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49
248화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2주가 지났다.
“후…….”
사건의 뒤처리 때문에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우선, 박건 팀장과 송태석 과장에게 보호를 부탁했던 사람들은 다들 일상으로 복귀했다.
유나 씨와 강예원도 다시 풍원한정식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고, 서해결 검사도 다시 다른 사건들을 맡으며 검사의 본분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
민지훈이 골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주니, 동생의 원수를 갚았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더라.
그리고 광철이 아저씨는 일이 마무리되자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젠 정치인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기 싫다던가.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만두고 뭘 할지 제대로 정하지도 않아놓고 은퇴는 무슨.
거기다 영남 지역에서 광철이 아저씨의 영향력은 무시 못 한다.
그냥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나 열심히 고민하면서 노후 대비나 하시라고 했다.
송태석 과장은 이젠 놓아주기로 했다.
전생에 날 워낙 막 굴려 먹어서 조금 괴롭혔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송태석은 눈앞에서 비리 증거를 삭제해주니 눈에 띄게 안심했다.
……물론 백업본은 남겨뒀다.
박건 팀장은 일이 마무리되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었다.
뭐,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다시 연락할 생각이다.
민지훈이 손을 썼는지 강화도의 항구에는 경찰들이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만약 현장이 발견되고 수사가 진행됐으면 꽤 난감했을 텐데 말이다.
사망자가 생기기도 했고, 총기와 연장이 동원된 작은 전쟁 수준의 패싸움이었으니 이슈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면 아마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박건도 등을 돌렸을 거다.
다음은 우리 SA시큐리티의 팀원들.
이쪽의 피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꽤 많았지만,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게 다 때려눕히기보단 주변 사람들을 케어하면서 싸워달라는 내 요청을 잘 접수한 팀원들 덕이다.
게다가 고광목과 황성빈.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이 두 사람이 엄청나게 분전했다는 말이 많이 들려왔다.
기특한 짓을 해준 둘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줬다.
고광목에게는 당분간 조직원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돈을 주고 황성빈은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올려줬다.
나는 고광목에게 상처를 회복하고 나면 강북을 포함해 강남까지 먹어버리라고 했다.
주철수가 전국에서 불러들인 조폭 꿈나무들과 각지의 중소 조직들. 이걸 합하면 인원이 꽤 됐다.
이것들은 내 밑에 직접 들일 수 없다. 그래서 고광목의 수하로 넣어버릴 계획이다.
전부 때려잡을 순 없는 노릇이니, 그냥 서울광목파 관리하에 두는 게 더 편하다.
그리고 요즘 고광목의 주가가 꽤 올라가고 있다. 강북을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주철수의 몰락에도 관여했다는 헛소문이 퍼진 탓인 것 같았다.
‘그놈은 계 탄 거지.’
가만히 있어도 조폭들이 받아주십사 하고 모이니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너무 욕심은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까.
갑자기 눈이 홱 돌아서 사람 좀 늘었다고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종석은 떠났다.
애초부터 선생을 무너뜨릴 때까지만 고용하는 게 계약이었기도 하고. 이쪽에서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직접 전투에 뛰어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신 닥터의 의료 트럭으로 몰래 접근하는 사람들을 족족 쏴버렸다.
그 덕에 현장에서 우리 쪽 사망자가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꽤 크게 다친 데다 마취까지 당했던 고상미도 잘 회복 중이다.
아니, 멀쩡하게 뛰어다니던 걸 보면 이미 다 나았을 수도 있겠네.
고상미는 돌아오고 나서 분함에 이를 갈았다.
DS였나, 무슨 컴퍼니에서 나온 H라는 놈이 고상미를 생포하려 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도 위험했던 상황에 춘식이가 나타나서 구해준 게 다행이었다.
녀석에게는 항구에서 같이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뭐, 지역을 이탈했어도 결과가 좋았으니.
어쨌든, 자칫하면 우리의 최대 전력 중 하나인 고상미를 잃을 뻔했다.
고세운은 부모의 죽음에 관여한 민지훈이 죽었다는 소식에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전해왔다.
