역할을 하는 코틀린 섬에 독일군이 상륙했다는 것은 곧 코틀린 섬의 함락을 의미했고, 코틀린 섬의 함락은 레닌그라드가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보로프와 회의 중이던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 티모셴코와 바실렙스키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 내일쯤이면 독일 파쇼들의 군대가 레닌그라드에도 상륙할 것이다.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모든 육로가 봉쇄된 관계로 외부로부터 물자를 들여올 수 없게 된 도시에 남아있는 물자만으로 독일군의 봉쇄가 풀릴 때까지 버텨야 했다.
탄약은 넉넉하게 남아있지만, 문제는 식량이었다.
사람은 먹어야 싸울 수 있었기에 티모셴코와 바실렙스키는 식량의 배급문제를 두고 토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토의가 무의미해졌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식량을 모두 다 소모하기도 전에 도시가 함락될 판국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