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1
021화
“이정 씨는 열 받지도 않아요? 벌써 두 번이나 촬영이 밀렸는데?”
“아프시다잖아요.”
“그걸 믿어요. 지금?”
“안 믿죠.”
교통사고가 났다며 촬영을 펑크 낸 이후에도 강현은 계속 이정과의 촬영에 불참했다. 현재 대본에선 강현과 찍을 분량만 남은 그로서는 벌써 두 번이나 현장에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대본 수정하고 계시잖아요. 느긋하게 생각하려고요.”
이정의 태연한 답변에 속이 터지는 이 작가가 애꿎은 휴지만 잘게 찢었다.
“진짜 속도 좋아 이정 씨!”
성연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한주석에게 몇 번인가 알랑방귀를 뀌다가 별 소득이 없자 본격적으로 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여태 밖으로 새어 나간 적 없는 강현의 인성 논란이 조금씩 언급될 정도였다.
“강현 그놈은 뭘 믿고 그러나 몰라요. 오죽하면 VK 회장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겠어요?”
“글쎄요.”
“어휴. 빽이 없을 거 같진 않고. 대체 정체가 뭘까요? 그놈은.”
“회장 아들이 아니면 주주 아들쯤 되지 않을까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실이었다. 강현은 덩치가 꽤 큰 언론계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회장 다음가는 VK의 대주주였다. 인성 논란이 본격화된 것은 아버지의 회사가 탈세 의혹에 휩싸여 휘청거릴 즈음부터였다.
이정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강현이 인성 논란으로 설 자리를 잃은 것이 그가 매니저가 된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한주석 선생님이 주의를 주셨는데도 여전한 걸 감독님이나 스태프분들이 어쩌겠어요.”
“내 말이! 박 감독은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 꼴통 만나서 3개월이면 찍을 거 6개월 걸리게 생겼다고.”
박 감독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작정하고 살을 빼던 시절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최저 몸무게를 단 한 달 만에 찍었다고 한다.
“이정 씨도 첫 드라마부터 어지간한 놈을 만나서 고생이네요.”
“작가님 전 사실 강현 선배님이 안 오시는 쪽이 마음 편해요.”
이정은 진심으로 차라리 강현이 촬영 펑크를 내는 쪽이라는 것이 달가웠다.
“어쨌든 촬영은 해야 하니까 언젠간 뵐 수밖에 없겠죠.”
몇 번 미룰 수 있을 뿐 결국 촬영은 해야 하고, 그러면 좋으나 싫으나 얼굴을 봐야 하는데 매번 불러다가 조언을 가장한 폭언을 내뱉는 사람보다야 이쪽이 훨씬 상대하기 편했다.
“하여간 태평하다니까. 됐고, 그때 보내준 부분 어땠어요?”
“그 부분은 연습해 보니까 혼잣말이 너무 많던데요? 꼭 필요한 거라면 나레이션이 들어가는 게 더 깔끔할 거 같아요.”
“역시 그런가요?”
재민의 설정집을 이정에게 맡긴 후, 이 작가는 수정을 핑계로 대본집필 일시 중단을 선언했다.
“나 좋자고 시작한 수정이지만 이게 강현한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짜증 나네요.”
이정의 조언을 적던 이 작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으면 수정 허가도 안 났을 거예요. 덕분에 작가님은 퀄리티 높이시고, 전 분량 챙기고. 좋지 않나요?”
“쓸데없이 긍정적이네요.”
“현실적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반 사전 제작 드라마라도 계절감에 맞춰 촬영해야 하는 만큼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의 행동으로 인해 드라마 제작 속도가 늦춰지기 시작하며 아슬아슬하게 수정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이런 내용이었다니 신기한데요?”
이정은 이 작가의 노트북으로 의 초고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막장 드라마로 유명했던 미래와 달리 지금의 드라마는 진한 멜로 드라마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겉멋 들어 쓴 글이라 올드하다고 얼마나 까였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박 감독이랑 절충해서 만든 게 이죠.”
절충해서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다른 이야기였지만 이정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작가표 막장 드라마의 시작인 이 드라마에 이러한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건드려서 괜히 이상해졌을까 봐 그게 걱정이네요.”
“이상해졌다 해도 그건 작가인 제가 잘못 쓴 탓일 거예요. 이정 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캐릭터를 분석해 봤을 뿐이니까.”
자신이 아는 과 너무 달라지는 모습에 괜히 불안해진 이정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 작가는 배우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작가님. 저희 이렇게 만나는 거 말인데요.”
“알아요. 오늘은 따로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부른 거고, 앞으로는 메일로 연락해요.”
