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0
룬데인 발 테르게스티 행 열차 (2)
덜컥.
철그럭 철그럭.
다시금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을 쭉 밀어 올린 아서는 바람에 머리를 흩트리며 함빡 웃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구나. 테르게스티에서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브레크강을 따라 쾨네부르크까지 올라간다고 했지? 태어나서 알비온을 벗어나 보는 건 처음이야.”
아서는 정말로 여행이라도 온 것마냥 설레가지고선 예습을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그의 재킷 앞주머니엔 차곡차곡 접은 브룬넨 지도와 지리책 끄트머리가 보였다.
‘지금 놀러 가는 줄 아냐?’고 나무라려던 클레이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한 가문의 자제라면 한 번쯤 대륙 유람을 도는 풍습이 남아 있는데, 열아홉 살이 되도록 유람 여행은 꿈도 꿔볼 수 없었던 놈을 타박하는 것이 어른스럽지 못하게 느껴졌다.
“맞아. 테르게스티 자치도시에서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그 다음에, 보자… 뭐더라.”
클레이오는 머리가 하얗게 빈 것을 느꼈다.
‘약속’이 제아무리 만능이래도 읽지 않은 자료의 내용을 끄집어낼 순 없었다.
그간은, 단순한 여행경로조차 못 외울 만큼 미친 듯이 바빴다.
먼저 에즈라에게 자문을 얻는다는 명목으로 ‘수도방위대 학교 실험보조인’인 프란을 심부름 보내, 기어코 포옹의 반구 ‘델타’를 개발해내도록 했다.
델타는 통신거리가 짧은 대신 다회 사용 가능한 무선통신 기구였다.
클레이오는 뒤늦게 떠올렸지만, 이 세계엔 전신이 있으니 신호 체계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신호 체계의 작동 방식은 모스 부호와 거의 동일했다.
그렇다면 포옹의 반구를 활용해 양방향 무선 통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발상의 시작이었다.
클레이오가 재료값은 생각 안 해도 된다고 말하자마자 에즈라는 매일매일 생돈을 허공에 태우는 실험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떨떠름하게 굴던 프란은 의외로 에즈라와 죽이 잘 맞아, 둘이서 매일 엄청난 양의 마석을 허공에 흩어버렸다.
값비싼 실험 재료를 수급하느라 클레이오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브룬넨 지리서 따위 보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다. 그 나라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 제대로 남아있을 리가.
거기다, 뒤늦게 상당한 액수를 환전어음으로 바꾸려니 수속에 시간이 좀 걸렸다.
알비온 중앙은행이 가치를 보증하는 금본위제하에서 환율이 고정인 건 편리하게 느껴졌지만 환전 자체는 과정이 복잡했다.
데르니에 대륙의 동에서 서쪽 끝까지 기축통화로 취급되는 화폐가 디나르였다.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마법뿐 아니라 금융업에 있어서도 룬데인은 대륙의 중심지인 모양이었다.
‘이런 판이니까, 두 번이나 열린 룬데인 박람회를 본 브룬넨 황제가 칼을 갈며 이번 박람회를 준비했댔지.’
클레이오가 대화의 맥을 놓고 멍해지려는 차, 아서가 테이블 너머로 다시 팔을 뻗어 주의를 끌었다.
“야야, 눈 뜨고 자지 마. 테르게스티에서 브레크강을 거슬러 가면 서쪽이 옐레니아 공국, 동쪽이 이자르 공국이고, 그 가운데에 브룬넨 군주국의 수도 쾨네부르크가 있는 거잖아.”
“어… 그래. 잘도 외웠다.”
독도법과 지리 점수만은 좋은 아서는, 클레이오의 비꼬는 말에도 칭찬을 들은 듯 히히거리기만 했다.
“체계가 알비온과 달라서 재미있더라고. 일곱 공국이 각자의 영토와 군주를 가지고, 황제가 그들 위에 군림한다니.”
브룬넨 군주국은 각 공국의 대표가 황제를 선출하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현 황제인 요아힘 카스틸리엔은 라에티카 공국 출신이었다.
“테르게스티만 해도 아주 신기해. 네 개의 나라 국경이 만나는 도시가 천 년이나 자치를 유지하다니, 짧게라도 머물러보면 좋을 텐데 아쉬워.”
“돌아올 때라도 사정 닿으면 그렇게 하자.”
“와!”
8교의 아서가 테르게스티를 방문한 일은 없었지만, 테르게스티 여행이 실행 불가능한 일일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바뀔 대로 바뀐 원고 아닌가.
애 교외체험학습 시켜주는 학부모의 마음으로 클레이오는 다짐했다.
‘까짓거 뭐라고. 시간만 되면 며칠 놀게 해 주자. 저렇게 좋아하는데.’
