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62
161화. 야금술 (3)
강검, 연검, 화검, 마검, 성검을 이룩하는 과정에 담긴 진실.
무기의 파장이 사실은 억지로 키워 낸 마나의 흐름이란 깨달음을 얻은 순간.
유리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몸이 붕 떠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은 듯 상쾌함이 들었다.
‘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느낌.
그러나 오히려 더 또렷해진 의식은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인지하게 했다.
‘이건… 돈오?’
깨달음을 얻은 뒤 오는 각성 상태.
지난번에 그레타가 돈오를 겪는 걸 보고 무슨 기분일지 궁금했건만, 자신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다니.
처음으로 겪는 돈오에 대한 유리의 소감은 간단했다.
‘기분… 끝내준다!’
유리는 돈오에 든 그레타의 동공이 어째서 풀렸는지 알 거 같았다.
극상의 정신적 해방감.
머릿속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의식의 영역은 한없이 뻗어 나갔다.
최고급 침대에서 숙면을 취한다고 한들 지금보다 더 맑고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는 않으리라.
‘이 상태라면, 수백 쪽짜리 책도 단숨에 외울 수 있겠어.’
하지만 그런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유로이 날던 유리의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천장.
그로 인해 한없이 뻗어 나가던 의식의 영역이 천장에 가로막혔고, 천장이 만든 짙은 그늘이 유리의 머릿속에 드리웠다.
‘아…….’
의식을 제한당한 유리는 아쉬워했다.
동시에 이탈했던 영혼이 제 육신으로 되돌아오듯, 그의 의식 분리가 끝을 맺었다.
후욱-.
유리의 입에서 짙은 숨결이 흘러나오고,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깃들었다.
반개했던 눈을 완전히 뜬 유리.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경이었다.
“…뭐냐?”
세경도 살아온 세월이 있기에 조금 전 유리가 돈오 상태에 들어간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다만 그런 그도 쇳덩이를 핥고 돈오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세경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이에 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어디서 들은 건데 무릇 깨달음이란 사소한 것에서 얻는 게 진짜배기라고 했어. 마치 내가 이 쇳덩이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쪽에서 ‘본 게 아니고 핥은 거지’라는 테레시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물론 유리는 이를 가뿐히 무시했다.
“내가 이 쇳덩이에서 얻은 진짜배기 깨달음이 뭔지 알아?”
“굳이 그걸 내가 알 필요가 있겠냐?”
“있을걸?”
“안 궁금하다.”
“궁금해하는 게 좋을 텐데?”
“됐다.”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얼굴의 세경을 보고 유리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철괴로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각각의 철괴가 품은 고유의 마나 파장이 읽혀 들었다.
일정한 파장을 지닌 철괴.
불규칙한 파장의 철괴.
혹은 파장이 크기가 약하거나 모양이 이상하다는 둥.
철괴의 파장은 가지각색이었다.
이를 살피는 유리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 영감탱이가 여기다가도 장난질을 쳐 놨네?’
12개의 철괴를 순서대로 나열하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12개가 전부 다를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유리가 읽은 12개의 파장 중 일치하는 것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똑같은 품질의 철괴도 섞어 놓았다는 뜻이다.
스륵-.
유리가 철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장 고르고 일정한 파장을 뿜어내는 철괴.
유리는 그것을 가장 앞쪽에 배치했다.
턱-.
그는 곧 두 번째 철괴를 집어 첫 번째 철괴 뒤에 놓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턱- 턱- 턱-.
유리의 손은 빠르게 철괴 위를 오가며 그것들을 배열했다.
처음에는 유리가 하는 짓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세경.
하지만 유리가 4번째 순서로 2개의 철괴를 겹쳐 놓았을 때.
“…헛?”
그의 얼굴 가득히 자리했던 평온함에 금이 갔다.
거칠게 흔들리는 세경의 동공.
‘그… 그럴 리가?’
그러다가 유리가 6번째마저 2개의 철괴를 겹쳐 놓고.
8번째 순서로 또 2개의 철괴를 겹쳐 쌓아 버리자 그의 눈동자에서 시작된 지진이 얼굴까지 번졌다.
‘그럴 리… 없다. 이건 그냥… 그냥 우연일 거다.’
