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73)
의식
* * *
왼발을 오른발의 뒤로 옮겨 반 회전. 오른발을 다시 왼발의 뒤로 옮겨 또다시 절반을 회전.
익숙하지 않았던 동작은 놀랄 만큼 빠르게 숙달되었다. 데일은 마치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데일의 몸을 따라 검이 원을 그리고, 원에 닿은 쥐 떼는 그대로 핏덩이가 되었다.
데일은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학살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칼날의 폭풍이 지하수로를 휩쓸었다.
그 앞에 어떤 저항은 의미 없었다.
쥐 떼의 숫자도 별 의미는 되지 못했다.
데일이 지나간 곳에는 오로지 흉측한 쥐 사체와 널브러진 뼛조각들. 몸 어디가 잘려나가 숨을 깔딱이는 쥐밖에 남지 않았다.
“찌익…….”
쥐 떼도 주춤했다.
두려움이 없는 이 괴물들의 머릿속에도 생존 본능이 잠들어 있었다.
그 본능이 저 폭풍을 보며 깨어나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기분 탓일까?
데일이 회전하며 이동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쥐 떼는 주춤했다. 하지만 놈들에게 후퇴라는 선택지는 없다.
이내 전의를 되살린 쥐 떼는 마치 불꽃에 달려드는 벌레마냥 맹목적으로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시체 더미의 일부가 되었다.
단단한 갑옷을 입었거나 가죽이 더 질겼다면. 그랬다면 이런 육탄 돌격이 데일의 전진을 더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믿을 건 숫자밖에 없는 쥐 떼에게 남은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몰살.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이제 지하수로에 살아 움직이는 쥐는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말이다.
대를 이어 번식하고 덩치를 불리던 쥐 떼는 오늘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카엘름 성의 주민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데일은 그제야 회전하는 걸 멈췄다. 검을 땅에 짚고, 고개를 돌려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았다.
빼곡히 쌓인 쥐의 사체가 못해도 축구장 길이만큼 쭉 이어져 있었다.
학살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
데일은 자기가 이룩해낸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게임에서나 볼법한 기술을 실전에서 구현해내다니. 묘한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데일은 에스델과 페일에게 돌아가며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안개는 쥐 사체에서 생기를 흡수해 데일에게 전해주었다.
쥐 하나하나의 생기는 보잘것없지만, 그것도 수가 많이 쌓이니 제법 많은 양이 되었다.
에스델과 페일은 그런 데일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그건 대체…….”
“무기를 들고 빙글빙글 돈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식입니다.”
에스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지럽지는 않습니까? 멀미가 난다거나.”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
“으음. 그, 그건 다행이군요.”
데일이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무위에 페일과 에스델이 어벙하게 있던 그때였다.
우르릉.
지하수로가 한차례 진동했다. 바닥에 고인 오물이 출렁이고, 오래된 벽에서는 부스러기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진동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공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페일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작된 모양이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래.”
일단 길을 옳게 찾아왔다는 건 확실해졌으니, 셋은 걸음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쥐 떼 이후로 다른 습격은 없었다.
데일은 주위에 흐르는 기분 나쁜 분위기를 감지하며 생각했다.
‘점점 놈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근처까지 다다랐다. 이제 그 곱사등이를 죽이고 놈이 벌이려는 의식을 막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데일은 우뚝 멈춰서야 했다.
두 가지 길이 합쳐지는 길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했다.
페일이 입을 열었다.
“……탈로스 님?”
만신창이가 된 탈로스가 이단 심문관 셋을 뒤에 대동하고 서 있었다.
당황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일? 갑자기 사라지더니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아니, 그보다 왜 이 자와 함께 있는 겁니까. 설마, 이교도에게 협력한 건 아니겠죠?”
탈로스가 눈을 희번떡 뜨자 페일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데일이 물었다.
“한가하게 얘기할 때가 아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나?”
탈로스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대답했다.
“악마 숭배자 놈들이 저주받을 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그냥 의식이 아니다. 가니아고스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상을 벗어나는 이야기에 탈로스 역시 굳어버렸다.
“가니아고스는 분명……. 죽은 악마를 되살린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말이 된다면? 그 정도의 의식이 아니라면 성의 주민들을 모조리 산제물로 사용할 것 같나?”
“…….”
탈로스는 고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역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데일의 주장이 진실에 닿아 있다는 걸. 다만, 선뜻 인정하기 힘들 뿐이었다.
대화가 끊기자, 눈치를 보던 페일이 물었다.
“탈로스 님도 이변을 눈치채고 곧바로 오신 겁니까.”
탈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으로 나오니 주민들이 모두 홀려 있고, 그 주민들을 따라가니 웬 구멍이 나오더군요. 그 안으로 들어왔더니 이런 곳이었습니다.”
“다른 심문관님들은 어딨습니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 수로는 공간이 왜곡된 모양이라 말이죠.”
탈로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의 심문관들을 가리켰다.
“수로를 헤매다가 몇몇 형제들과 조우하고, 쥐 떼와 싸우다 보니 이곳까지 당도했습니다.”
“아. 탈로스 님도 쥐 떼와 싸우셨군요.”