열차의 종착역은 테르게스티 ― 알비온과 브룬넨, 카롤링거 공화국과 페드르 왕국까지 네 개의 나라와 이어진 절묘한 위치의 도시였다.
핀토스 산맥으로부터 뻗어온 클로토강과, 브룬넨 군주국을 동북에서 서남으로 가로지르는 브레크강이 테르게스티에서 만나 하트리아 내해로 흘러들었다.
알비온과 브룬넨 사이 통행과 교역은 크뤼엘 공작령을 지나치는 경로와 테르게스티를 거치는 두 노선에서만 이뤄졌다.
핀토스 산맥의 중부를 가로지르는 압살롬 방벽은 일반적인 토목 공사로 일부만 부수거나 개조할 수가 없었다. 몇 세대 전 왕실 마법감이 걸어둔 마법이 아직 힘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벽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지형이 지독하게 험준했다. 기후 역시 가혹했다.
북부 핀토스 산맥은 개명한 시대인 지금도 매년 실종자가 생기는 지역이었다.
각종 광석이 지나치게 풍부히 매장되어 있어서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는 탓이었다.
핀토스 산맥을 넘는 도로나 선로를 놓는 건, 민간에서 벌일 수 있는 규모의 토목 공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브룬넨과 알비온의 관계가 경직되었다 풀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양국에서 협조를 해 길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알비온과 브룬넨 사이 육상 통행은 크뤼엘 공작령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됐다.
크뤼엘 공작령의 주도 디에르 시의 중앙기차역은 알비온 동부 최대 규모로서, 동부 교역의 대동맥이라 불렸다.
그러니 크뤼엘 공작을 수장으로 둔 귀족파로선 굳이 예산을 들여, 브룬넨과 알비온 사이에 새 길을 뚫어야 할 유인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크뤼엘 공작령을 거치는 육상 통행이 여의치 않을 경우 택하는 경로가 테르게스티에서 시작되는 브레크강 수로였다.
호라리움 신성제국 시대부터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 테르게스티는 역사 깊은 항구를 품고 있었다.
콜포스가 최신 항만시설을 앞세워 대형 무역선을 받게 되면서 대륙 최대의 무역항이란 이름은 내어주게 되었지만, 복잡하고 이국적인 풍취라면 테르게스티가 몇 수 위였다.
물론 그 아름답다는 도시에 대한 클레이오의 감상은 하나였다.
‘직통 기차표만 구할 수 있었어도 환승 안 해도 되는데, 젠장.’
이런 시대에도 기차표 예매 경쟁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클레이오의 패착이었다.
박람회 첫 주에 출발하는 룬데인 발 쾨네부르크 행 직행열차는 전석 매진이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네 사람분의 1등 객실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포도원 축일의 날짜를 맞추기 위해선 출발일을 더 미룰 순 없었다.
디오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도 네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2등석 표를 구하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좌석의 불편함 따위 개의치 않는 아서는 신이 나는지 자꾸 말을 걸어댔다.
“레이, 레이! 넌 브룬넨에 가본 적 있어?”
클레이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도 국경을 넘는 건 난생처음인데.”
해외여행 따윈 지난 생애에서도 가보지 못했다.
생활에 치여 여권도 없었던 자신에겐 가까운 나라로 떠나는 답사여행마저 사치였다.
“뭐야.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매달 브룬넨을 오가는 사람 같았네!”
“좋고 자시고, 나는 너처럼 체력이 넘쳐나지 않거든.”
“이상하다. 똑같이 뼈 가시처럼 말라도 프란은 체력 끝내주는데. 지금도 봐. 이 흔들리는 객차 안에서 도대체 몇 시간째 책을 읽고 있는 거야.”
아서의 말 그대로였다.
프란은 라는, 척 봐도 잠이 쏟아질 것 같은 제목의 책을 쭉 같은 속도로 읽고 있었다.
식사를 위해 식당칸을 다녀올 때와 수첩에 메모를 할 때 외엔 특별한 움직임도 없이 말이다.
자신에게로 화제가 모인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은 프란이 책등 너머로 빼꼼 고개를 드러냈다.
잘 닦은 안경 표면으로 빛이 반짝 반사되었다.
“앉아서 글을 읽으려면 체력이 있어야 하니 아침마다 달리고, 자기 전에 단련을 좀 하는 것뿐이야. 그렇게 호들갑 떨 것도 없어.”
이번엔 클레이오가 눈을 휘둥그레 뜰 차례였다.
그 무슨 고시 삼관왕쯤 한 사람 같은 발언이란 말인가.
그 정도는 체력 단련은 클레이오 역시 거의 매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육신은 본래부터 연비가 나쁘고, 근력이 영 붙질 않는 체질이었다.
