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7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76화
리빙 아머 (1)
“흐응… 한국에도 이런 장소가 있었네요.”
이사벨라와 함께 도착한 용현동 거리.
무너진 건물 잔해와 바닥을 나뒹구는 쓰레기, 곳곳에서 쿱쿱한 지린내가 진동하는 거리는 그녀의 말마따나 나름 ‘안전 국가’라 평가받는 한국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뭐, 여기도 피해가 덜했다 뿐이지 없었던 건 아니니까.”
오진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주변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국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았다.
그가 각성자가 되기 전 살았던 집이 딱 이런 분위기의 거리에 있었으니까.
‘이사벨라한테는 좀 낯설려나.’
그녀는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가의 영애였다.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느낌의 거리는 익숙하지 않으리라.
“이런 곳은 좀 낯설긴 하지?”
“음? 아아, 그런 건 아니에요.”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봉사하러 이런 곳엔 자주 갔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이사벨라는 집시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자주 했었지.
그 이후에 본 그녀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양반이에요.”
“…이게 양반이라고?”
“지금에야 좀 나아졌지만… 이탈리아는 상황이 더 심각했거든요.”
쓰레기와 오물이 나뒹구는 이 유령 거리보다 상황이 심했다고?
“이탈리아는 괴수 사태가 일어난 후 줄곧 나라 전체가 마피아 조직에 지배를 받았거든요.”
마르코 페밀리를 말하는 건가.
“이런 거리 위에 쓰레기와 오물에 뒤섞여… 시체들도 같이 나뒹굴고 있었어요. 어린아이랑 어른, 노인 가릴 것 없이요.”
“그건….”
확실히 여기보다 상황이 심각했다는 게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사벨라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과연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이 표정은 ‘로마의 성녀’를 연기하기 위한 가면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의 얼굴일까.
‘모르겠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사벨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었다.
로마의 성녀가 아닌, 흑성회의 거머리 여왕이 아닌.
‘이사벨라 콜그란데’라는 여인 자체에 대해서.
“이사벨라는 왜 수호성에 들어온 거야?”
“음? 아까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요? 오진 씨가 수호성에 몸담으셨다는 얘길 듣고 제가 먼저 들어오고 싶다 연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왜 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온 거냐고.”
이제까지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의문.
왜 이사벨라는 이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물론 자신의 ‘피’에 그녀가 큰 집착을 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 가지고 이 정도로 할 이유가 있을까?
막말로 말해 자신의 피만을 원하는 거라면 어디 납치해서 가둬둔 후 피만 뽑아 마셔도 상관없다.
“오진 씨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 이유만으론 안 되나요?”
별처럼 아름답게 미소 짓는 이사벨라.
피에 미친 마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그 아름다운 미소 앞에 오진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처음이었거든요.”
“처음이었다니?”
“오진 씨처럼 절 지켜준 사람이요.”
이사벨라는 과거를 회상하듯 고개를 들어 칙칙한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문 사람들도 있었을 거 아냐?”
애초에 전문 경호원까지 따로 있는 이사벨라에게서 ‘처음으로 지켜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으음. 그분들은 어디까지나 대가를 받고 절 지켜주고 계신 거고요. 오진 씨는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오진 씨가 처음이었어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절 지켜주신 분은.”
이사벨라는 그렇게 말하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처음이었다, 라.’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 하나.
“…가족은?”
“후후훗.”
이사벨라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오진 씨는 저희 가문에 대해 잘 모르시겠군요.”
“무슨 말이야?”
“콜그란데 가문은 자식한테 어떤 보호도 해주지 않아요. ‘살아남기’ 전까지.”
“…….”
끈적한 불쾌함이 서린 목소리.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설명을 요구했다.
이사벨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콜그란데 가문의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위험에 노출돼요. 암살이라든지 납치 같은 거요.”
“그런데 가족이 아무 보호도 안 해준다고?”
그 정도면 사실상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론 더 지독한 상황이겠지.
적어도 오진은 암살이나 납치 위협을 받으며 자란 건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열 살 전까지만 가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요. 그 이후로는… ‘후계’로 지목받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죠.”
“븅신 같은 가문이네.”
“…….”
오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빠꾸 없는 평가에 이사벨라는 토끼 눈을 떴다.
“왜?”
“아, 아뇨. 저희 가문에 대해서 그렇게 적나라한 욕을 하신 분은 처음이라서요.”
이사벨라는 오진이 내뱉은 욕설을 몇 번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븅신 같은 가문… 후후. 아하하하!”
기어코 웃음을 터트린 이사벨라.