세경은 절대 아닐 거라고, 그저 이 녀석의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눈앞에 일어난 일을 부정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깃든 불안감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는 건지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세경을 흘낏거린 유리는 마지막 철괴를 집어 들어 이미 2개가 쌓여 있는 8번째 철괴 위에 내려찍듯 올려놓았다.
터엉-!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
깨져 나간 건 바로 세경의 자신감과 평온함이었다.
충격으로 경직된 세경을 향해 유리는 환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이 쇳덩어리가 나한테 그러더라. 신성한 내기에 장난질 친 작자의 대가리를 깨 버리는 건 무죄라고.”
“…….”
“자, 왼쪽에서부터가 가장 품질이 좋은 물건이야. 확인해 봐. 골족의 명예를 걸었으니… 결과에 장난질을 치지는 않겠지. 아니, 어디 한번 해 봐.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사뭇 위협적인 표정으로 철괴를 또 내리찍은 유리.
텅- 텅-.
두 개의 철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하지만 그런 유리의 협박은 세경에게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협박이 머리에 들어올 정신이 없다는 게 옳았다.
세경은 그저 멍하니 유리가 배열한 철괴를 바라보았다.
1, 1, 1, 2, 1, 2, 1, 3의 개수로 가지런히 나열된 철괴들.
세경은 그중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을 홀린 듯 집어 들고는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톡톡-.
그러다가 노려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려도 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 보고.
심지어 철괴에 귀를 대어 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져 갔다.
‘마… 맞다. 데카르트산 1등급 순철!’
확실했다.
유리가 가장 왼쪽으로 빼놓은 이 철괴는 자신이 가진 철괴 중 가장 품질이 좋은 물건이었다.
이를 확인한 세경은 바로 그 옆에 두 개를 허겁지겁 집어 들었다.
다시 신중하게 철괴를 살핀 그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이것도 맞다고?!’
같은 데카르트산 순철이나 앞엣것보다는 조금 순도가 떨어지는 물건들.
다만 그 순도 차이는 일반인이 쉽사리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했다.
그런데 유리는 정확하게 두 개의 품질 차이를 구분해서 2위와 3위로 나눠 놓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세경.
남은 철괴의 품질을 확인하는 그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시간이 흘러.
하나하나 품질을 비교해 가면 갈수록, 유리가 구분해 놓은 품질의 순위가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아 갈수록 세경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건…….”
마지막 3개의 철괴가 정확하게 똑같은 품질이란 것을 확인한 세경은 혼이 빠지고 말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어찌 이런…….”
“세상에는 종종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는 하지.”
“그럴 리 없다…… 이게… 하루 만에 될 리가 없을… 텐데?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그쪽 얼굴을 보니 결과는 뭐, 안 물어봐도 되겠네. 이번 판은 내 승리인가?”
“이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럴 리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뭘, 고작 이 정도에 그렇게 놀라고 그래? 별것도 아닌 걸로. 후후.”
히죽거리는 유리의 도발에 평소 같았으면 거칠게 반응했을 세경.
하지만 그는 자신의 42년 세월을 부정당한 현 상황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반쯤 눈이 풀린 세경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다, 다시 해 봐라.”
“뭘? 이걸?”
“그, 그래! 다시 해 보란 말이다!”
“내가 왜?”
“요, 요행일 수도 있잖느냐? 어쩌다 운이 좋아서 맞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그렇지? 그러니 다시 한번…….”
“싫은데?”
“…….”
“내가 왜? 찍었든 뭐든 결국 정답을 맞혔으니 된 거 아닌가?”
연신 피식거리는 유리를 보고 세경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다음… 다음 내기도 이걸로 하겠다!”
“어?”
“다시 해서 또 맞힌다면… 두 번째 내기도 너의 승리다!”
그 말에 유리의 눈이 번쩍였다.
‘이 영감탱이 정신 나갔네? 이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 건가?’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유리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조건이었으니까.
하여 세경의 말이 바뀌기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기, 기다려 봐라!”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경은 바닥에 널브러진 철괴를 다급히 자루에 주워 담았다.
그러고는 자루를 열심히 뒤흔들었다.
철그럭 철그럭-.
누가 봐도 철괴를 뒤섞는 동작.
이에 유리가 ‘애쓴다’라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 시선을 오해한 세경을 다급히 뒤돌았다.
