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95
195
* * * *
샘이 많고 뛰어난, 하늘의 적이여.
그대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자비를 지겨워하네.
그대는 가장 고약한 친구일 뿐.
– 미켈란젤로의 수많은 소네트 중 하나에서 일부 내용 발췌 –
* * * *
양선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예고없이 쏟아지던 소나기가 또 내릴까봐서였다.
다행히 비는 안 내릴 것 같긴 한데. 양선구의 시선이 하늘에 오래 머물렀다.
푸른 하늘에는 해도 없고, 구름도 없었다. 그저 푸른색만 가득했다. 오후 여섯시가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여름이라고 하늘이 푸르렀다.
비를 오게 하고 싶어도 안 올 것 같았다.
‘이거 괜한 짓을 했남?’
양선구의 시선이 밑으로 떨어졌다. 혹시라도 작업하는 도중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쌓이지 않고 흘러가게끔 파놓은 물길과 비를 막아줄 간이 천막이 시선에 닿았다.
뭐, 천막 뿐인가?
마당에다가 야외용 무대라도 설치한 것처럼 높이 있는 넓은 단상에 기온차가 심해지는 시기를 대비하여 설치한 손풀기용 난로까지.
양선구가 걱정스레 준비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을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건데···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남.’
조각용 돌에 물이 묻는 건, 제일 마지막 때 한 번이면 족했다. 바위도 빗물로 두들기면 언젠가는 구멍이 뚫리는 법. 섬세한 작업으로 괜히 건드리면 낙엽처럼 훅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조각을 세공하고 묘사하는 강석에게 비는 천적이었다.
양선구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늘어진 눈으로 마당을 응시했다. 단상으로 된 넓은 작업공간 위에 늘어져있는 조각용 석재가 시야에 잡혔다.
강석이 그때 요청했던 조각용 석재였다.
하얀 듯 하얗지 않은 상아와 밀빛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조각용 석재, 대리석이 4m 위까지 치솟은 천막 아래에 놓여 있었다.
평소 강석이 주문했던 대리석들에 비해 높이가 낮았다. 폭도 가로길이도 굳이 따진다면 점점 더 큰 작품을 작업하는 강석의 패턴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고 넓고, 길었다.
높이도 나름 1.5m는 훌쩍 넘었고 폭은 3m 가까이가 되었으며 가로길이또한 3m를 살짝 넘었다.
원래는 눕혀서 작업하지 않고 세워서 벽 대신 박아넣어 조각을 하여 고부나 저부조 벽을 만드는데 쓰이는 용도로 잘라낸 대리석인 만큼 어디가서 작다는 소리를 들을 사이즈는 아니었다.
‘강석이 작업한다니까 상대적으로 작게 보여서 그렇지. 그나저나 이미 유리로 거대한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들었긴 한데···’
그 유리로 된 작품을 이 조각하고 합칠 생각인가.
합친다면 강석이 평소에 작업하는 크기만큼 되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가던 양선구가 어느 순간, 바람빠진 웃음을 흘렸다. 크면 또 어떻고 작으면 어떻고, 높으면 어떻고 낮으면 어떤가.
그게 뭐든 강석의 작품일 텐데. 강석의 드로잉 한 점 한 점이 아쉬워서 찢어지고 구겨진 것을 핀셋으로 살살 펴서 액자에 보관해 비엔날레에 같이 걸어놓은 것이 바로 양선구였다.
작다고 해서 대충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귀하지 않은 작품이 아니었다. 누가 만들었냐, 무엇을 느끼게 하냐, 그것이 중요할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강석이 유리와 돌을 한 작품에 이용한다면 그건 필히 성공할 작품이었다.
“그렇고 말고.”
양선구가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주변이 조용했다. 백색소음조차 사라진 공간. 저 너머에서 자동차소리가 들려왔다. 양선구가 귀를 쫑긋였다. 자동차라고 해야 할지 트럭이라고 해야할지 커다란 소리였다.
“···왔구나!”
양선구가 자리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냅다 떼어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빨리 빨리 채근하듯 움직이는 양선구의 손에는 전동 조각기가 하나 들려있었다.
대문 쪽으로 걸어가던 양선구의 시선이 잠깐 제 손에 들린 전동 조각기 쪽으로 향했다. 일전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 ‘유리 작업이 끝나는대로 올게요.’
– ‘그러든감. 편하게 써.’
– ‘감사합니다.’
– ‘더 필요한 건 없고?’
– ‘···그러면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석이 일전에 말하기를, 유리 작업이 끝나면 양선구가 있는 한옥으로 온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부탁하기를 전동 조각기를 특별 주문하고 싶다고 했고, 제 손에 들린 것이 그 주문의 결과물이었다.
