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19
◈ 619. [Side Story] 마지막 축제 (9)
쥬니어의 방.
헤카테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쥬니어는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고, 헤카테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만큼의 정신적 여력도 없었다.
“…….”
고서(古書) 냄새가 풍기는 마법사의 방 입구에 서서, 헤카테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들이 그득했는데, 마법서 뿐만이 아니라…….
‘……역사서?’
오래된 역사책들 또한 잔뜩 쌓여 있었다.
그때 다가온 쥬니어가 로브를 건넸다.
“저, 일단 이거라도…… 걸치실래요?”
잠시 뒤, 로브를 몸에 두른 헤카테는 쥬니어와 좁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쥬니어는 허둥거리며 음료병을 집어 들었다.
“뭐라도 좀 마시시겠어요? 그게, 건강 음료뿐이지만…….”
헤카테는 거절하지 않았다. 쥬니어는 방에 있던 유일한 음료- 토마토와 시금치 배합 건강즙을 컵에 담아 건넸다.
“차,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맛이 괴악할 텐데도 헤카테는 꼴깍꼴깍 잘 마셨다. 음료를 건넨 입장이지만 쥬니어는 내심 ‘이 사람 비위 좋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고마워요.”
어색한 침묵 뒤에 헤카테가 입을 열었다. 쥬니어는 한 박자 늦게 네? 라고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요.”
“아…… 아뇨,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저 같은 것에게 이렇게 친절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실 필요 없잖아요. 헤카테 님은 대단하신 분이고…….”
“…….”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집어넣은 헤카테는 창밖을 보았다.
“크로스로드는, 축제가 자주 열리나요?”
“음, 아니에요. 그나마 들뜨는 건 1년에 두 번 정도예요. 가을 축제하고 신년 행사.”
“그렇군요…….”
“황도…… 뉴 테라에서는 축제가 자주 열리죠?”
“네. 자주 있어요. 정작 뉴 테라 토박이인 저는 잘 안 갔지만.”
쥬니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헤카테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주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축제에 데려가 줄 사람이 없다 보니. 어릴 때는 늘 멀리서 구경만 했어요.”
“죄, 죄송해요. 제가 괜히…….”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민감한 이야기를 해서…….”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쩔 줄 몰라서 쥬니어가 눈을 좌우로 홱홱 굴리는데, 헤카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은 군인이셨는데, 사고에 휘말려 돌아가셨어요.”
“그랬군요…….”
“친척도 없었던 저는 천애 고아가 되었고…… 그리고 폐하께서 거둬주셨어요.”
쥬니어는 눈을 깜빡였다.
헤카테는 멍한 눈으로 두서없이 쏟아냈다.
“황실에서 운영하는, 참전용사들의 자식들을 키워주는 보육 시설이 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자랐어요.”
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헤카테의 얼굴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폐하께서는 그곳에 정기적으로 왕림하셔서, 저희를 북돋아 주셨어요. ‘너희의 부모에게 나는 목숨을 빚졌다, 그러니 너희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며…… 저희를 하나하나 쓰다듬어주셨죠.”
헤카테는 눈을 감고 그날을 회상했다.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게, 그분의 다정한 손길이야말로 구원이었어요.”
“…….”
“저희 같은 어리고 작은 것들마저 손수 챙겨 주시는…… 그런 군주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쥬니어에게, 그녀를 거두어준 쥬피터가 어머니였듯이.
헤카테에게 있어서는, 그녀를 거두어준 황제가…… 아버지였던 것이다.
뜨인 헤카테의 붉은 눈동자가 손에 들린 머그컵의 내용물로 향했다.
“저는 에버블랙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어릴 적부터 결심했고, 검에 재능이 있어서 황실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폐하를 지키는 글로리 나이츠에 입단하는 게 제 꿈이었고, 그렇게 되었죠.”
“…….”
“폐하와 함께 전장에 서게 되었어요. 폐하께서는 저희를 신용해주셨어요. 이런 몸이 되고 끔찍한 고통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지’하리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웠어요.”
헤카테의 붕대에 휘감긴 손이 머그컵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전선은 이제 평화 협정을 맺었어요.”
“…….”
