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78)
대주교 에스델
* * *
지금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으려면 단연 황혼일 것이다.
세상에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이 괴물은 악마를 굴복시키고, 이레네를 무너트렸으며, 하늘의 신들을 떨어트리기 위해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혼 외의 인물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이는 누구일까?
황제?
군단장?
아니었다.
“에스델 성하. 동쪽에서 올라온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성하(聖下).
에스델은 그 호칭이 낯설었다.
온 교단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대주교에게나 붙는 호칭 아닌가.
인간 중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인물.
그게 지금의 에스델이었다.
“후우.”
에스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모든 원흉은 오르단이었다.
이레네가 무너질 당시.
오르단은 성기사와 실력 있는 사제들에게 성 밖의 교도들을 지켜달라 부탁했고, 그들은 용맹히 성 밖을 나섰다가 황혼의 군세에 휩쓸렸다.
그사이.
오르단은 미리 준비한 대로 거사를 치렀다.
미리 준비한 동지들과 칼을 빼들었고, 교단의 모든 사제를 살해했다.
고위급 사제가 떼 몰살을 당했고, 그 안에는 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데일이 개입해 오르단을 막아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고급 인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교단은 혼란에 휩싸였다.
황혼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반격해야 할 교도들은 우왕좌왕했고, 타지에 나가 있던 하급 사제들은 어쩔 줄 몰라 눈치나 살폈다.
누군가가 그들을 규합해야 했다.
그리고 그럴만한 사람은…… 에스델이 유일했다.
에스델은 팔에 걸린 성물을 쓰다듬었다.
신성이 무한하게 솟아나는 강력한 성물.
이 성물은 그 자체로 에스델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증거가 되었으며, 강한 권위가 되었다.
대주교.
성녀.
마지막 희망.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스델은 그 칭호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이곳 엘드리엄으로 점점 더 많은 교도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임무에 나섰던 성기사 엘리 경이 돌아왔습니다. 즉시 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약탈당했던 성물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영웅들의 자취를 찾는 일은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에스델은 끝없이 밀려드는 보고를 들었다.
엘드리엄을 선택한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로 삼을 생각이다.
황혼이 교단을 무너트리려는 지금. 신앙인들이 모여들 구심점은 중요하다.
서쪽은 너무 고립되어 있다.
남쪽은 낙후되었고, 동쪽은 너무 혼란스럽다.
수비에도 적합한 이곳 북부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는 제격이었다.
흩어졌던 교도들이 엘드리엄으로 몰려들었다.
개중에 전투 능력이 있는 성기사나 사제는 곧장 병력으로 활용했다.
에스델은 그 병력을 활용해 엘드리엄의 성주와 협력해 이곳 북부 일대의 치안을 필사적으로 유지했다.
덕분에 북부는 다른 어느 곳보다 황혼의 세력이 약했다.
하지만 순조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황혼이 점점 더 탑을 쌓아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 늦어 버릴 겁니다. 머지않아 힘을 모아 치고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겠군요.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성하. 대륙의 모든 인간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저지해야 합니다. 부디 사사로운 일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목숨이 사사롭다니.
에스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때마다 에스델은 끔찍한 책임감과 중압감에 짓눌렸다.
공격 명령을 하는 건 좋다.
하지만 병사들이 죽으면 그 누가 책임져 주나.
그 병사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신이 돌봐주실까?
정말로?
참으로 불경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오르단이 에스델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못된 씨앗이, 제멋대로 발아해버리고 만 모양이다.
에스델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이레네로 밀고 내려가야 해요. 하켄 사령관이 어서 악마의 군세를 깨트려주길 바라야겠군요.”
“예…….”
“형제님들. 이만 모두 나가주세요.”
누가 감히 대주교의 말에 반대할까.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 사제들이 자리를 떴다.
누구 하나 살갑게 웃으면서 인사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가볍게 농담이라도 건네주면 좋으련만.
살갑게 식사 권유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이 자리에 오른 뒤로 사람들은 두 가지 표정만을 지었다. 딱딱하거나, 절박하거나.
