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35)
013. 포르부 의회 공방전(2)
4.
천장과 벽면을 뜯어낸 유세용 마차 위에 올라선 나는 도시 곳곳을 순회하며 열심히 소리를 질렀다.
“농민이라고 해서 굶주리고 가난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겠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소외되는 계층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아아!”
“니콜라이! 니콜라이!”
바람잡이를 심어놓긴 했지만 멀리서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어느덧 도시의 절반을 돌았을 무렵.
나는 녹초가 되어 마차 한구석에 찌그러졌다.
‘후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네.’
전생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일인데다가 마이크도, 확성기도 없으니 목이 타들어 갈듯 아팠다.
그때 막심이 미리 챙겨온 물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고맙다.”
“한데 이렇게 직접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부르주아 때처럼 유력자들과 접촉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짜식.
나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야.
그래도 할 건 해야 했지만.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지.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한테 무조건 복종하는 건 오래된 농경시대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괜히 선거철 때마다 정치인들이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막심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그래도 저들은 투표권도 없잖습니까.”
“의회도 결국 국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사로잡아야지. 그래야 괜히 딴 생각 안 할 거 아냐. 어우. 피곤하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막심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자님. 저기 좀 보십시오. 로버트 백작이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막심이 가리킨 곳을 보자 귀족 의회 대표, 로버트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나와 비슷한 마차까지 끌고 온 채였다.
‘어쭈. 감히 날 따라 해?’
이건 체면과 자존심마저 버려가면서 어떻게든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리라.
위장용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나는 막심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어봐야겠다. 너도 얼른 변장하고.”
“네? 갑자기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다. 이건 상식 아냐?”
‘제가 그런 말을 어떻게 압니까!’
막심의 억울한 표정을 뒤로 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로버트 백작의 목소리가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오늘날 핀란드에는 민족을 외세에 팔아넘기려는 무리가 있다. 지배를 받는 게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의 전통과 자주권은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라는 거야. 언제부터 착취하는 게 전통이었냐.”
“괜히 니콜라이 황자님한테 심통 나서 그러는 거 아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돈으로 매수했든, 하인을 데려왔던 마차 근처에 있던 몇몇은 로버트 백작의 말을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다.
“전통을 지키자!”
“자주권을 수호하자!”
잠자코 듣던 있던 막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황자님. 이거 내란죄로 잡아들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만에 하나 선동이 먹히기라도 하면 큰 문제로 불거질 텐데요.”
막심의 말에 순간 내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호오. 이거 잘만하면 그림을 제대로 그려볼 수 있겠는데?’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되는 지금보다 로버트 백작과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판을 키워버린다면.
화제성 하나는 제대로 챙길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번 기회에 반동 세력도 싹 다 잠재워버리고 말이야.’
나는 막심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건넸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덕분에 일이 더 재밌게 됐어.”
“제가 무슨 말이라도 했습니까?”
“막심. 네 말대로 로버트 백작을 내란죄로 고발해야겠다. 하지만 판결은 의회에서 내리도록 하지.”
“네? 진심이십니까?”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해. 핀란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사건을 만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유세와 공작을 반복하길 얼마간.
드디어 대망의 그 날이 다가왔다.
“황자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들어가자.”
본격적인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5.
의회실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마자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와. 이게 꽉 차네.’
네 계층에 속한 의원과 러시아 관료들.
그리고 그밖에 수십 명의 참관인까지.
널찍해 보였던 의회실 안은 어느새 이백에 가까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웅성웅성.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가장 상석에 오른 나는 들쳐 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쿠웅.
핀란드의 군주를 상징하는 검.
나 같은 외지인의 손에 들어온 이상 역사와 전통은 없는, 급조한 것에 가까운 물건이 되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면 되는 거니까.’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즈음.
군주 다음으로 높은 곳에 자리한 의장석에 낯익은 인물이 걸어왔다.