“도? 에스델 자매도 쥐 떼와 싸운 겁니까?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요.”
에스델과 페일은 어색한 표정으로 데일을 쳐다봤다.
데일 혼자서 쥐 떼를 전부 갈아버렸다는 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데일이 입을 열어 그런 분위기를 환기했다.
“한가하게 잡담할 시간은 없다. 당장 가서 부활을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악마의 부활은…….”
탈로스의 말을 끊고 페일이 말했다.
“꼭 악마의 부활이 아니라도, 어떤 의식이든 미리 막는 게 좋습니다.”
에스델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은 협력해야 할 때입니다.”
탈로스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데일을 흘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만입니다.”
이단 심문관이 합류하면서 일행이 7명으로 늘었다.
탈로스와 다른 이단 심문관들은 데일과 협력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이런 상황에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일행은 지하수로를 빠르게 주파했다.
더는 쥐 떼도, 악마 숭배자도, 막아서는 적도 없었다.
“아. 저긴.”
한참을 걷던 에스델이 저 앞을 가리켰다.
통로의 끝이 보였다. 통로가 끝나는 곳에 음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불길한 냄새가 풍겼다.
각자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무기를 꼬나쥐었다.
“앞장서겠다.”
데일은 검을 쥔 채 신중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긴…….’
공동이었다. 대체 지하에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지 모를 거대한 반구형의 공동.
그런 공동에는 넋을 잃은 주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발목 언저리까지 고여 있었는데, 그 피의 새빨간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글자는 너무 작고, 검고, 빼곡하여 마치 자그마한 벌레 떼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름 끼치는 광경.
의식에 여념이 없는지 공동의 중앙에서는 곱사등이가 무언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다른 악마 숭배자들이 호위했다.
그러던 와중.
일행이 공동에 들어서자 한순간 숭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작업에 열중하던 곱사등이도 고개를 들었다.
“오호. 늦지 않게 와주셨군요. 한데 이상하군요. 여전히 뒤에 혹을 붙이고 계시다니. 분명 선물을 보내드렸을 텐데?”
데일이 물었다.
“쥐 떼를 말하는 거라면 전부 죽였다.”
“으흠?”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곱사등이는 곤란함이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피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으려나요.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으니. 이제 재료는 모두 모였으니,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곱사등이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피에 새겨져 있던 문자가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민들은 일제히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끄. 끄아아!”
“아악!”
의식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힘이 곱사등이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막아야 합니다!”
“예!”
탈로스와 이단 심문관들이 곧바로 곱사등이를 막으려 했다.
의식을 주관하는 곱사등이만 방해한다면, 의식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가면을 쓴 숭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공간의 특성상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기는 힘들지만,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데일과 에스델, 그리고 페일도 싸움에 합류했지만, 저항이 거셌다.
계획의 막바지에 이른 만큼, 숭배자들은 목숨을 던져가며 막아냈다.
그런 주위의 혼란과는 별개로.
곱사등이는 미약하게 콧노래마저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이 상황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문자에서 뿜어지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주민들의 비명도 더 커졌다.
그들의 모습은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수척해져가고 있었다. 생기가 빨리고 있었다.
동시에 기분 나쁜 기운이 온 공간을 가득 메웠다.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이제 탈로스는 본능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가 이 세상에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든.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의식을 막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탈로스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방안을 찾아냈다. 그 섬뜩한 눈길이 향한 곳은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주민들이었다.
스릉.
그는 법복 아래에 감춰두었던 한 손 검을 꺼냈다.
탈로스의 검 끝은 곱사등이를 향하는 대신, 고통스러워하는 주민에게 향했다.
그 모습을 에스델이 보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외쳤다.
“자, 잠깐. 탈로스 형제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탈로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대의를 위해 다소의 희생은 감수해야 합니다. 이들을 제물로 써 악마를 소환할 생각이라면, 그 전에 모두 죽여서 제물로서의 가치를 없애면 될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에스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전. 하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단 심문관이 악마 숭배자로 의심되는 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렸다는 흉측한 이야기.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다.
에스델은 교단의 형제자매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이야기가 지금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탈로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들 역시 악마의 제물이 되어 고통받느니, 차라리 안락한 죽음을 원할 겁니다. 보세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탈로스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대로 내려치려는 찰나.
턱!
누군가 그런 탈로스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탈로스는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흑기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데일은 아래 있는 주민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탈로스가 베려던 건 아까 중년 여성이 도와달라 부탁했던 노인이다.
데일은 덤덤히 말했다.
“약속을 했다.”
“무슨 바보 같은……. 시간이 없다!”
다급하게 곱사등이를 쳐다본 탈로스가 다시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알 텐데! 이제 이 방법 외에는 없어! 어서 이 손 놔!”
하지만 데일은 놔주지 않았다.
악마를 막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다니. 그럴 수는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언데드라면 몰라도,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데일은 조부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데일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 남아왔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는 제물을 죽여봤자 별 의미 없다. 이미 늦기도 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의식이 완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곱사등이가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완성!”
피에 새겨진 문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거세져 온 공간을 메웠다.
불온한 기운이 곱사등이를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지금. 이 카엘름 성의 오래된 지하수로에서 죽은 악마가 부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