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28
328. 너는 누구의 편인가(9)
마족들의 공세에 기어이 성문이 열렸다.
그 직후 놈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올 것 같던 놈들이 갑자기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며 궁으로 오는 것이 지연되고, 끝내는 그냥 물러갔더랬다.
‘그럴 만도 해.’
누가 봐도 제국의 몰락은 확정된 상태였으니까. 굳이 귀찮게 확인 사살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겠지. 그보다는 적이 되어 버린 위협적인 아군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리라.
‘제국에… 반란이 일어났으니까.’
성문이 열리자 반란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사안이긴 했다.
엘피디우스 데세르트는 그간 폭군이라 자처하던 숙부님보다 더 독단적으로 고집을 부리며 움직였다. 이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반란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현 제국의 황제이자 마지막 남은 핏줄은, 조용히 잔에 술을 따르며 조소를 지었다.
‘숙부님께서는 의견 충돌이 있으면 설전을 벌여 납득할 수밖에 없게 만드셨지만, 난 아예 말조차 섞지 않았으니.’
귀족들의 반발은 무시했다. 참다못해 직접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도 황제의 권위로 짓눌러 버렸다.
전쟁 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승패가 확정된 지금, 죽을 땐 죽더라도 무능한 폭군의 목은 따고 죽겠노라 들고 일어난 것일 테고.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태연히 앉아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됐네. 자네들이나 피하면 되겠군.]황제를 대피시키고자 한 이들이 하필이면 제가 끊긴 통신기를 붙잡고 있을 때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몇 분만 더 일찍, 알레테아가 살아 있을 때 왔다면 어디로든 대피하려 했을 텐데.
반역자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든, 마족들이 성문을 열었든 이젠 관심 없다. 더 이상 답이 돌아오지 않는 통신기를 시야 밖으로 밀어낸 채, 잔을 느리게 흔들었다.
“……재상.”
내리깐 눈은 담담한 기색과 달리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네는 사람들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제 앞에 서 있는 재상을 불렀지만, 사실상 이건 독백이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말이 지나친 차분함을 품고 흘러나왔다.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네. 좀 더 깊게 파고들어 설명하자면 죽음으로써 소중한 모든 것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세라는 가능성을 모르기에, 역으로 ‘영원한 이별’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인의 죽음뿐만 아니라 소중한 이의 죽음도 두려워하는 것이네.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더 타격이 세거든.”
“…….”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지. 그건 사람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어. 내가 앞서 말한 상실감은 보통 이것으로 메워 버틸 수 있겠지만…….”
……재상.
잔을 든 채 고개를 돌려 아르달을 보았다. 복잡한 눈빛을 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품은 것은 단 하나의 바람이었네. ‘가족과 함께하는 것’. 그게….”
“…….”
“……그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나?”
힘겹게 나온 음성은 물기 대신 건조한 체념을 담고 있었다.
숙부님을 잃고, 그 빈자리를 동생과 채우며 버텼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동생마저 잃었으니, 난 무엇으로 버텨야 한단 말인가.
상실감을 메울 수 있는 것이 없다. 더해서 엘피디우스는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 살아갈 자신 또한 없었다.
‘숙부님의 죽음도, 알레테아의 죽음도 모두 나 때문이니.’
죄책감을 덜어 주지 않아서, 제대로 말리지 못해서. 돌이키지 못할 과거의 온갖 실수가 머릿속을 스친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을 눈앞에 두고 차분히 잔을 기울였다.
서늘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이윽고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엘페디우스는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아직 남은 말을 뱉었다.
“이 나라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내 머리를 가지고 장난질을 쳐도 좋아.”
“……사후의 육신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은 선황이나 폐하나 똑같으시군요.”
“그런가? 그것참 듣던 중 기쁜 소리군.”
“…….”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 전까지 독배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빈 잔을 보던 재상의 시선이 즉각 엘피디우스의 입가에 닿는다.
그것을 손등으로 몇 번 훔치던 나약한 청년이 이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짧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작아진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나라를 이어받든, 아예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우든 상관없으니 숙부님의 이름만 역사에 남겨 주게. 나라를 망친 못난 조카로서 이 정도의 속죄는 해야 도리 아니겠어.”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아예 잊혀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두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잊혀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러니까.
“나는 잊히더라도…….”
못난 후대에 의해 몰락한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 그 정도만이라도 기억되었으면 한다.
가만히 듣던 재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속죄는 본인이 하셔야지요. 타인을 통한 대리 속죄라니, 마지막까지 이기적이십니다.”
“…….”
“폐하?”
“…….”
“……폐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산화했던 전 황제와 달리 이번 황제는 누구보다 조용하게 가는 모양이다. 이런 점은 또 전대와 다르달까.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 하나만 보다 갔으니, 어찌 보면 이 또한 한결같다 할 수 있겠지.’
황족들이 하나같이 고집이 세서는.
……입이 쓰다. 재상은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선을 내린 채 낮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질을 쳐도 좋다 하신 건 폐하이시니.”
들어오자마자 고막에 때려 박히는 충격적인 발언에 린델 라이너가 흠칫했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실례지만 재상님, 방금 그 말은….”
“……폐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런…….”
