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06)
906화. 이레귤러
마침 스케줄이 없는 유리도 도착했겠다.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좋네.”
콩쿠르 무대 위가 훤히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앉고 보니 오른쪽에 유리가 앉아있었다.
슬쩍 말을 붙였다.
“기대된다. 그치, 유리야.”
“.. 별로요.”
이래야 유리지.
어딘가 삐딱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여기 온 것도 레나 무대를 보기 위해서겠지.
“아, 유리야.”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랐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 뭔데요?”
“잠깐 귀 좀.”
은밀하게 해야 하는 물음이었다.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유리가 귀를 가져다 댄다.
나는 자그맣게 물음을 건넸다.
“레나랑 말이야..”
“.. 네.”
“왜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 사이가 된 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거야?”
멈칫하는 유리.
듣기로 둘의 인연은 무척 길었다.
애초에 이은경과 은주아가 어릴 적부터 라이벌 관계였으니 말 다 했지.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나는 자문자답 스킬을 구사했다.
“아, 너무 오래돼서 기억 안 나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두 아이의 첫 만남은 상당히 오래됐을 거다.
나도 친구 녀석들과의 첫 만남이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렴풋이는 기억나도.
‘당연한 이치지.’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당시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 나요.”
“응?”
“기억.. 난다구요.”
유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나는 바로 말을 받았다.
“진짜?”
“네.”
“어땠는데? 첫 만남도 기억나는 거야? 아니면……”
다시 볼륨을 낮췄다.
“사이가 나빠진 계기?”
유리는 나를 힐끗 보며 되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요?”
“글쎄.”
잠깐 생각한 나는 말했다.
“둘 다 내가 아끼니까?”
“……”
그나마 그게 이유일 거 같았다.
궁금증도 대상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전제가 되어야 생기는 거니까.
왜인지 유리는 시선을 피하더니 말했다.
“이레나는……”
“레나는?”
“.. 안 말할래요.”
눈이 동그래진 나는 말했다.
“아니, 왜?”
“몰라요! 구, 궁금하면 이레나한테 물어보든가요.”
오호라.
이렇게 나온다는 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흐흐.”
“뭐야. 왜 웃어요?”
고개를 돌리는 유리를 향해 능청스레 말했다.
“유리가 잘못했구나?”
“.. 네?”
“유리가 잘못했으니까 못 말하는 거지. 맞지?”
합리적 추론이다.
지금도 한 성깔 하는 유리다.
하물며 그때는 최소 05시즌 유리였을 테니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무가내였을 거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유리가 소리쳤다.
“아니거든요!”
“아니긴. 아니면 뭔지 말해주면 되잖아.”
“으으……”
그때였다.
공교롭게도 거짓말처럼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얘들아!”
레나였다.
엄마인 이은경과 아빠인 하파엘도 함께였다.
“.. 헉!”
유리를 본 레나가 얼어붙었다.
대놓고 놀라는 표정.
유리가 자신의 콩쿠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놀란 모양이었다.
“미뉴리, 너……”
유리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네가 여기 왜 왔냐는 둥 시비조로 나오면 바로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는 거 같다.
그러나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되려 레나는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큼.. 내 연주 보러 온 거야?”
귀여웠다.
어색해하는 모습이.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유리도 당황해서 입을 뗐다.
“아니, 나는……”
뭐라 말하려다가 유리는 입 밖에 뱉었다.
“착각하지 마. 딱히 너 보러 온 건 아니니까. 마침 스케줄이 비어서……”
누가 녹음기를 틀어놨나.
앙숙인 만큼 그런 유리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레나였다.
그래서일까.
딱히 상처를 받거나 하는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흣.”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어쨌든 고마워.”
“.. 어?”
“내 콩쿠르 보러 와 줘서. 다음에는 네 콩쿠르 보러 갈게.”
“그, 그러든지 말든지..”
훈훈한 모습이다.
이어서 레나는 연두와 시은이와도 세상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와 주셨군요! 연두 아버뉨!”
“하하, 당연히 와야죠.”
아이들 쪽도 수다가 한창이었다.
걱정 섞인 시은이의 목소리.
“컨디션은 괜찮아? 안 떨려?”
“응, 하나도!”
“.. 진짜? 많이 떨릴 텐데……”
콩쿠르 경험자인 연두도 걱정스레 말했다.
레나는 힘이 넘쳤다.
“걱정하지 마! 나는 콩쿠르도 많이 해 봤고, 소원도 빌었스니까!”
“소원?”
“응! 아저시가 알려준 소원.. 콩쿠르 대상을 탈 수 있을 만큼 노력하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하나도 안 떨려!”
맞아, 그랬지.
원래라면 지금의 레나를 보고 생각했을 거다.
역시 경험은 무시 못 한다고, 레나는 긴장 안 하는 스타일이구나 하고.
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애써 강한 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봤지만 나는 상투적인 응원의 말을 건넸다.
“잘하고 와, 레나야.”
“네, 아저시!”
모른척해 주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리도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은경이 말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거 같네요.”
“아, 네!”
멀어지는 뒷모습.
그때 왼쪽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짓말.”
“응?”
“그냥.. 바보는 나였구나 하고요.”
동시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무대 위를 바라봤다.
의미심장한 유리의 말이었다.
***
콩쿠르의 막이 올랐다.
첫 번째 참가자인 남학생이 긴장한 얼굴로 무대 위에 오른다.
연주가 시작됐다.
딴. 따단.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비스듬히 걸친 채로 활을 잡은 손은 유려하게 움직인다.
확실히 피아노 콩쿠르와는 느낌이 달랐다.