내가 툭하면 뭣 좀 알아내 달라고 연락해서 그런가, 아주 단호했다.
그런데 어쩌나. 고상미는 우리 대련실에 자주 놀러 오는데.
그 해커 녀석도 송태석 과장처럼 쓸데가 생기면 다시 소환할 거다. 그런 인재는 쉽게 방생하긴 아깝거든.
아,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요새 부장님과 고상미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원래 들이대는 녀석을 부장님이 피하는 모양새였지만, 최근 들어선 꽤 자주 같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고상미가 피투성이가 되어 가며 우리를 위해 싸워준 걸 보고 마음이 조금 바뀐 건지.
아무튼, 둘이 잘 됐으면 좋겠네.
부장님도 30대 중반이 몇 년 남지 않았는데, 슬슬 결혼하셔야지.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지훈은 물고기 밥으로 던져버렸다.
괜히 후환을 남겨두긴 싫어서 말이지.
부웅-.
나는 핸들을 돌려 부드럽게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와 유나 씨의 관계도 바뀌고 있었다.
뭐랄까.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그동안은 바쁘게 움직이느라 시간이 없기도 했을뿐더러, 툭하면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니 조심성 없이 가깝게 지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유나 씨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우리 중 그나마 여자에 대해 잘 아는 배상훈에게 현재 상황을 말해주고 조언을 구했는데, 자리에 앉은 채로 30분 동안 욕을 처먹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어, 어?’
‘데이트 중에 빠져서 깡패를 잡아 족쳤다고? 연극 도중에도 자리를 비우고? 미친놈 아냐 이거?’
‘아니, 그래도 헤어질 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
‘닥치고 다시 데이트 신청해! 네가 먼저!’
크흠. 어쨌든 이런 경험이 꽤 있는 녀석이니 믿어야겠지.
그리고 안 그래도 그때의 일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유나 씨가 먼저 제안한 데이트였는데, 돌이켜 보니 내가 생각보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말이다.
또 미국에서 하루 이틀 정도 휴가를 즐기긴 했지만, 그것도 우재성의 영입이라는 문제가 껴 있어서 뭔가 휙 지나가 버린 듯한 느낌이고.
끼익-.
나는 유나 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거, 긴장되네.”
자주 얼굴 마주칠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후 처리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런지 긴장감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크흠. 아. 아.”
스윽.
룸미러로 정리한 머리를 점검했다.
“후…….”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파트 입구에서 유나 씨가 걸어 나왔다.
유나 씨는 내 차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꺼운 크림색 가디건 안에 흰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연한 색 스키니진에 캐주얼한 운동화까지.
평소 전문직 느낌의 정장류를 입고 다녀서 그런가, 또 신선하게 귀여운 느낌이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저렇게 입으면 추울 텐데.’
외투를 걸치긴 했지만, 코트를 입은 나에 비해선 추울 거다.
히터를 미리 틀어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탁.
“유나 씨.”
“아, 주혁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방금 왔습니다. 얼른 타요.”
“감사해요.”
내가 열어준 조수석 문으로 유나 씨가 쏙 들어갔다.
나도 다시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춥죠?”
“괜찮아요. 어제도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면서 그렇게 당부하셔놓고.”
“하하…….”
“주혁 씨는 어제 잘 주무셨어요? 저는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엇. 왜요?”
유나 씨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기대돼서요.”
그 말에 나는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제했다.
이젠 저게 홍조증 따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
“뭐, 뭐가 기대돼요?”
“데이트 말이에요.”
“크흠. 저도 마찬가집니다.”
“으으…….”
알고는 있어도 직접 들으니 기분이 좋구만?
그렇게 잠시간 어색하면서도 민망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럼, 식사부터 하러 갈까요?”
주제를 바꾸기 위해 꺼낸 말에 유나 씨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양식 괜찮으세요?”
“가리는 음식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좋은 곳으로 예약해뒀습니다. 기대해도 돼요.”
틈만 나면 풍원한정식으로 가긴 했지만, 이 근처 고급 식당이 거기만 있는 건 또 아니란 말이지.
오늘을 대비해 식사 후에 루트를 짜며 여러 플랜을 세워뒀다.
