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한번 불거진 문제는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로전은 이정의 부모만을 타깃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집안 대부분 사람이 엮여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 뉴스거리였지만, 그들을 알고 있는 이정은 그 기사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아빠, 큰 고모부인 거 같고.’
[가만히만 있어도 평가 만점? 평가 1등의 숨은 비밀.] [출근 안 해도 월급은 꼬박꼬박…. 당직 비용까지.]‘음…. 이 꼴은 딱 형들인데.’
일부는 이정이 알고 있는 문제들이었고, 또 일부는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긴 했지만, 회귀 전보다 훨씬 크게 터진 것을 보아하니 이번엔 이정의 유명세가 오히려 독이 된 듯했다.
이정은 오명을 벗었지만, 아직 대중들의 마음속엔 그와 관련된 곳이라는 생각이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명성 다 죽었네.”
기사를 훑던 이정이 그들을 비웃었다.
뼈대 깊은 의사 가문이라는 그 여덟 글자가 대체 어디까지 그들을 오만하게 만든 걸까.
“자부심이 있으면 더 노력하는 게 정상 아니야?”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 이정의 이정은 그랬다. 한의학으로 전공을 틀기 전까지는 자신도 당연히 의사가 될 줄 알았고, 그만큼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 역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집안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집구석은 상상 이상으로 썩어있었다.
일찍이 병원장 자리를 물려받은 이정의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원래부터 쓸데없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작은 아빠는 기본, 아직 전문의도 따지 못한 사촌 형들까지.
이번에 일어난 사고 역시 그들의 태만이 불러일으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지만….’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 가족,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상실은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이정은 못내 그 점이 안타까웠다.
― 삐리릭.
“이정아!”
이정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심하는 동안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재가 그를 찾아왔다.
“왜요?”
다소 짜증이 섞인 말투였지만, 그 짜증이 이정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정이 그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리자, 우재가 현관 앞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소리치듯 말했다.
“QLS가…!”
“하차할 생각 없냐고 은연중에 떠봐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형도 불안하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한 번도 아니고 벌써 연달아 두 번. 그것도 연쇄적으로 터지는 논란들 때문에 이정은 지금 태풍 속의 눈과 같은 존재였다.
“하차 통보가 아닌 거 보면 QLS도 우리 눈치 엄청나게 보고 있는 거 같은데요.”
이정이 덤덤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정의 잘못도 아닌 일 때문에 하차해야 한다는 사실에 열이 오른 우재와 다르게 그는 처음 논란이 터졌을 때부터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방송국, 특히 드라마국은 때로 시청자들의 눈치를 과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먼저 연락받은 거 아니지…?”
“제가 무슨 수로 먼저 연락을 받아요.”
“아니, 뭐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줄 알았다길래.”
“하차 논의는 첫 논란 때부터 나왔을걸요? 우리가 빠르게 반박해서 금방 사그라드니까 QLS 측도 가만히 있었던 거지.”
사실, 이정으로선 첫 번째 논란 때 하차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뜻밖이었다.
증거를 포함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정의 하차를 요구하는 문의가 꽤 많았지만, 2차 미팅 때도 그러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밀어붙일까?”
이정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우재가 말했다.
“대표님이 우리가 밀어붙이면 저쪽도 할 말 없을 거라고 하던데.”
계약상 하차 및 위약금은 연예인 본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경우에만 해당.
이정의 경우 잠시 휘청이긴 했으나 결국 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났으니 이 조항을 문제 삼아 밀어붙이면 QLS 측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작품은 아닌데요.”
하루면 끝나는 화보 촬영도 아니고, 최소 3개월 이상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깔끔하게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헤어지는 게 보기 좋지 않겠어요?”
다만 이정은 그의 가족들 때문에 손해를 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번 하차 역시 QLS 측의 사정을 이해했을 뿐 가족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대신, 계약서 새로 하나 쓰자고 해요. 아마 그쪽도 이 정도는 해줄 거예요”
“무슨 내용으로?”
“그건….”
* * *
[이이정, 하차. 자숙의 의미가 아닌 도의적인 결정.] [RW, ‘절대 제작진과의 불화 아니야.’ 곧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 ????왜?????
└ 가족 논란 때문임??????
└ 아 개빡치네 이정이 로코 기대했는데 별….
└ 옆동네 누구는 사고 쳐도 끝까지 안고 가더만 왜 여기는 이렇게 칼 같아?
└ 아니 이이정 논란도 아닌데 왜 하차해요
└ 저번에 QLS 시청자 게시판 난리 나서 그런가 봄.