클레이오가 내심 억울해하든 말든 기세를 올린 아서는 프란에게 검 배워볼 생각 없냐는 둥, 자세가 좋아서 검도 잘 들 것 같다는 둥 되도 않는 시도를 하다가 더 떠들 거면 차창 밖에서 떠들라는 타박을 들었다.
물론 아서는 그게 농담인 줄 아는지 껄껄 웃어대기만 했다.
“그나저나 레이디 디오네도 같은 열차를 탔다고 하지 않았나? 아까 식당칸에서도 안 보이고.”
“그쪽은 우리같이 네 명이 같은 객차칸에 들어가는 2등석이 아니라, 몇 달 전에 예매해둔 특등석 침실칸. 식사도 룸서비스지. 가는 동안에도 사업 미팅이 세 건 넘게 잡혀 있댔어.”
“이런, 우리 연약한 대마법사님은 푹신한 벨벳 쿠션 놓인 침실 열차에 탔어야 했는데. 표 구하는 게 복권 당첨보다 어려울 줄이야.”
“지금 불난 데 기름 붓고 부채질하는 재미가 아주 좋나 보구나, 어? 세 배 값을 불러도 아무도 안 파는 걸 어쩌라고, 제길.”
“불난 데 부채질? 레이, 넌 어디서 그런 신기한 비유를 생각해내는 거야. 으하하.”
역시 포켓북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박람회가 워낙 주목을 끌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정 힘들면 다시 내게 기대서 눈을 붙여라, 클레이오.”
“아니야, 이시엘… 아까 돌봐준 것만 해도 고맙지.”
오전 내내 클레이오는 조는 듯 마는 듯 등을 제대로 못 세우고 픽픽 쓰러져서, 보다 못한 이시엘이 어깨를 내주었다.
그렇게 선잠을 자고서야 겨우겨우 일어난 그였다.
주요 역에서만 정차하는 급행열차인데도 장거리 기차여행은 정말로 힘들었다. 여섯 시간 넘게 앉아있으니 등허리는 뻐근해지고 종아리와 허벅지는 저려와 미칠 것 같았다.
‘팔자에도 없는 이코노미 증후군 아냐. 으으.’
룬데인-테르게스티까지 거리만 물경 800km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이제 겨우 절반을 왔는데 이 꼴이었다.
클레이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이 표라도 구할 수 있었던 걸 감사히 여겨야 하는 처지지.”
박람회의 상업관에 물품을 내어놓는 기업 참가자 중 준비를 늦게 마친 치들은 수송량에 한계가 있는 룬데인-쾨네부르크 직통 열차 노선을 이용하지 못하고, 테르게스티에서 증기선으로 옮겨 싣는 루트를 택해야만 했다.
그레이어 상회 역시 마찬가지라 상회 이름으로 구매해 두었던 여분 표를 클레이오가 운 좋게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기분 내자고.”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아서는 주섬주섬 종이봉투를 꺼내놓았다.
기력이 없고 속이 안 좋은 클레이오는 마뜩잖았는데, 아직 성장기가 덜 끝난 애들로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프란 역시 사양하지 않고 진저비어와 체리파이, 햄 샌드위치와 삶은 달걀을 야무지게 집어 먹었다.
탈진해서 달걀 하나 못 까고 멍하니 있는 클레이오를 위해 이시엘이 파이 한 조각을 살며시 밀어주었다.
“…고마워, 이시엘.”
이시엘의 성의를 생각해서 타르트 끄트머리를 조금 베어 물었던 클레이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사삭 부서지는 틀 안에 오렌지 필을 섞은 프랑지판을 깔아 구워낸 뒤, 커스터드 크림과 체리를 얹은 타르트는 고소하면서도 상큼하고 향긋했다.
입맛이 뚝 떨어진 클레이오의 위장도 받아줄 만큼 맛있었다.
아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맛있지, 레이! 룬데인 동역의 명물이라고. 이거 아침에 일찍 가야 살 수 있는 새비지 부인의 타르트야!”
“뭘 하느라 해도 안 떴을 때 역에 도착했나 했더니,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긴. 이렇게 잘 먹으면서.”
“아서 님 말이 옳다. 입에 맞나 보군. 더 먹어라, 클레이오.”
두 주종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몰아붙이니 할 말이 없어져서 클레이오는 파이만 먹었다.
그 꼴을 보던 이시엘이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수다, 타박, 웃음소리, 간식을 담았던 종이의 바스락거림, 열차의 덜컹거림이 뒤섞여 여름 오후의 시간과 공간을 구성했다.
흥이 난 아서는 뒷골목에서 유행하는 저속한 유행가를 연달아 불러제끼며 프란까지 피식거리게 했다.
클레이오는 어느새 몸의 노곤함도 잊고 아이들 가운데 함께 섞여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