혹시 양식을 선호하지 않을 걸 대비해서 한식, 일식까지 준비해뒀지.
호불호가 갈리는 중식이나 다른 음식들은 제외했고 말이야.
부웅-.
나는 다시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최대한 그 사람에 관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 내가 당신한테 관심이 있다, 이걸 어필하라고. 오케이? 솔직히 내가 봤을 땐 아직 어색한 사이거든? 더 친밀해져.’
마음속으로 배상훈의 조언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부장님이랑 운동은 아직 하고 계세요?”
원래는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배우게 둔 거지만, 깡패들 여럿을 상대로 버틴 걸 보면 내 생각보다 잘 흡수한 것 같더라고.
“아, 개인적으로 저는 더 해도 괜찮은데, 부장님이 하산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요?”
원체 까다로운 부장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뭐.
“그럼 나중에 스파링이라도 해볼까요? 저도 얼마나 잘 배우셨길래 그러셨는지 궁금하네요.”
“그럴까요?”
내 제안에 유나 씨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후회하게 된다.
.
.
.
달그락.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유나 씨는 테이블에 놓이는 안심 스테이크를 보며 감탄했다.
“맛있겠다.”
“그러게요.”
우린 이미 전채 요리를 해치운 후였다.
캐비어랑 전복이 든 스프에 와인에 절인 체리가 나왔는데, 그게 기가 막히더라고.
거기에 유나 씨와 화이트 와인까지 곁들이니 최고의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씁. 아, 제가 잘라 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스윽.
유나 씨의 접시를 강탈해 투쁠 안심을 썰었다.
‘오우.’
부드럽게 썰리면서 미디움 레어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속살이 드러났다.
군침이 싹 돌았지만, 유나 씨 것부터 곱게 잘라서 다시 돌려줬다.
“감사해요.”
“뭘요. 맛보고 후기 알려줘요.”
“네.”
내 걸 써는 사이, 유나 씨는 입에 스테이크를 쏙 넣고 탄성을 질렀다.
“음……! 진짜 맛있는데요?”
“다행이네요.”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비주얼이다.
유나 씨도 부잣집 딸이라 이런 스테이크들도 많이 먹어봤을 텐데, 이렇게 반응이 좋다는 건 정말 맛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메인 디쉬를 해치우자, 레몬 셔벗이 디저트로 나왔다.
‘입이 호강하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음 코스를 위해 레스토랑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음?”
“주혁 씨. 어디 보세요?”
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자 유나 씨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쯧.’
아마 기분 탓이겠지.
안 그래도 최근 일로 워낙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터라 조금 예민하게 생각한 것 같다.
애초에 유나 씨 외모면 길거리만 걸어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돌아본다. 이 레스토랑의 손님들도 마찬가지.
식사하는 유나 씨에게 시선을 힐끗 던지는 놈들이 몇 있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유나 씨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갈까요?”
유나 씨는 밥값을 나눠 내자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 정도 센스는 나도 있지.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미리 결제해뒀다.
“밥도 먹었겠다, 커피나 한잔 마셔요. 우리.”
“그래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순간 그냥 내가 커피도 사겠다고 말할뻔했지만, 배상훈의 조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내가 하는 말이라고 다 맞는 게 아니야. 상대, 상황, 타이밍에 맞게 임기응변이 중요하다고.’
내가 알기로 유나 씨는 빚지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부장님에게 호신술을 배운 거니까.
그냥 다음에 만날 땐 그쪽이 사라 하고 내가 커피를 계산할 수도 있겠으나, 난 배상훈과의 면담으로 성장했다.
초창기의 나를 생각하면 괄목상대할 만한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다음에 또 만날 테니 상관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갑시다.”
“네!”
카페 다음으로 이어질 데이트 코스를 속으로 점검하며 유나 씨를 바로 옆 카페로 안내했다.
나는 유나 씨의 밝은 표정을 보며 속으로 뿌듯하게 웃었다.
씨익.
‘이제 연애까지 마스터해버렸구만.’
나도 내가 무섭다. 정말.
이번 생은 빌런이다
지은이 : 글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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