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희진은 신이 났다. 사실, 이정이 자신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할 때부터 조금씩 흥이 오른 채였다.
‘진짜로 내가 원한 ‘하늘’이야!’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작품이 적다고 해서 열의가 없는 게 아니다. 작품들이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별 볼 일 없는 취급 받는 작품들이기에 더 애착이 가고 소중하다. 그리고 소중한 만큼 남들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희진의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너 정도 급 작가 글에 누가 그렇게까지 죽어라 매달려? 그냥 그 시간에 다른 작품 미팅하고 말지.’
‘작가님 글은 재미있는데…. 그렇게까지 권한을 드리긴 어려워요.’
‘깐깐한 탑 작가들도 무명 땐 그렇게 안 했어.’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유독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은 희진은 그런 이유로 어설프게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캐릭터를 세상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김하늘’이 아니라면 은 의미가 없어.’
심지어 은 그녀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10년 넘게 간직해 온 가장 소중한 글 중 하나였다.
임안희 감독과 손을 잡은 이유도 임 감독이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 약속했기 때문이었고, 그는 실제로 약속을 지켰다.
‘희진 씨, 그래도 질문은 좀 살살…. 아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어투를 좀 부드럽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죠.’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배우들을 보며 곤란한 기색이긴 했어도 다른 감독, 혹은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급을 운운하며 적당히 하라며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잡힌 이정과의 미팅.
‘본 거라곤밖에 없는데.’
본래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만큼 희진 역시 배우의 최근 출연작들을 꼭 보고 연기 스타일을 확인한 뒤 미팅을 했는데, 조연출 서현이 급하게 미팅을 잡아버린 탓에 이정의 작품을 확인할 틈이 없었다.
“괘,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기 천재 이이정이잖아!”
“감독니임! 입! 희진 씨 천재 타입 안 좋아하잖아요.”
천재 타입이라니.
데뷔 후 실패한 작품이 없으며, 연기력 논란이 일어난 적도 없는 배우이긴 했어도 천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희진으로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캐릭터 분석은 글렀겠네.’
실망했던 것도 잠시, 사실 희진은 이정을 보자마자 조금 놀랐다.
‘ 때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호리호리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형사 역에 맡게 탄탄해 보였던 기억 속의 이정과 달리 오늘 미팅 장소에 나온 이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약해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다.
‘설마 미팅 때문에 뺀 건가? 김하늘 캐릭터에 맞추려고?’
제작진 팀이 이정에게 시나리오를 보낸 지 벌써 몇 달이 지났으니 살을 빼려면 충분히 뺄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캐스팅 확정도 아닌 단순 미팅에 이렇게까지 힘들 쏟을 이유는 없었다.
‘그전에 캐스팅이 끝나면 어쩌려고, 아니 이 뭐라고….’
제 작품에 애정이 있는 것과 별개로 객관적인 판단은 가능한 희진이 이정을 호감 어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살을 뺀 것이냐는 그녀의 질문에 이정이 긍정하자 그 호감은 배가되었다.
‘작품에 대한 열의 하나만큼은 대단하네.’
그러나 캐릭터 분석은 별개라고 생각하며 다른 배우들에게도 으레 했던 질문은 던진 희진은 자세를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가 어디서 제자를 구해왔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김하늘이 죽을 때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서 제자라고 언급되었을 뿐 실제로 김하늘이 그 사람을 제자라고 직접 언급한 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제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질문에 앞선 배우들은 그의 ‘제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연인이라고 말하거나, 기현이 모르는 그의 가족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면요?”
“처음에는 주치의를 생각했는데, 이기현이 주치의를 맡은 와중에 또 의사를 옆에 데려다 놓는 건 좀 비효율적이고, 연인이나 가족이라기엔 대화가 너무 딱딱하고 서로 존칭을 쓰더라고요.”
아주 가끔, 정답에 가까운 답을 말하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짐작일 뿐 그 이유까지는 말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김하늘이 시한부였다는 사실은 그가 죽고 나서야 밝혀지고, 그전까지는 친구이자 주치의인 이기현밖에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일 쓰러져 죽을지도 모르는 본인을 그냥 두기엔 내심 불안했겠죠.”
그러나 이정은 김하늘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 없이 대답했다.
