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
학생의 본분 (3)
의 전개는 아직 초반이다. 당연히 ‘므네모시네의 문’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는 상태.
그 주변에서 몇날며칠 술을 퍼마셨지만 문이 열린 흔적이라곤 보지 못했다.
‘기억된 공간’은 ‘므네모시네의 문’을 통해서만 연결되는 일종의 던전.
훗날 던전 클리어의 보상으로 받을 스킬을, 아무런 개연성 없이 주인공에게 선사하는 게 작가의 뜻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같은 원고를 아홉 번 개작할 만큼 집요한 저자가, 이런 뜬금없는 전개를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건 차라리 오류에 가깝게 느껴져.’
클레이오의 뇌리에 지나간 정보창의 내용이 떠올랐다.
[―에, 개정 이전의 문단 일부가 무작위로 뒤섞입니다 ]‘저 성흔은 최종고에, 이전 버전 원고의 뒷부분이 섞인 결과인 거야!’
원고에서 아서는 필생의 전투를 몇 번이나 치러낸다.
하지만 또다시 원고가 뒤섞여, 중급 검사인 아서가 나중에 만나야 할 강적과 지금 맞닥뜨리게 된다면?
성흔이 아니라 치명상이 생겨난다면?
늘 이번처럼 운이 좋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주인공이 죽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편집자 권한’으로 만져본 원고는, 이제 도저히 다시 쓸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했다. 펜이 닿기만 해도 구멍이 날 정도였다.
‘저자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게 종말 아냐?’
클레이오는 이제 이 원고 속에 엮인 몸이었다. 나갈 실마리도 전혀 안 보였다. 그 와중에 원고 속 세상이 붕괴해버린다는 가능성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재산이고 군대고 중요한 게 아니게 되잖아. 그건 안 돼.’
계속 말을 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금 분이 난 듯, 아서는 클레이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너도 참 지독하다. 여기까지 와서도 입을 안 여네. 내가 레오일 땐 잘만 어울려 놓고 말야. 이쪽이 아서 리오그난인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
아서가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의 손에서 어두운 먹색 광채가 터져 나왔다.
약속이, 어김없이 금빛을 뿌리며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아서 리오그난이 ‘전경화’ 스킬을 사용합니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00:00:39/00:00:40]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는데, 그림자조차 없는 공간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아서와 클레이오가 마주선 곳은 무대 한복판이었다.
아서의 뒤편으로 부서져가는 석조 기둥이 보였다. 망연히 돌아본 등 뒤로는 반원형의 객석이 높이 쌓아올려져 있었다.
원고를 읽었다 한들 그것이 생생한 현실로 펼쳐질 때 텍스트와 실제를 짝 지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정말로 ‘전경화’야. 그 원형극장.’
여전히 왼손으로 클레이오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아서는, 차갑고 낯선 눈으로 클레이오의 옆얼굴을 살핀다.
어른들의 살의와 기만을 충분할 정도로 겪으며 살았던 아서에겐, 타인의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발달했다. 죽지 않으려고 길러낸 자질이었다.
그는 원하던 바를 클레이오의 표정에서 읽어낸다.
“너, 여기가 어딘지 아는구나.”
퍼뜩 정신을 차린 클레이오는 다급히 아서의 팔을 뿌리쳤다.
“…아니, 몰라. 이거 놔.”
“거짓말 하지 마. 이 ‘전경화’스킬에 대해 넌 나보다도 아는 게 많아 보여.”
“오해한 거다.”
“왜 그렇게 방어적으로 굴지? 난 널 탓하려는 게 아냐. 오히려 감사해야할까? 이건 무척 쓸모가 많아 보이는 스킬인걸.”
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과장되게 클레이오의 어깨를 놓았다.
[―남은 시간 / 제한 시간:00:00:01 / 00:00:40] [―제한 시간 만료로 스킬이 해제됩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먼지투성이의 창고로 되돌아왔다. 바깥에선 평화롭게도 이름 모를 새가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손등에서 성흔이 흐려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서였다.
“고작 목숨 하나 구해보겠다고 얌전히 있는 것도 지겨워 미칠 것 같을 참이었어. 형이란 작자가 또 일을 벌이면 그걸 빌미로 뒤집어엎을 마음도 있었지.”
이런 부분은 지난 원고의 아서와 판이하게 달랐다. 카리스마 넘치는 왕재가 아니라, 심퉁맞은 어린애.
‘훗날을 도모하려고 망나니행세 하던 게 아니었어? 동료를 다 모을 때까지 몸을 낮추고 있던 거 아녔냐고!’