피아노가 수면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 같다면, 바이올린은 흥에 겨워서 춤을 추는 백조 같았다.
‘이게 무슨 비유냐.’
비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피아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우열은 매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쇼팽 콩쿠르에서 경연할 두 개의 악기로 선정된 게 아닐까.
‘피아노, 바이올린.’
나름 공부하며 알게 된 지식이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딸이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알게 된다.
그러나 피아노에 한해서였다.
‘어느 정도 귀가 트였지.’
이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어떤 게 좋은 연주인지 좀 더 정확하게 파악이 가능했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디테일한 측면에서도.
바이올린은 아니었다.
‘모르겠어.’
기술적인 건 전혀 모르겠다.
지금 듣는 연주에서도 ‘잘하는 거 같은데?’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감상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유리도 말없이 연주를 바라보고 있다.
원래라면 쉴 틈 없이 떠들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수준이 너무 낮은데?’
‘연습을 하긴 한 건지 모르겠네.’
‘쇼팽을 이렇게 재미없게 칠 수도 있구나.’
대충 그런 식이었다.
콩쿠르 관객석에 앉기만 하면 유리는 엄청난 독설가로 변신하니까.
마지막 멘트는 실제로 수호의 연주를 보고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수호가 대상을 탔지만.
“……”
그런데 바이올린은 주 분야가 아니라서일까.
이번에는 말이 없었다.
독설은 없다. 그렇다고 특별히 즐겁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딴.
연주가 멎었다.
잘 끝마쳤다고 생각해서인지 남자아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연두의 귀에 속삭였다.
“어때, 연두야?”
“재밌어여..”
동감이었다.
아는 건 없어도 바이올린 연주 자체에서 느껴지는 새로움과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레나 연주를 본 지도 꽤 됐으니까.
다음 참가자가 올라왔다.
딴.
연주가 끝났다.
또 다음 참가자가 올라왔다.
딴.
연주가 끝났다.
그렇게 연주가 몇 차례가 반복되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은주아가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개도 천천히 끄덕인다.
비록 피아니스트이긴 했지만 그녀의 음악적 내공은 나랑 비할 바가 못 된다.
‘심사위원을 할 정도니까.’
바이올린에 있어서도 안목이 상당하겠지.
그런 그녀의 반응으로 유추해 보건대 참가자들의 수준이 그리 낮지 않은 모양이다.
유리는 아까부터 부동자세였다.
“괜찮아, 유리야?”
“뭐가요?”
“그냥. 평소랑 다르게 말이 없어서. 아니, 말이 없는 게 좋은 거긴 한데……”
콩쿠르 내에서는 정숙이었다.
말을 하더라도 지금 나처럼 소곤소곤 얘기해야 하고.
“.. 바이올린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가?”
전혀 도발하려 한 멘트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뜻하지 않게 유리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내가 바이올린에 대해 잘 모른다구요?”
“..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엄마랑 같이 바이올린 콩쿠르를 얼마나 보러 다녔는데!”
“아, 알겠어. 아저씨가 미안해. 그러니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발끈해서인지 유리 목소리 볼륨이 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유리의 말이 맞았다.
‘잘 알겠구나.’
은주아에게 들은 적이 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유리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콩쿠르 심사위원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유리를 잠시나마 나랑 동일선상에 둔 게 코미디였다.
나름의 해명을 입 밖에 뱉었다.
“평소랑 다르게 조용하길래.”
습관이 고쳐진 걸까.
아쉽게도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저는 저보다 못하는 사람만 평가해요. 쟤네, 나보다 바이올린은 다 잘 켜잖아요.”
“아.”
꽤나 명쾌한 기준이었다.
“피아노가 아니면 어떻게 연주하든 별로 관심도 없구요.”
“하하, 그렇구나.”
그 논리대로라면 역시 레나의 연주를 보러 온 게 맞았다.
바이올린에 관심도 없으면서.
그 타이밍에 나는 유치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유치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레나는?”
“네?”
“레나 연주는 어떤데? 유리가 듣기에 레나보다 잘하는 친구 있었어?”
그때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눈빛과 마주한 건.
“……”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정도로 유치했나?
“.. 진심이에요?”
“네?”
당황한 나머지 여덟 살 아이에게 존댓말이 나갔다.
“이레나가 여기 없는 게 다행이네요.”
“.. 응? 그게 무슨……”
“아무리 이레나가 아저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얘기 들었으면 화냈을걸요.”
유리는 짤막하게 덧붙였다.
“자존심 상해서.”
의문투성이였다.
뒤에 한 말은 둘째치고 레나가 나를 좋아한다는 서론부터 그랬다.
더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음 참가자가 올라왔으니까.
딴.
그리고 유리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말이 얼마나 바보같이 들렸을지.
***
얼마나 지났을까.
반복되는 연주가 조금은 따분하게 느껴지려는 참이었다.
“아빠! 레나에여..!”
“어, 어디?”
무대 위를 올라가는 레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레나 차례였다.
무대 중앙에 서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자세를 잡는다.
스릉.
활과 현이 맞닿는 소리.
이윽고 연주가 시작됐다.
따단. 딴. 딴.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피아노에 대해 전혀 몰랐던 때.
심지어 곡에 대한 정보도 없이 연주를 들었을 때조차 다르게 느껴지는 연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은경의 연주가 그랬다.
오래돼서 흐릿한 영상 속 이은경과 은주아의 연주가 그랬다.
‘왜 잊고 있었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레나도 그에 해당하는 부류였다는 사실을.
딴. 따단.
도입부의 몇 초로 충분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