이제까지 본 이사벨라의 웃음 중에서 가장 ‘진짜’ 같은 웃음이었다.
“맞아요.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죠.”
과거형으로 말하는 걸 보면 괴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다 죽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거나.
이사벨라는 너무 웃어 눈물이 살짝 고인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로 지목받지 못한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모두 가문에서 제명되고 강제로 추방돼요.”
“땡전 한 푼 없이?”
“땡전? 아, 돈 말씀이군요. 네 맞아요. 그냥 말 그대로, 길거리에 버려지게 돼요. 그것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머나먼 외국 땅에.”
“…허.”
오진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엔 별 미친 가문이 다 있구만.
“그럼 이사벨라 네가 후계자가 되고 나서….”
“예. 제 언니도 그렇게 가문에서 버려지게 됐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이사벨라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사벨라는 평소와 같은 순박한 미소를 머금으며 오진의 팔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헤헤. 이제 제가 왜 그렇게 오진 씨를 볼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아시겠나요?”
“으음.”
오진은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침음을 삼켰다.
지금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이 모두 자신을 안심시키게 만들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걸 수도 있겠지.
‘이사벨라의 정체는 흑성회의 집행관이니까.’
거머리 파벌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 알았어.”
한 번쯤은.
그녀의 말에 속아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서 마수 찾기를 시작해요!”
이사벨라가 씩씩한 목소리로 외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서포터가 그렇게 먼저 가도 되는 거야?”
“아.”
짧은 탄성을 흘리며 얼굴을 붉히는 이사벨라.
“부, 부끄러워서 좀 흥분했어요.”
“그런 것치고는 꽤 적극적이던데.”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이사벨라가 허둥지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오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지나 앞으로 나섰다.
이제 떠들 만큼 떠들었으니 그녀의 말마따나 마수 추적을 시작할 때였다.
‘눈에 띄는 흔적은 없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실시했지만.
애초에 워낙 망가져 있는 거리였다 보니 마수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 찾을 수 없었다.
“근데 어떤 타입의 마수일까요?”
“글쎄. 이 정도로 눈에 띄는 흔적이 없으면 몸집이 큰 놈은 아닐 것 같은데.”
만약 10미터, 20미터가 넘는 덩치를 지닌 마수였다면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최대한으로 잡아도 사람 크기, 정도려나.’
인간과 비슷한 체형의 마수가 드문 건 아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일단 좀 더 돌아다녀 보자고.”
“아, 다른 조에선 연락 없나요?”
“아직까진.”
추적을 시작한 지 30분이 흘렀지만 통신용 구슬은 한 번도 반짝이지 않았다.
“일단 30분 정도 더 찾아보고 연락해 보자.”
“네, 오진 씨!”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사벨라.
그 모습이 마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이사벨라와 함께 30분을 더 주변을 수색했다.
맡은 구역의 수색이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쉬이이이익.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마치 가스관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오진 씨.”
“응.”
오진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쇠막대기를 꺼냈다.
차르르르, 착!
마력을 흘려 넣자 쇠막대기가 창의 형태로 변했다.
“버프를 걸어드릴게요!”
이사벨라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지팡이 끝에 박힌 금빛 보석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와 오진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내상으로 인해 아릿한 통증이 남아있던 그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이걸로 내상을 완전히 커버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일단 싸울 수 있는 수준까지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게 가능하리라.
-철컥, 철컥.
뒤를 이어 울려 퍼지는 쇳소리.
전신이 쇠로 이뤄진 갑옷을 입고 걸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오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창끝을 향했다.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
골목길 하나 차이로, 마수가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온다.’
파지지직!
앞으로 내민 창끝에 푸른 뇌전이 타올랐다.
그리고.
쉬이이이이익.
튜브에 바람이 빠지듯.
골목길에 울려 퍼지던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히 골목길 너머로 달려갔다.
무슨 환청이라도 들렸던 건가.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에 섬뜩하게 내리깔리던 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발을 박찼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달려 마수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1분 정도를 정신없이 달렸을까.
허물어진 담장 벽을 가볍게 점프해 넘어갔을 때.
-찰박!
끈적한 액체가 튀어 오르는 소리.
익숙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건.’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보니 흥건한 피 웅덩이가 바닥에 고여있는 게 보였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의 중심에는.
“…씨발.”
반으로 쪼개진 제갈소영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오, 오진 씨 이건!”
뒤늦게 달려온 이사벨라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겉모습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진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있는 모습을.
‘설마… 아니지?’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상상.
오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사벨라 쪽으로 향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