겉으로 모양만 따지자면 귀를 팔 때 쓰이는 귀이개 같이 생긴 조각기였다.
진짜 귀이개처럼 엄청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작았다. 겨우 8호 붓 정도 될까 싶은 크기.
결을 표현할 때나 섬세한 작업을 할 때 쓰이는 끌이나 꼬치형태의 전동 조각기랑 그라인더 날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도대체 이런 신기한 모양이 왜 필요한 걸까.
걸으면서도 양선구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의문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 거대한 무언가를 싣고서 트럭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두 인영은 분명 조동범과 강석이리라. 양선구는 직감했다.
양선구가 손을 흔들었다.
“석아!”
.
.
.
포장을 다 풀어내 단상에 올릴 때까지 양선구는 유리로 만든 연꽃에 달라붙어 있었다. 가까이에서만 겨우 보이는 분홍색 색감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마치 장미석영이나 핑크소금에서나 보일 것 같은 아주 옅은 것에서 오는 펄감이 좋았다. 진주를 이리저리 굴려볼 때 겨우겨우 보일까말까한 그 분홍색 잔그림자를 닮아있었다.
“이거 꼭 동화에서 나올 것 같은 연꽃이구나.”
금빛이 잔잔히 흘러가는 흰 연꽃이 매우 동양적이었다.
양선구의 시선이 연꽃 옆에 넓다랗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밀빛 대리석에 닿았다. 같은 하얀색이지만 색깔이 척 보기에도 달랐다.
연꽃이 선비의 하얀 한복 같다면 대리석은 짚신 같았다.
‘저 대리석으로 연꽃을 받치려고 하는 건감?’
양선구가 짧게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근질거려 궁금증을 내뱉고 있었다.
“그나저나 색감은 일부러 이렇게 연하게 한 이유가 있남?”
오묘한 색감이었지만 이렇게 연하면 여러 작품이 있을 때 눈에 확 띄지는 않을 것이다. 한 작품 한 작품 다 살펴보는 게 공모전이지만 또 한 작품 한 작품 자세히 살펴보기 힘든 게 공모전이기도 했다.
“이거 뭐라했지. 테라리움? 이거 때문에 옅게 한 건감? 식물이 아직 자라지 않아서 흙은 아래 연꽃잎들에 가려지고, 식물은 보이지도 않아서 이게 더 자란 상태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작품 제출 날짜가 언제였지? 그때까지 더 자라남? 예쁘긴 해도 너무 유려하고 조용한데···”
강석이 실력만으로는 당연히 대상을 따야 마땅했다. 그러나 눈이 뱁새보다 작은 녀석들이 개떡같이 심사를 할 지도 모르는 일. 별다른 이슈를 만들지 못하면 눈가리고 아웅 하듯이 심사를 할 수도 있었다.
‘이거 강석이 작품 접수하는 날에 기자들이라도 동원해야 하남?’
양선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걱정과 호기심을 담은 채 강석을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강석이 엷은 미소를 얼굴 위로 띠우며 말했다.
“뒤로 나와보시겠어요?”
“음? 뒤로?”
양선구가 강석의 말에 몇 발자국을 뒷걸음질 쳤다. 강석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였다.
“이만큼 가면 되남?”
“조금 더 뒤로요.”
“조금 더?”
양선구가 뒤를 살피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재차 또 뒷걸음질 치는데 양선구의 고개가 살짝 기울여졌다.
“뭔가 더 진해진 것 같지 않남?”
“···몇발자국만 더요.”
“음?”
양선구가 다시 뒤를 살폈다. 아직 걸어갈 공간이 많이 남아있긴 했다. 근데 도대체 얼마나 더 가라는 건감. 양선구가 연꽃 옆에 서있는 강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가라는·········, ···!”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양선구의 시선은 어느새 강석이 아니라 연꽃에 가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아까는 분명 투명하고 엷은 불투명하면서도 투명한 연꽃이었을 터인데 진했다.
제일 끝에는 빛이 투영하듯 투명하고, 그 밑에는 투명한 흰색, 그 밑에는 아예 불투명한 흰색, 그리고 거기에 천천히 옅은 분홍색이 섞이기 시작하더니 연꽃에 금고리가 만들어지며 그 아래로 분홍빛이 자홍빛처럼 진하게 번져갔다.
백련(白蓮)이 홍련(紅蓮)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느낌이었다.
양선구가 뒤로 조금 더 이동했다.
홍련이 완전히 자홍빛으로 물들은 채였다.
앞으로 이동하자 자홍빛의 물이 빠지듯 자홍은 분홍이 되고, 분홍은 연분홍이 되고, 나중에는 흰색에 끄트머리에 살짝 분홍색이 되더니 불투명한 흰색을 거쳐 투명한 연꽃으로 돌아갔다.