“뭘 믿고 내게 그런 얘길 하지? 내가 밀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뭐, 네가 내 형들에게 가서 ‘아서는 실은 놀고먹는 놈팽이가 아닙니다. 꿍꿍이가 있어요.’하고 찌른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질 거 같네.”
여전히 웃고 있어서, 더 무서웠다. 열일곱 살짜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기운으로 아서는 클레이오를 압박했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살기였다.
“난 남의 뜻에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게 누구든 간에 말야. 그동안은 어렸지. 살려고… 살아야 하니까 바보짓도 하고. 그런데 이제 더는 못 참겠더라고. 그러다 망하더라도 내 맘대로 해야겠다 싶은 거야.”
“그래, 그게 네 선택이면 응원하고… 나한텐 신경 꺼줘.”
“어떻게, 이런 짓을 해 놓고 신경을 끄라고 해. 레이, 너 같으면 왜 성흔이 생겼는지 안 궁금하겠어?”
클레이오는 이마를 짚었다. 아서의 말투가 바뀌어서 성격이 좀 변했나 했더니, 말하는 내용은 똑같았다.
오히려, 어떻게 이전 원고에선 그 성질머릴 재학 중에 숨기고 있었나 싶을 정도다.
뺄 수도 없는 귀속 아이템, 훌륭하신 ‘약속’의 「기억」이 원고에서 비슷한 문장을 곧바로 찾아 줬다. 더 이상 형제의 핍박에 당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던 부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뜻을 파훼당하지 않으리. 신이든 악마든 개입할 수 없다. 나는 오로지 나의 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리니.’
의지가 굳센 주인공이란 건, 가까이서 부대끼면 남 말 안 듣는 또라이가 아닐까?
어떤 인물들은 종종, 저자의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생명을 얻는다. 저자의 뜻과 의지를 벗어나서.
‘저자 선생이 이 자식을 붙잡으려고 해도 개연성을 생각하면 당장 벼락을 때리거나 홍수를 낼 순 없는 거지. 픽션 세상은 현실보다 더 강력하게 인과에 묶여 있으니까.’
오히려 실제 역사에서야말로, 앞뒤좌우를 무시하는 어마무시한 일이 뜬금없이 일어난다. 연재소설이라면 개연성이 없다고 악플 백 개 달릴 것 같은 일들이.
‘아, 몰라. 난 국문과 아냐, 사학과 출신이라고. 왜 하필 소설이야! 차라리 대세인 조선으로 보내줬어야지! 이미 일어난 일! 역사 얼마나 좋아.’
투고는 올바른 출판사에.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처음 한 번 내 말 들어줬다고 저자 따윌 믿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였나 봐.’
세상에 나쁜 개가 없는 만큼, 세상에 좋은 저자는 없는 법인데.
클레이오는 현실도피에 빠져드는 참이었지만, 아서는 자신을 앞에 두고 외면하는 놈을 두고 봐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말할 생각이 들 때까지 지겹도록 붙어있어 줄게.”
“해줄 말이 없는데 어쩌란 거야!”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넌 원고 속의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소년의 무언가가 바뀌면?
‘세상의 구성과 깊이 연루된 존재’를 뒤흔들면 어떤 일이 초래될까? 저자도 고삐를 못 잡아서 날뛰는 놈을? 이미 너덜너덜한 원고가 그 난리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그게 뭐든 뒷감당을 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이 원고를 개정하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해줄 생각이 없는 거잖아. 그 둘은 다르지. 무슨 사정인 건진 앞으로 차차 알아가 보자.”
아서는 개구진 웃음을 지었다.
달갑지 않게도, 약속의 금빛 문구가 뒤이어 떠올랐다.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합니다.]“절대 싫다. 꺼져, 개자식아.”
“우리 엄마 왜 개라고 하냐? 응? 앞으로 매일 볼 사이인데, 까칠하게 굴긴. 이 창고는 이주일 만에 절대 다 못 치워. 방학 하고도 계속 나와야 할걸?”
‘아아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른 클레이오는 절규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서와 엮이면 엮일수록 서사개입도가 높아지는 건 이제 확실했다!
‘능력치가 늘어나면 뭐해! 부담스러워! 이 저자는 힘을 주면 반드시 쓸 일을 만들 거라고!’
이쯤 오면 ‘약속’이 축복이 아니라 목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빌빌 도망가려는 자신을 이야기 한복판으로 끌고 오는 목줄.