“알고 있어요. 무기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돼요. 하지만, 당혹스러울 수밖에요. 저는 제국을 위해 이종족의 신들을 막아냈어요. 수도 없이 죽어 가면서요. 하지만 이제 이종족도 우리 편이라고 해요.”
쥬니어는 가만히 헤카테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가 이런 몸이 되어가면서까지 해온 전투는, 제가 바친 인생은,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헤카테의 눈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삶이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옛 친구들을 보려고 이곳에 왔어요. 제 이런 몸을 보고 모두 놀랐지만…… 사실 더 놀란 건 저예요.”
“…….”
“친위기사단으로서 경계해온, 그 모든 변경의 적들이…… 이 도시에서 하나의 군대로 뭉쳐 있더군요. 여차하면 제가 파견되어 목을 베었어야 할 그 모든 리스트의 군주들이 태연하게 축제를 즐기며 함께 웃고 있어요.”
헤카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제야 깨달았죠. 이 세상에서 잘못된 건 바로 저라고.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건 제국의 악령인 제 쪽이었다고.”
“…….”
“제국을 위해 기꺼이 저주를 받아들이고 괴물이 되었는데, 그 모든 일이 허사였고…… 세상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네요.”
그녀의 넋두리를 쥬니어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이런 괴물의 몸으로는 옛 친구들에게 다시 다가갈 수도 없어요. 이런 악령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축제를 온전히 즐길 수도 없어요.”
헤카테는 씁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기사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제 삶은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어요. 너덜너덜하네요. 모든 게. 이 붕대 안의 제 몸처럼.”
“…….”
“결국 제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쥬니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헤카테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혼자 갑자기 북받쳐서, 멋대로 막 이야기 토해내고.”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러니까, 음, 저도 조금은 이해한다고 해야 하려나…….”
먼지처럼 적막이 내려앉고, 멀리서 축제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는데…….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쥬니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뒤이어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쥬니어 님. 계십니까? 저 루카스입니다.”
“루, 루, 루카스 경?! 여기에는 어쩐 일로……?”
“헤카테를 찾아왔는데, 방에 없더군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보셨나 해서…….”
“아! 헤카테 님이라면 여기…….”
웃으며 말하던 쥬니어가 뒤를 돌아보자,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헤카테가 보였다. 쥬니어는 더듬거리며 말을 마무리했다.
“……여기 없, 는데요.”
“거기 있나 보군요.”
왜 이럴 때는 눈치가 좋은 거야! 이 선택적 눈새 기사 녀석!
속으로 되뇌며 쥬니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치가 없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이 아가씨를 숨겨줬어야지, 뭐하는 거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나와 달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
헤카테는 긴 한숨을 뱉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겁지겁 같이 일어선 쥬니어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오, 오, 옷! 옷 빌려드릴게요! 잠시만요?!”
직후 옷장을 열어젖힌 쥬니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부 똑같이 생긴 마법사 로브뿐이었다. 쥬니어는 절규했다.
“으아아아! 마땅한 게 없잖아, 젠장!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내 패션 센스!”
“……괜찮아요.”
헤카테는 쓰게 웃으며 문으로 향했다.
“이미 추악한 내면을 모두 들켰는데, 아무리 치장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헤, 헤카테 님!”
“로브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잘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예를 차려 보인 헤카테는 방문을 열었다.
“…….”
“…….”
기다리고 있던 루카스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두 기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복도를 걸어 나갔다.
“…….”
창문을 통해서, 멀어지는 두 기사의 뒷모습을 살피다가.
“우와아아, 나도 몰라!”
쥬니어도 얼른 뒤따라 나갔다.
***
늦은 오후의 햇살에 점차 붉은색이 뒤섞인다.
중앙 광장에서 노점 거리 끝으로 향하는 길을, 루카스와 헤카테는 나란히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살금살금…… 살금살금…….”
나와 에반젤린은 숨죽여 따라가는 중이다.
에반젤린은 입밖으로 저렇게 살금살금 효과음을 내며 쫑쫑 따라붙고 있고, 나는 그런 에반젤린의 뒤를 따르고 있다.