“허어···!”
양선구가 감탄을 뱉으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소맷자락과 바짓단이 바쁜 걸음길에 채여 펄럭였다.
부채처럼 펄럭펄럭, 앞으로 뒤로, 뒤로 앞으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다시 앞으로 걸어온 양선구가 입에 바람이 찰듯한 기세로 연꽃을 돌아보았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그랬다.
색이 빠졌다, 색이 생겼다, 색이 빠졌다, 색이 생겼다.
마술이 따로 없었다.
“이게 무슨 신묘한 조화란 말인감···?”
이걸 어떻게 했남. 양선구가 알려달라는 듯 강석을 바라보았다. 강석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전통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한 겁니다. 투명한 색유리를 겹치다보면 가까이에서 볼 때는 투명한 유리인데 뒤로 가면 색유리 조각들이 빛을 머금어 그 색이 진해지면서 겹쳐진 정도에 따라 색감이 바뀌는데 그걸 현대적인 접착 기법을 섞어 응용해봤어요.”
별 거 아니라는 듯 강석이 덤덤하게 내놓은 설명에 양선구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썹 역시 갈매기처럼 휘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흰 수염을 쓸지도 못할 정도로 양선구의 몸은 굳어 있었다.
‘···전통 모자이크 기법으로 이게 된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걸로 이런 게 가능하다면 왜 양선구는 이런 걸 보지 못했나. 이런 마법적인 효과가 가능하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이런 기법을 활용할 게 분명했다.
양선구가 유리 공예를 전공한 조동범을 바라봤다.
조동범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전통 모자이크 기법으로 겹쳐서 만들 수 있는 건 한정적입니다. 원래는 기독교 미술에서 성당이나 교회에 설치된 스테인글라스에 사용하던 기법인데···이게 말처럼 쉬우면 왜 다들 이걸 안 하겠습니까? 애초에 그 기법이 투명한 색유리를 겹치는 걸로 만들어도 노란끼가 남아서 사용이 한정적이게 된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다채로운 흰색에서 분홍색, 자홍색으로 변화하는건 말도 안된다고요.”
선생님이 이상한 겁니다.
저는 이게 되는지도 몰랐다고요.
조동범이 곡선이 들어간 타일을 겹치는 데도 왜 엷은 분홍색으로 만든건지 모르겠다고 한 게 그래서였다. 상상조차 못했다.
금가루를 뿌린 이유가 그 노란끼를 잡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 투명한 유리에 떠다니는 금가루도 미국 유리제조회사 특수기법인데 그건 또 어떻게 쉽게 하는 거냐고.’
조동범은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강석의 동영상이 이번에 풀리는 걸 발목을 잡고 말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영상 속에서 방법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건 유리 제조회사들에게 새로운 신세계를 열어줄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얇은 유리가 몇겹이 올라갔는데도 양선생님은 눈치도 못채고 있잖아. 현대적 접착 기법이라고 해놓고 미래적 접착기법을 사용한 거 아니냐고.’
영상 하나 올라가는 날에 한 회사가 50년 가까이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 기법 하나가 털릴 구멍이 생기는 거고, 또 동시에 전통 모자이크 기법은 새로운 방향성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엄청난 사건인데 강석만 평온했다.
양선구와 조동범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때였다. 강석이 입꼬리를 작게 씰룩이며 물었다.
“이 정도면 눈에 확 들어올 것 같죠?”
눈에 확 들어오겠냐고. 들어오고 말고. 눈에 토마토 투척하는 수준으로 들어올거다. 다들 눈에 테러를 당할 것처럼 눈을 비비며 연꽃 앞을 앞뒤로 움직일 게 분명했다.
마술쇼도 아니고. 양선구가 미술을 하랬더니 마술을 해놓은 강석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걱정이 무색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그래. 눈에 확 들어올 것 같다.”
좋네요. 강석이 옅게 웃었다. 얼마나 옅게 웃는지 가까이에서 보아도 웃고 있다는 걸 못 느낄 정도의 웃음이었다.
양선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석이 웃는 건지 웃는 게 아닌지 가늠하는 사이. 양선구의 손에 들려있던 전동 조각기를 강석이 자연스럽게 받아갔다.
“음?”
양선구가 전동 조각기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걸로 뭐하게? 그런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강석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이제 다음 작업하려고요.”
연꽃이 피었으니 연꽃을 받칠 호수도 필요한 법.
강석은 양선구에게서 산 밀빛의 대리석으로 거대한 연꽃이 피어날 호수를 만들어줄 참이었다.
작품의 이름은 이미 정해둔 참이었다.
.
196. 한 사람이 행복하려면 또 한 사람이 없어져야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