‘뭐야. 저건 지르좌빈이잖아.’
세나트 의원에 법무부 소속 러시아 관료가 핀란드 의회의 의장을 맡다니.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막심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급하게 소집된 총 의회인데다 황자님까지 얽힌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폐하께서 특별히 보내신 것 같습니다.”
‘하긴 핀란드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니 절차 따위는 무시할 만도 하지. 그래도 미리 얘기해놓은 대로 흘러가겠지?’
과연 지르좌빈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니콜라이 황자님과 로버트 백작이 핀란드 민중의 눈과 귀를 흐리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따라서 오늘 누가 더 많은 표를 받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를 내란죄로 처벌하도록 하겠다.”
“…..!”
갑자기 의회에서 법정이 되어버리다니.
이미 알고 있던 자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식이 느린 몇몇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거야?’
‘야만적인! 러시아에는 최소한의 법도도 없나? 신성한 의회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하지만 단순하고 원초적인 승부일수록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흥분을 끌어올리는 법.
어느새 의원들은 긴장 어린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먼저 로버트 백작. 발언해주게.”
지르좌빈의 말에 단상에 올라선 로버트는 미리 준비해놓은 대본을 꺼내 큰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우리 귀족이 악인가? 아니, 악이어야 하나? 오래전부터 귀족들은 군주를 보좌하며 국가 발전에 공헌해 온 집단이다. 그런데 지금 니콜라이 황자가 벌이는 짓은 무엇인가? 이런 우리를 죄다 몰살시키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발언하는 도중에도 로버트는 동료 의원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황자에게 매수된 그들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후우. 그래. 내가 총대를 메고 죽어주마. 그러는 게 귀족 전체를 위한 길이겠지.’
이를 악문 그는 어떻게든 귀족 계층의 정당성과 핀란드의 자치권 확보를 주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로버트가 처절한 외침을 끝맺었을 즈음.
“귀족은 귀족다울 때 진정으로 빛나는 법이지. 스웨덴의 치하에서는 입도 뻥긋 못 하더니 지금에서야 정당성을 주장하는 건가?”
나는 마치 핀란드인이라도 된 것 같은 발언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제 그대들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 떼를 쓰고 항의해봤자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앞으로 왕의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산될 것이다.
입헌군주제, 공화정 등등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자유를 향한 열망은 도저히 꺾을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 빈자리를 귀족들이 차지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능력과 실력!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계층에 걸맞은 품위와 성의를 보여라! 그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들을 인정할 수 없다!”
내 말은 러시아 사람이 듣기에는 조금 다른 식으로 들렸다.
‘표트르 대제의 영광을 다시 되살리겠노라!’
실제로 표트르 대제는 귀족이라 해도 말단 관료부터 시작하게 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했다.
‘비록 후대 차르들이 죄다 허사로 만들어버렸지만. 이번에는 결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행간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알아챈 관료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반발한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야 여기까지 황제를 모시고 올 정도면 각자의 분야에서 한가락 한다는 녀석들일 테니.’
다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 이후에 벌어질 파장이 두려운 거겠지.
여기서 나는 쐐기를 박았다.
“이건 장차 핀란드의 대공이 될 나 역시 마찬가지일지니. 만약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의회에서 탄핵을 건의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 이는 이곳에 모인 의원들이 곧 핀란드의 자주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로버트의 발언으로 인해 죄책감을 품었던 귀족들은 황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주까지 솔선수범하는 데다가 귀족의 존속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해준다면.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하지 않나?’
말뜻을 알아먹은 사람들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황자의 말이 옳소!”
“나는 황자님의 뜻에 따르겠소!”
6.
니콜라이에 대한 지지 선언이 연달아 이어지는 가운데.
로버트 백작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전통적인 귀족의 시대는 막을 내린 건가?’
그런데도 딱히 아쉽다거나 원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짧은 유세 동안, 그리고 이 자리에서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겠지.