꺼져 버린 통신기를 붙잡고 병사들을 물릴 때부터 예상하긴 했다. 책상 위의 빈 잔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황제, 그의 입가에 묻어 있는 피를 확인한 눈이 착잡한 기색을 띠고 가라앉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제 발언에 자신은 전혀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러냐 답하는 어린 청년이 떠오른다.
그리고 린델은 들어오자마자 들은 발언의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 당신의 머리를 이용해 반란을 잠재우라 하셨군요.”
“네, 그리고 이를 이용해 권력을 쥐라는 뜻 역시도 내포되어 있을 겁니다. 이 나라를 제게 맡기셨으니까요.”
엘피디우스 데세르트는 최악의 황제였으나 최악의 인간은 아니었다.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정상적으로 자리를 이어받기만 했어도 그리되었겠지. 솔직히 이렇게 엇나간 것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황제가 된 시점이 이십 대 초중반쯤이었으니까.
‘선황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황제가 되기엔 과하게 젊긴 하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과하게 젊은 나이로’, ‘급하게’ 황제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 수도마저 옮긴 데다 각 권력의 주축들이 죽어 알고 있던 정보는 쓸모없어진 상황이니.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재상 아르달은 황태자 시절의 찬란한 청년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린델 라이너가 물었다.
“황제가 될 생각이십니까?”
황제의 머리를 이용해 권력을 취한다는 것은 새로운 군주가 됨을 뜻한다.
“……‘황제’는 모르겠고, 일단 이 나라는 어떻게든 유지해 보고자 합니다.”
“이 나라의 이름이 ‘제국’인데, 이를 유지하면서도 ‘황제’는 모르겠다니……. 혹, 다른 방계를 찾아 올리시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현재 황족의 핏줄은 남지 않았다.
많이 희석되어 남이나 다름없는 방계를 힘들게 찾는다 해도 제대로 된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아 지금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버티기 어렵겠지.
“제국의 뒤를 잇는 나라를 세울 겁니다.”
“아, ‘왕’이 되시려는 거군요.”
“‘데세르트’의 혈족인 자가 ‘황제’를 자칭해도 다 무너진 나라가 무슨 제국이냐며 공격받을 상황에서 ‘데세르트’가 아닌 이가 함부로 황제를 자칭해서는 집중 공격만 받을 테니까요.”
에스페라네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가 무너졌다.
인간계 정복이 코앞이라 그런지 마계에 붙었던 잔챙이 왕국들도 버려진 상황이다. 군단장들을 비롯한 주요 병력은 삼국을 노리느라 없지만 다른 마족 병사들이 혼란을 틈타 짓밟았다고 했던가.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고, 땅따먹기가 시작될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나라가 세워지고 덧없이 무너지며 합쳐지고 분열되길 반복하겠죠.”
인간계는 갓 국가가 세워지기 시작한 시기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제국을, 황제를 자칭하면 즉시 모든 세력의 집중 공격을 받겠지. 엘피디우스의 바람대로 나라를 유지하여 역사에 에도아르도를 남길 생각인 아르달로서는 사양하고 싶은 상황이다.
……뭐, 그전에 인간계를 무대로 한 마족들의 전쟁이 잘 끝나야겠지만.
‘보아하니 내부 분열이 일어난 것 같던데, 이대로 자멸해 버렸으면 좋겠군.’
그게 아니라면 마계가 인간계를 집어삼킬 테니 우리는 다른 방향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 터.
왜 남의 땅 위에서 저들끼리 싸우는 건지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나쁠 건 없는 상황이다.
서로 싸우던 마족들 중 일부가 영웅과 데온 하르트가 맞붙는 곳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그 뒤를 쫓았다는 마지막 보고를 떠올리며 아르달은 그곳에서 2차전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힘이 없으니 이런 별 황당한 일도 다 겪네.’
싸울 거면 마계에서 싸울 것이지.
덕분에 나라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필수 요소는 역시 힘, 즉 군사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군사력을 늘리기 위한 방안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데, 린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데… 이 나라를 기반으로 움직일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황제의 머리를 잘랐다 한들 과연 귀족들이 따르려 들까요? 실례되는 발언인 걸 알지만 재상님은…….”
“평민이죠. 하지만 재상입니다. 저는 8년 전쟁 때도 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했죠. 이 점을 이용한다면 안정을 바라는 제국민들과 일부 귀족들은 저를 지지할 겁니다. 어차피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모든 초대 왕과 황제들은 평민이었잖습니까. 그저 무능한 후대가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초대의 업적을 핏줄로 돌려서 신격화했을 뿐이고요.”
“…….”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귀족들의 ‘푸른 피’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굳어 버린 인식을 가진 귀족들이 그리 쉽게 받아들일 리가….
“린델 경.”
아르달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인 린델 라이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
“제 부족함을 채워 주셨으면 합니다.”
린델 라이너는 정통 귀족가의 후계자다. 조만간 자리를 물려받을 예정이니 그가 지지해 준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테지.
“…….”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한다.
인생 최대의 갈림길에서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가만히 손을 내려다본 것도 잠시.
“……기꺼이.”
린델은 손을 맞잡았다.
아르달이 손에 가볍게 힘을 주며 부드러이 눈을 휘었다.
“받아 주셔서 기쁘군요. 감사합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다른 무능한 이들보다 재상님의 곁에 있는 편이 더 살 가능성 높아 보이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