절대 자신이 섞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잔뜩 성난 얼굴로 말이다.
“네놈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번만은 통하지 않을 거다!”
그리 외친 세경은 혼신의 정성을 다해 자루 속 철괴를 뒤섞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리가 지루한 얼굴로 쩍쩍 하품을 할 때쯤.
“자, 됐다!”
철그럭-.
세경이 유리의 앞에 철괴를 쏟아부었다.
이에 유리가 심드렁한 눈빛을 해 보였다.
“다 한 거야?”
“얼른 해 보란 말이다!”
“거참.”
세경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귀를 후비적거린 유리는 철괴 무더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턱턱턱-.
다시금 빠른 속도로 철괴들이 분리되어 일렬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침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1, 1, 1, 2, 1, 2, 1, 3의 개수로 늘어선 철괴.
“끝.”
유리가 가볍게 손을 털고 일어났다.
한 번 해 봤기 때문인지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에 철괴 앞으로 빠르게 다가간 세경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시간과 공을 들여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발 조금 전의 일이 요행이었기를 바라며.
유리가 틀렸기를 기도하면서.
하지만…….
털썩-.
모든 철괴를 확인한 세경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영혼 빠진 얼굴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순 없는 거다…….”
“예이예이, 그러시겠죠.”
“그럴 리가… 난 이걸 구분하는 데 42년이 걸렸는데… 그걸 하루 만에…….”
“42년?”
그제야 유리는 세경이 왜 이렇게 넋이 나간 건지 깨달았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야, 고작 이거 하나 하는 데 42년이나 걸렸다고? 꽁술 영감 야금술 쪽으로는 어지간히 재능이 없었나 봐?”
웃는 낯으로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유리.
세경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졌다.
“이건… 골족이라고 해도 하루 만에는 불가능한 건데… 하루 만에 성공한 사람이 없는 건데…….”
“아, 그래? 에이, 골족의 야금술이라고 해서 기대를 좀 했더만, 그냥 그런데? 뭐 특별한 건 없어? 이번 거는 영 시원찮은데?”
“이게 이럴 순… 없는 건데…….”
“그렇게 못 믿겠으면 한 번 더 어때? 아니면 다른 걸로 가져와 봐. 다음 판에도 비슷한 종목으로 또 해 보자고. 그럼 더 확실해지겠지.”
“그, 그렇지! 다음 판에 또 해 보면 더 확실히… 다음 판?”
흐리멍덩하던 세경의 눈에 살짝 빛이 돌아왔다.
다음 판이란 말을 작게 되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런?!”
그제야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이다.
‘저 빌어먹을 놈에게 벌써 2승을 넘겨줬구나!’
만약 이대로 다음 판만 마저 지게 된다면 이 내기는 완벽한 자신의 패배가 될 터.
그렇다면 영락없이 자신의 밑천을 털리고 말 것이다.
정신을 되찾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세경을 본 유리는 작게 혀를 찼다.
“쳇, 쉽게 끝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고 입술을 삐죽이는 유리를 보고 세경의 두 눈에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저, 저 싹수없는 애새끼가!’
세경의 머릿속에 조금 전 유리가 했던 이야기가 한발 늦게 맴돌았다.
‘뭐라고 했냐? 골족의 야금술이 그냥 그렇다고?’
그의 주먹이 우드득 말려들었다.
‘이건 이제 더 이상 나와 저 녀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골족의 명예가 달린 일이나 다름없었다.
철괴를 자루에 쓸어 담은 세경이 유리를 노려보았다.
“…세 번째 판은… 내가 준비하고 연락을 주마.”
“그러시든가.”
얼마든지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유리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이를 마주한 세경은 이를 갈았다.
뿌득-.
‘특별한 걸 원한다고 했냐?’
오냐, 그렇다면 알려 주마, 네놈이 그토록 원하는 특별한 기술을!
뿌드득-.
이를 간 세경이 유리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자루를 들쳐 메고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건 가볍게 2승을 차지한 승자의 여유였다.
그랬던 미소가 옅은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거 같다.’
세경이 3차전을 뒤로 미루는 것을 유리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이유.
그건 얼른 그를 보내고 이번 돈오의 결과를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돈오의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스르릉-.
유리가 백색의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