무명 신인 배우와 힘없는 작가 조합이긴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연예계에선 뒷말이 나오기 딱 좋은 만남이었다. 이정이 그 점을 언급하자 이 작가 역시 알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정 씨 차기작 잡았어요?”
“그럴 리가요.”
“다행이다. 나같이 방송 쪽 일하는 사촌 동생인데 지금 찾는 배역이 이정 씨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한번 만나서 얘기나 들어보라고 불렀어요.”
“네?”
아직 의 촬영조차 끝나지 않은 상황에 배우도 아닌 작가에게서 차기작을 소개받을 줄 몰랐던 이정이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 방영 나가기 전에 잡으려고요.”
몸값 비싸지기 전에 잡아 두려는 거라며 웃은 그녀가 다른 제의가 전혀 없었냐고 물었다.
‘아. 비슷한 게 있긴 했지.’
모 아니면 도인 패였지만 일단 제의를 받았던 가 있었다.
“확정된 건 아닌데 제의받은 게 있기는 해요. 상황이 복잡해서 아직 고민 중이거든요.”
홍소희 작가가 아무리 확신한다 한들 그 확신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란 법은 없었다.
“너무 신중한 거 아니에요? 지금은 뭐라도 할 시기지 이것저것 따지고 볼 상황이 아니잖아요.”
“알고는 있는데 천성이 이런 건지 오래 고민하게 되네요.”
“이쪽 길은 원래 다 그렇잖아요. 불확실하고, 부딪혀 봐야 알고.”
미래를 알고 있기에 하게 되는 고민이었다. 자신이 맡아 잘 풀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미래에서와같이 나쁘게 풀리게 된다면? 확신할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망설임이기도 했다.
“이정 씨도 그래서 박 감독한테 본인 생각 말한 거 아니었어요? 박 감독이 아니라 다른 감독 같았으면 의견이고 뭐고 신인 배우가 대본에 꼬투리 잡는다고 뭐라 할 놈들도 많아요.”
“그 점은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박 감독이 유독 신인 배우들에게 유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감독인 것도 이정에겐 매우 행운이었다.
“강현 봐요. 저렇게 개진상 짓을 하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제재를 못 하잖아요. 회사가 나서서 보호해 줘, 본인 인지도도 높아. 이 바닥에선 뜨는 게 장땡이에요.”
가만히 이 작가의 말을 듣고있던 이정이 생각에 잠겼다.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것. 어떤 것이 흥하고, 어떤 것이 망할지 알고 있는 것. 그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무기였지만 그와 동시에 독이 되기도 했다.
“제가 너무 생각이 많았나 봐요.”
“뭘 그렇게 고민해요? 일단 해 보면 되지.”
“그러게요.”
신인이라면 누구든 홍 작가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들리기 마련이었다. 아마 미래에서 그 역할을 맡은 배우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조직적인 팬덤이 무섭긴 하지만 제가 잘하면 될 것이라고.
“배역 선택을 고민하는 건 좀 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좀 더 이이정이라는 사람을 세상에 알릴 타이밍이지, 대박작을 노리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
대박작을 노린 것까진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신중하게 다음 작품을 고르려고 했던 이정에겐 뼈아픈 말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소심해졌지?’
신중을 넘어선 소심. 알고 있는 미래 정보가 오히려 그를 옥죄였다. 마치 그 외에는 아예 선택지가 없는 사람처럼.
“조언 감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래의 흥행작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틀에 갇혀 있던 이정을 틀에서 꺼내 주는 말이었기에 극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흥행 실패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기 마련이었다.
꼭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연기가 조금 부족하다 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뭘 그렇게 혼자서 끙끙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을 좀 넓게 봐요. 이정 씨. 아직 젊은 사람이 왜 그래?”
속 알맹이는 이 작가와 또래라서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무서운 것은 많아지는 법이니까.
“하하, 제가 보기보다 겁이 좀 많아요.”
“진짜 생긴 거랑 다르다니까.”
한결 개운해 보이는 이정의 모습에 이 작가가 피식 웃었다. 누구나 해줄 수 있는 뻔한 말에서 답을 찾는 것은 결국 이정의 몫이었다.
“작가님, 전화 오는데요?”
“아, 얘 왔나 보다.”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사람의 전화였는지 이 작가가 전화를 받아 짧게 대답했다.
“어, 어어. 카운터에서 왼쪽으로 쭉 들어와. 아예 구석진 곳으로 어, 여기!”
“언니, 뭐 이렇게 구석에…”
넓은 카페의 구석에 앉아 있었던 탓일까, 한참이나 그들을 찾아 헤매던 이 작가의 지인이 손을 흔들었다.
가발인가 싶을 정도로 숱이 빽빽한 탈색 머리와 요즘은 잘 하지 않는 숱 많은 앞머리.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홍 작가님?”
“이정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