우리가 원체 이 도시에서 유명인이다 보니, 그런 우리를 발견한 상인들이며 시민들이 모두 당황하고 의아해했지만. 지금 그쪽 눈치를 신경 쓸 틈이 없다.
‘루카스가! 옛날에 자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랑! 단 둘이 축제 거리를 걷고 있단 말이다!’
이거 직관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는 말이얏!
그때였다. 열심히 조용히 미행 중인 우리의 뒤로 헐레벌떡 쥬니어가 뛰어오더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여기서 뭐하세요?!”
“쉿! 그러는 너는?”
“저, 저는…… 그게, 그러니까…….”
“아 쥬니어 언니! 목소리 낮추고! 따라 해봐요, 살금살금!”
“사, 살금살금……?”
아무튼 쥬니어도 합류. 우리 셋은 엉금엉금 두 기사를 미행했다.
그때 노점에서 먹거리를 구매하던 데미안을 발견. 신전 회식 때 쓸 셈인지 양손 가득 먹거리를 챙긴 데미안 역시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황자님? 그리고 다들? 뭐하세요?”
“쉿-!”
“데미안 오빠, 살금살금!”
“이리 와요. 빨리!”
결국 영문도 모르는 채 붙들린 데미안까지. 우리 넷은 루카스의 데이트(?)를 뒤에서 감시하며 따라붙었다.
두 기사는 오래도록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헤카테였다.
“이렇게 여유롭게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요, 루카스. 아니, 그러고 보니 단둘이 만나는 건 아예 처음이던가요?”
“그렇지. 우리는 언제나 3총사였으니까. 주군께서 너와 나를 이끄셨으니까.”
직후 루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헤카테를 보았다.
“그나저나, 저번부터 의아한 건데. 왜 존대하는 거야?”
“이제 어른이 됐으니까요. 예의를 차려야죠.”
헤카테가 멋쩍게 웃었다.
“졸업해버렸으니까.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어른이니까.”
“……그러면 나도 존대하겠다.”
“아. 그건 싫은데…….”
“그러면 너도 반말해.”
“…….”
헤카테는 길게 침묵하더니.
“……그래, 그럴게. 루카스.”
말을 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온화해졌다. 루카스의 얼굴에 서려 있던 기묘한 긴장도 누그러졌다.
한참 말없이 걷던 두 기사는 한 노점 앞에 멈췄다. 간판에 ‘뉴 테라식 구움과자’라고 쓰인 노점이다.
루카스는 말없이 과자를 두 개 사더니 하나를 헤카테에게 건넸다.
“자. 좋아했잖아, 이거.”
“……그랬지.”
그리운 과자를 받아들고 헤카테는 숨을 삼켰다.
“그거 알아? 나, 어릴 때는 한 번도 축제에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학창 시절에는 황도에 아주 작은 축제라도 열리면…… 황자 전하께서 우리를 끌고 나가시곤 했지.”
“그땐 정말이지 고생 많았지. 너도, 나도.”
두 기사는 잠시 과자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학창 시절을, 그리고 그때 둘의 사이에 서 있었던, 과거의 애쉬를 추억하기라도 하는 걸까.
“……미안. 사실, 더 이상 맛을 느낄 수가 없어. 혀가 고장 났거든.”
과자를 다 먹지 못하고 내려둔 헤카테가 쓰게 웃었다.
“기억도 온전하지 못해. 죄다 곤죽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장면은 기억나는데, 그때의 감정은 떠올려낼 수가 없어. 너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만…….”
“…….”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헤카테.”
루카스는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원래 사람은 졸업하고 나면 변하기 마련이다.”
헤카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카스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학창 시절 추억은 빛바래기 마련이고. 그때는 어리고 미숙했잖나.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는지 잘 모르겠거든.”
“…….”
“지금 네가 어떤 모습이 되었든, 상관없다. 그 뒤로 얼마나 변했든 상관없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루카스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헤카테를 응시했다.
“내가 입학식날부터 졸업식날까지 단 한 번도 꺾지 못한, 무패의 검사.”
“…….”
“그때도, 지금도, 너는 내 안에서 그대로다. 그러니까-”
루카스는 웃었다.
정말이지 주인공다운, 눈치 없고 올곧은 미소였다.
“승부하자. 이번 무투대회에서,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