클레이오는 원망스레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학교 둘레를 뛰고, 일과 후에는 기 빨리게 하는 아서와 도서관 창고를 치우고.
그놈은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매일 스킬에 대한 걸 묻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호구조사를 해 댔다.
대답을 씹으면 씹는 대로 괴롭혀대고, 하면 하는 대로 말이 많았다. 정말로 피곤했다.
‘아서가 그나마 교실에선 안 들러붙어서 다행이지, 하루 종일 그놈 꼴 보고 있었음 혈압 치솟아서 못 견뎠을 거야.’
한 주가 금세 지나갔다.
지난주의 쪽지시험 결과를 발표중인 마법기초 강의실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번 시험 결과는 중간이 없더구나. 성실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격차가 너무 커. 쯧쯧.”
제베디는 로브를 휘적이며 학생들의 성적을 뒤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백지를 제출한 놈들부터 부르지. 1조의 아서 리오그난, 네보 야르비 너희 둘은 필히 보충수업을 들어야 한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커다란 소년과 길쭉한 소년은 둘 다 딴청을 피웠다.
“검사가 된다고 마법식을 지나치게 등한시하면 안 돼! 비록 서클을 열지 못한다 해도 마법식을 수기로 작성한 후 에테르를 불어넣으면 야전에서는 도움이 되는 [발열], [건조] 같은 기술을 쓸 수 있어. 훗날에 목숨을 구하고 나서야 이날을 고마워하게 될 게다.”
“우우우, 폭거입니다 폭거.”
“조동아리 안 다무나, 아서?”
“너무하십니다.”
수업에 들어와 봤자 방해만 되는 아서가 교수와 한 차례 대거리를 끝내고, 이어 성적이 불렸다.
1조의 검사 아이들은 1개, 2조의 마법사 아이들은 3~4개 좌우를 맞춘 게 대부분이었다. 『마법전서』에서 출제한 문제가 지뢰였던 탓이다.
“그럼 검사 조 만점자를 호명하겠다. 일곱 개.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연일 이어지는 베헤못의 스파르타식 과외로 피로해져 있던 클레이오의 귀가 번쩍 뜨였다.
‘뭐? 첼? 걔도 동급생이었나?’
알비온의 공중타격대를 창설하는 여걸, 첼은 훗날 아서의 큰 전력 중 하나가 된다.
지난 원고에서는 분명 졸업 후에 만나게 되는 인물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여덟 개. 리피 안젤리움, 레티샤 안젤리움. 아홉 개는 이시엘 키시온이다. 올해는 어째 1조의 검사들이 마법식을 더 잘 익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추가점수를 배정해 놓을 것을! 쯧!”
‘리피와 레티샤라고?!’
이제껏 동급생들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던 클레이오는 황급히 강의실을 살폈다.
리피와 레티샤는 있었다. 맨 앞줄에. 결이 고와 광채가 나는 듯한 밤색 머리카락을 깜찍하게 올려 묶은 쌍둥이가.
리피는 오른쪽 머리카락 위에 아이비 잎 모양 머리장식을 달고 있어 레티샤와 구분이 됐다.
점수와는 무관하게, 문제 두 갤 다 못 맞춘 게 아쉬운지 입을 삐죽이고 있는 소녀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옆모습을 보인 채였다.
뒤에 앉은 클레이오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소녀들은 모두 황금빛 도는 올리브색 눈동자에,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몹시도 귀여웠다
리피와 레티샤는 아서보다 네 살이 어렸다. 본래라면 이 강의실에 없어야 할 아이들인데… 조기입학을 했거나 나이가 바뀐 것이다.
쌍검을 쓰는 안젤리움 자매는 둘이서 합을 맞추면 넷이 공격하는 듯한 위력을 냈다. 그녀들 역시 훗날 아서의 주요한 전력이 된다.
‘전부 합쳐서 ‘친위대’라 불리고 말야. 이거, 완전 적폐 학교 아냐. 한 나라 군 수뇌부가 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나오다니. 왕자랑 동기동창인 게 뭐라고.’
지금 저 애들이 왕자와 어디까지 엮였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최종고는 아서에게 더 빨리 날개를 달아주려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그 뜻은, 전쟁도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는 거잖아.’
갑작스레 얻은 정보를 끼워 맞추느라 클레이오는 제베디의 말마저 못 듣고 있었다.
“클레이오 아세르? 내 말 안 들리느냐?”
“네?”
“마법식 열 개를 다 맞춘 건 클레이오 아세르 네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