에스델은 그게 싫었다.
“푸흡. 사령관 하켄이라니.”
그래도 하켄의 이름을 들으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얼빠진 용병이 모두의 칭송을 받고 있다니.
편지를 통해 내막을 전해들은 에스델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하켄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이레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자기를 친언니처럼 따르던 엘레나나, 요리 솜씨가 좋았던 카일라.
그리고.
“데일 경.”
에스델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흑기사는 이제 없다.
하켄은 반드시 살아있노라 여겼지만, 데일은 틀림없이 죽었다.
그리고 에스델은 많은 걸 깨달았다.
그토록 강건해 보이던 데일 역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에스델이 데일에게 참으로 많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데일이 사라진 마음속 빈자리가 생각보다 더 시리다는 것을.
에스델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이미 1년이 더 넘었건만.
이렇게 가끔 찌르르 가슴을 울리곤 헸다.
에스델은 눈가를 감췄다.
주저앉고는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약한 모습도 보여선 안 된다.
그녀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데일이 지키려던 모든 것들을 에스델이 지켜야 한다. 그의 의지를 그녀가 계승해야 한다.
하지만 에스델은 약하다.
더더욱 강해져야 한다.
에스델은 품에서 검을 꺼냈다.
바이만의 보물고에서 받아온 투박한 모양의 검.
본디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던 검은 데일이 죽고 얼마 후. 너무나 손쉽게 검집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네 마음이 문제였다.’라고 말하듯.
에스델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기세를 눈에 담은 뒤,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제 곧 모든 걸 건 대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대륙의 최후가 결정나겠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에스델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진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릴 수 있을까?
그렇게 에스델이 막막한 답답함에 감싸여 있을 때 돌연.
사제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 크, 큰일났습니다 성하!”
“진정하세요. 무슨 일이죠?”
“검은 사신. 검은 사신이 부활해 유령선단을 부리며 이곳을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검은 사신?”
언데드 군세를 이끌며 온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흑기사의 별명.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데일과 호각으로 싸우던 그 흑기사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에스델은 엘드리엄 성주와 다른 군사 참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급히 향했다.
“성하. 오셨습니까.”
“검은 사신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그게. 검은 사신은 죽었지 않습니까.”
검은 사신과의 전투에 에스델뿐만 아니라 엘드리엄 성주도 참전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성주는 오른팔을 잃기도 했고.
“정찰병들의 보고일 뿐입니다. 엘드리엄에서 하루 거리에서 흑기사가 언데드를 이끌고 오는 게 목격되었다는군요.”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알아차리다니. 대체 무슨…….”
“면목이 없습니다. 놈이 워낙 예상치 못한 경로로 왔던지라.”
검은 사신 토벌 이후.
성주는 용뼈 산맥 인근에 여러 초소를 두어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방지했다.
문제는 저 흑기사가 나타난 장소다.
“북쪽 바다 쪽으로 왔더군요.”
“……그게 말이 됩니까?”
“글쎄. 저도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어쨌건 사실은 사실입니다.”
해양 몬스터가 육지로 올라오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렇기에 바다 쪽에는 그다지 감시의 눈길을 두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줄이야.
“그들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그때처럼 수천의 언데드를 부리고 있나요?”
“음. 아직 정확한 보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 3척을 거동하고 다닌다는군요.”
“쯧!”
“배가 3척이라니.”
“이곳도 위험한 거 아닌가?”
참모들은 하늘을 나는 배에 대해 웅성거렸다.
아무리 높고 단단한 성벽이라도 거뜬히 넘어버리는 거 아닌가?
언데드 놈들이 작정한다면 이 북부 일대에 다시 한번 끔찍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일단 배를 요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집결시켰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지금 그들이 어딨죠? 계속 움직이고 있나요?”
“병사들이 막아서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멈춰 섰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대치하고 있습니다.”
에스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갈게요.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처리한다니…….”