└ 저기요. 이이정 로코 내놔요.
└ ㅉㅉ 뭐 찔리는 게 있으니까 하차하는 거 아님?
└ 헛소리 작작~
└ 니 인생에 찔리는 게 많은 거겠지.
└ 머…. 빡치긴 하는데…. 22정이라면 한 달 안에 차기작 발표 난다에 내 오른팔을 건다.
└ 혹시 모름 ㅋㅋㅋ 이거 기사 나기 전부터 이미 차기작 고르고 있을 수도.
└ 내 배우는 6년째 작품 활동 안 하는데^^ 이이정 반의반의 반만이라도 닮아줬으면…ㅎ.
당연히 반응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미 이정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난 일을 가지고 굳이 하차까지 시켰어야 하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골라둔 시나리오는 있어?”
“있죠.”
혼란스러운 반응과 별개로 이정은 평화로웠다. 하차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고, 이정은 깔끔하게 헤어지는 대신 좋은 조건의 계약서를 얻었다.
“로코?”
우재의 물음에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꺼냈다.
“이거 둘 중 하나로 하려고요.”
이정은 보통 회귀 전 기억을 이용하기보다 직접 작품을 고르는 걸 선호했지만, 이번엔 특별히 회귀 전 기억들을 이용해 고른 작품들이었다.
“음…. 제목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두 가지 다 국내 멜로 영화로서는 굉장한 성적을 거둔 작품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성공도만 따지면 작가의 대사 빨로 밀고 들어갔던 보다 수작이었다.
“그쵸?”
다만 두 작품은 개봉 시기도, 성적도 비슷했기에 로맨스에 다소 취약한 이정이나, 멜로 영화와는 거리가 먼 우재가 고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물어보려고요.”
“누구한테?”
“류지원이요.”
“아.”
적어도 멜로 영화에 대해서는 이정보다 지원의 눈이 훨씬 믿음직했다.
“야.”
― 왜.
“골라봐.”
지원에게 전화를 건 이정이 다짜고짜 말했지만, 지원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 내가 하다 하다 이제 네 차기작까지 골라줘야 하냐.
차기작이란 말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바로 알아채는 지원의 모습에 우재가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골라봐.”
일단 구박은 했지만 가만히 이정의 설명을 들은 지원이 그의 설명이 끝나자 핸드폰 너머로 들리도록 박수를 쳤다.
― 오…. 드디어 필모에 망함을 추가하려고?
“어떤 게 더 나아?”
― 로코 드라마 버리고 멜로 영화 찍는 병신은 또 처음 보네.
“어떤 게 더 낫냐고.”
지원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는 인기가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종류의 영화, 흔히 말하는 로맨스 코미디, 혹은 멜로 영화는 믿고 거른다는 말이 많기 때문이었다.
― 아니 그냥 둘 다 별론데.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보는 눈도 더럽게 없어, 하여간.”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초반 국내 로맨스 영화 황금기를 지난 뒤에 제대로 성공하는 로맨스 영화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 넌 둘 중 하나가 성공할 거라고 보는 거야?
“둘 다 성공할 거야. 둘 중 어떤 걸 골라야 더 성공할 수 있을지가 고민인 거지.”
― 너 혹시 미쳤니? 네가 무슨 예언가야?
“아, 안 고를 거면 끊어.”
그러나 이정은 알고 있었다.
방금 지원에게 설명한 두 작품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다시 한번 로맨스 붐이 일게 된다.
― 아무리 봐도 멜로 영화는 아닌데…. 씁. 그럼 난 일단 첫사랑 픽.
“왜?”
― 너도 더 나이 들기 전에 교복 한 번 더 입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리고 원래 첫사랑은 강렬한 법이거든.
“아, 그래서 네가 중딩 때 그렇게 그 형한테….”
―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린다 진짜.
다소 시큰둥하던 지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지만, 이정은 그런 지원의 반응에 웃음을 참았다. 지금 웃어버린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끊어. 이 새끼야.
간만의 흑역사 여행을 하게 된 지원은 이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아하하, 하….”
이정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고, 우재는 그런 그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게 셋이 있으면 저렇게 유치해지는 건지….”
우재는 이정의 성격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럼, 일단 이걸로 하는 거지?”
그가 두 개의 시나리오 중 하나를 제 쪽으로 끌었다. 회사에 들고 가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네. 그거 맞아요.”
내용을 읽지 않은 우재가 단번에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영화의 제목이 지원이 골라준 시나리오의 키워드와 동일한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