“대신 주변에 제자라고 둘러댈 수 있을 정도로 젊은 나이, 여차하면 나빠질 김하늘의 상태를 보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요양보호사나 간호사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확실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긴 했지만, 결코 단시간 안에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김하늘’의 대사뿐만 아니라 제자, 기현, 그리고 의 배경까지 통째로 이해한 뒤 곰곰이 생각하고 준비해 온 대답이었다. 마치, 희진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란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와…! 이런 기분이구나.’
희진은 그 대답에 짜릿함을 느꼈다. 제 작품이 온전히 이해받은 이 순간이야말로 글이 제 뜻대로 써지던 날보다 더 짜릿하고 즐거웠다.
만약 희진의 본 설정과 달랐더라도 이만큼 이유가 뒷받침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천재인 건가?’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질문을 이어갔지만, 이정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여전히 섬세했고, 여전히 완벽했다.
젊은, 아니 다소 어린 천재들은 분석에 약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대본 연기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젊은 배우들, 특히 천재 소리를 듣는 배우들이 노력보다는 재능에 의해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선입견이 이정의 너덜너덜한 대본을 본 순간 전부 박살 났다.
‘어쩌면….’
어쩌면 다시는 이정만큼이나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분석해주는 배우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 볼 것도 없이 그야말로 ‘김하늘’임을 확신한 희진이 이정에게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본…. 한 부 더 줄까요?”
그리고, 이정은 유약해 보이던 인상이 거짓말처럼 굳센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아, 주시면 감사하죠.”
희진이 ‘배우 이이정’에게 빠진 순간이었다.
* * *
주연이 모두 정해졌으니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애초에 계획했던 상반기 크랭크인을 위해 의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이정이 할 일은 6부작으로 개편된 의 대본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락미 오리지널 시리즈면 영화 전체 기준으로는 거의 서너 배 길어진 거 아니야? 지루하지 않을까?”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의외로 이쪽이 더 디테일이 살더라고.”
“그으래?”
찌뿌둥한 몸을 쭉쭉 늘려가며 스트레칭을 하던 지원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찾아 검색했다.
“와, 이이정 운 좋네?”
“뭐가?”
“락미는 원래 시상식 같은 거 없는 거 알지? 근데 올해부터 NTO랑 협업해서 자체 시상식 만든다던데?”
온라인 기반 스트리밍 서비스인 락미 비디오. 방송사를 통한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탓에 이렇다 할 시상식이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NTO가? 종편이라 시상식 없었잖아. 작년에야 10주년 특별 시상식이었던 거고.”
“작년에 특별 시상식하고 나서 일반 시상식도 만들어달라는 말이 많았나 봐. 네가 대상을 받긴 했지만, 말이 대상이지 사실 그냥 특별상이잖아.”
“상이 중요하냐.”
“적어도 네 팬한텐 중요할걸. 가뜩이나 너 상복 없다고 난리인데.”
대상이 비공식적인 특별상이니 이정의 공식 상은 의 신인상 하나뿐. 팬들이 목말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한국 시장 넓히고 싶어 하는 락미랑, 혼자서는 힘 달리는 NTO랑 둘이 독점 계약 맺어서 동시 송출이나 순차 송출하고, 그 기념으로 시상식도 좀 화려하게 하고. 물론, 공식적으로.”
“이 수상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지. 게다가 제일 중요한 1회 시상식이잖아.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보단 너한테 주고 싶지 않겠어?”
NTO는 이정 덕분에 개국 이래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방송국이었다. 지원의 말대로 다른 사람보다는 이왕이면 이정에게 주고 싶어 할 확률이 높았다.
“방송국이나 영화나 공정한 거 같아도 아니니까. 알잖아?”
대형 기획사가 밀어주는 신인에게 신인상을 빼앗긴 지원이 이를 빠득 갈았다. 회귀 전에도 신인상은 지원이 받지 못한 유일한 상이었다.
“그러게.”
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상 때문에 작품을 고르거나 놓칠 마음이 없다는 것뿐이지 이왕이면 받는 쪽이 좋은 건 이정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평생 기록으로 남을 제1회, 최초 수상. 욕심이 나는 타이틀이었다.
“한번 잘해 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