“이미 검은 사신도 토벌한 적이 있어요. 뛰어난 전사들을 몇 명이 잠시만 시간을 끌어준다면, 제가 소멸시켜 보이겠어요.”
성주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다 성하가 다치기라도 하면, 제가 신실한 교도들한테 맞아죽습니다.”
“안 다쳐요. 목만 안 잘리면 치료하면 되고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주는 말리려 했지만, 에스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지면 에스델이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다.
뒤에서 명령이나 내리는 자보다는 직접 싸움에 임하는 전사가 병사들에게 더 존경을 사지 않을까?
에스델은 데일이 하던 그대로 사람들을 이끌 생각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엘프 전사 몇을 붙여드리죠.”
“바로 가죠. 말을 준비해주세요.”
“하다못해 마차를…… 아니. 됐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성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데일은 꽤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엘드리엄을 향해 똑바로 진군했다.
그 과정에서 병사나 주민들을 만나면, 엘드리엄에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격렬했다.
“검은 사신이다!”
“도망쳐!!!!”
“흑. 흐흑. 죽고 싶지 않아.”
PTSD라고 해야 할까?
이미 검은 사신에게 끔찍한 경험을 해본 주민들은 줄행랑을 쳤다.
그들의 공포를 부채질하는 데에는 밴쉬들도 한몫했다.
“키히히히! 도망쳐라 머저리들아!”
“확 몸을 뺏어버릴라!”
언데드답게 머리 한구석에 나사가 빠진 밴쉬들은 인간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즐겼다.
인간이 내뿜는 공포의 감정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던가?
결국.
데일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네 자매들한테 괜스레 겁을 주지 말라고 해라.”
“왜?”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어쨌거나 거침없이 진군하던 데일 군단은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맞닥뜨렸다.
병사들은 비장한 기세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또 한 번 검은 사신이 우리의 터전을 짓밟으려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시간을 번다. 성하께서 지원군을 보낼 때까지, 이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설령 우리는 이곳에서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만은 지켜내야 한다!!!”
“우와아아아!!”
필사의 각오.
지휘관으로 보이는 엘프 전사의 연설에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싸울 생각이 없던 데일은 오해를 풀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검은 사신이 아니다!”
“현혹되지 마라! 검은 사신은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나는 데일이라고 하며, 싸울 의사가 없다!”
“봐라! 저 잔악한 무리는 이미 죽은 영웅의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
“우우우! 쓰레기 같은 놈!”
“네가 정말 데일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데일 맞다고!”
“모두 귀 막아! 사악한 언데드가 계속해서 현혹하려 든다!”
저들은 간악한 흑기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었다.
데일이 뭐라 외쳐대도, 이제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무시할 뿐.
야가브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냥 죽이자. 그게 편하잖아?”
“그랬다가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다.”
한 명이라도 죽였다가는 데일의 처지가 곤란해진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대치가 길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저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
“성하가 왔다!”
“이제 살았어!”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누군가 새하얀 말을 타고 나왔다.
전신을 판금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체형을 보니 남자보다는 여자에 가까워 보였다.
‘성기사인가?’
갑옷을 입은 여인은 검을 하늘에 뽑아들고 무어라 연설했고, 병사들은 다시 환호했다.
이윽고.
여인은 말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성큼 걸어왔다. 그녀의 곁에는 엘프 전사들이 호위로 붙었다.
데일은 부하들에게 멈춰 있으라 명한 뒤.
홀로 앞서 나갔다.
이제 여인과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다.
여인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언데드를 이끌고 선량한 사람들을 핍박하는 악한. 살인자. 도적. 악의 무리여, 여신이 제게 부여하신 거룩한 명에 따라 제가 당신의 사지를 산산조각내…… 이 땅의 거름으로…….”
여인이 우뚝 멈췄다.
데일도 투구를 울리는 그 목소리가 낯이 익어, 입을 열었다.
“에스델?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이 좀 심하군. 말투도 거칠어졌고. 엘프들이랑 어울려서 그런가?”
“……데일 경?”
에스델이 검을 툭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