‘나는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로버트 백작이 힘없이 자리에 앉았을 때.
지르좌빈의 목소리가 회장 전체를 감쌌다.
“이제부터 표결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표결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후다닥 투표를 마친 그들은 재빨리 자리로 돌아와 결과를 기다렸다.
“네 계층 모두 반수 이상의 선택자가 나왔다. 4대 0으로 니콜라이 황자님의 승리를 선언한다!”
지르좌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곁에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알렉산드르 1세 폐하를 대신하여 핀란드를 다스리게 된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앞으로 충심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공약을 속히 이행해주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저마다 욕망을 쏟아내는 가운데.
내 시선은 어느덧 로버트를 향해있었다.
‘이제 좀 정신을 차렸으려나.’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지 않으면 정신 못 차리는 이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어 왔다.
‘근데 어쩌나. 그런 녀석들 정신머리를 고쳐주는 게 내 특기인데.’
정확하게는 원 역사에서 이 몸뚱이의 특기였다.
철없이 혁명이나 반란을 꿈꾸는 반동분자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잡아들여 사형쇼를 펼치는 게 취미였다던가.
‘그러다 도스토옙스키한테도 써먹었다는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장식한 대문호마저 정신 차리게 만들었으니 효과 하나만큼은 검증된 방법이었다.
당장 로버트 백작의 표정만 보더라도 야생의 늑대에서 어느새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이 되어버렸잖은가.
인파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버트 백작이여. 알렉산드르 1세 폐하를 대신하여 그대의 처분을 결정하겠다.”
털썩.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만 로버트 백작은 절망 어린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 끝이로구나.’
내란죄라면 보통 사형이라는 극형에 처해 질 정도로 중한 범죄였다.
하지만 막상 죽을 위기에 처하니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아니다. 이렇게 목숨을 잃을 수 없어.’
로버트가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으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그대를 농업협동조합의 초대 중앙회장으로 임명한다.”
“허.”
“이럴 수가.”
모두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할 때.
“…..!”
로버트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잘게 몸을 떨었다.
“어째서……”
“잠시 반목하기는 했으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귀족 계층을 대표하기 위해 나선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나는 그런 책임감과 용기를 가진 이가 필요하다.”
니콜라이 황자의 말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묘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저런 거물에게 공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재기를 위한 발판을 대놓고 깔아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내가 아직 죽진 않았구나.’
결국 로버트의 고개는 땅에 닿을 때까지 아래로 내려갔다.
“황자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아아!”
“니콜라이 황자 만세!”
그렇게 감동의 물결이 지나간 뒤.
일일이 귀족 의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덕담을 건넨 나는 의회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입구에서 출입 통제를 맡고 있던 쿠즈민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황자님.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괜히 협박당해서 그런 건 아니시지요?”
쿠즈민은 당장이라도 로버트의 목을 분질러버리겠다는 듯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 모습에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어허.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못 써.”
강아지 달래듯 내뱉은 말에 막심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피가 끓어오르는 쿠즈민을 잠재우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던데.
“애초에 대지주인 귀족 계층을 빼놓고서는 농업협동조합을 세운다는 게 말이 안 됐지. 개중에서 능력과 야망에 나름의 줏대까지 겸비한 녀석이 로버트였을 뿐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진 몰라도 이전보다 나은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 그럭저럭 잘 살아갈 것이다.
소소하게 뒷돈을 챙기는 것쯤은 애교로 봐줄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도 기어이 반역을 꾀하겠다면 모가지를 따야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의회실 밖으로 나갔을 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 하나가 공손한 자세로 말을 건넸다.
“황자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집무실로 가시지요.”
‘드디어 보상을 받을 때인가!’
과연 알렉산드르 1세는 내 행적에 대해 어떤 평을 내렸을지.
그리고 핀란드 대공이라는 직함 외에도 얼마나 대단한 보상을 뜯어낼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