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Leveling: Murim RAW novel - Chapter 67
67화 – 24.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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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주 제갈총.
제갈세가 태상가주(太上家主, 아들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세가에 들어앉은 전대가주)의 차남이다.
무림의 일반적인 법도대로 장남에게 가주 자리가 돌아가고, 둘째인 제갈총은 세가 전통에 따라 무림맹의 군사로 임명되었다.
한데, 그 재질이 탁월하고 명숙들의 신망이 두터워 파격적인 승진에 승진을 거듭. 종국에는 쉰도 되지 않은 나이에 무림맹주의 위(位)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무림맹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단 그의 재질과 품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가운데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제갈세가에 맹주 자리를 내어주면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기 쉬우리라는 원로원의 계산이 깔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제갈총이라는 위인은 근본적으로 원로원이 생각한 것만큼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보다 더 탁월했고, 생각보다 더 신망이 두터웠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판단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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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총은, 올봄이 시작되자마자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기후를 적전제자로 삼았다. 여름에는 천기자를 새 무림대학관주로 삼았음을 전격 공표했다.
천기자.
39대 무림맹주이자, 천하제일의 기관진식가.
그가 예고도 없이 무림맹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파란이었는데, 하물며 새 무림대학관주라니?
너무도 당연하게도 원로원은 극렬히 반발했다.
무림대학관주는 본시 원로원이 짖으라면 잘 짖는 강아지 같은 위인이 앉는 자리였는데, 전대맹주?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 무림맹대전서 그 어디에도 전대맹주가 무림맹으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제갈총은 이 논리와, 무림대학관주의 인사권은 무림맹주에게 있음을 들어 원로원의 반대를 일축했다.
그런 제갈총의 논리에 원로원은,
― 맹주의 말씀이 옳다면! 현세대는 영원히 전대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세대란 교체되면 그걸로 끝이다!
떠나지를 말던가 떠났으면 돌아오지를 말던가, 설사 돌아오더라도 받아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원로원의 각종 반대에 한풀이를 하는 것일까?
가을이 되자, 제갈총의 광폭행보를 천기자가 이어받았다.
관주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무림대학관에 연이은 개혁을 단행했다.
출신문파가 새겨진 견장 부착 전면 금지, 중소문파 교관 임관 할당제 시행, 음서제 폐지 등등.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에게 주어지던 갖가지 특혜와 폐단을 혁파했다. 반대급부로, 중소문파와 상급무관 출신의 관생들의 처우는 나날이 개선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서일까?
결국, 대웅전과 원로원 양측은 극한 대립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주 무림맹, 대웅전 지붕 위.
늘 그렇듯 제갈총이 처마 끝에 위태롭게 선 채 와룡곡과 상호곡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등 뒤로 다가와 서는 노인 한 명.
천기자다. 그가 제갈총의 허리춤에 매인 용정주병을 빼들어 자기 입에 틀어박았다.
“캬~ 좋다.”
“뭐가 그리도 좋으십니까?”
“술맛도 좋고 가을바람도 좋으니, 기분이 나쁠 리 만무하지 않으냐?”
“아까 오후 원로원에서 발표하신 음서제 폐지건 때문은 아니시고요?”
“하여간에 귀신 같은 놈. 클클.”
천기자는 다시금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이마주름을 들썩였다.
“자공(慈空), 그 땡중놈의 썩은 얼굴을 보니 100년 묵은 체증이 촤아악- 다 내려가더구나.”
자공대사(慈空大師).
소림사의 전전대 방장이자, 현 원로원의 장.
천기자가 무림맹주일 때도 원로원장이었는데,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림맹의 산 증인. 하나, 천기자가 돌아옴으로해서 그 자리가 위태로워진 자.
제갈총은 그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가벼이 학익선을 부칠 따름.
잠시 뒤, 그는 대웅전에서 멀지 않은 동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공의 가운데를 수평으로 갈라 엎어놓은 것 같은, 반구형의 건축물, 원로원이다. 지금 저 안에서는 비상임시총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으리라.
“하하하. 100년 묵은 체기는 관주님께오서 내리셨으면서, 왜 저들의 해묵은 검기(劍氣)는 제게 겨누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원로 3분의 2가 동의하면 즉각 비상임시총회를 개회할 수 있다.
오늘 있었던 음서제 폐지 강행.
그걸 기점으로 기어이 원로원이 폭발했고, 임시총회 개회로까지 이어졌다. 무림맹주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안건으로 말이다.
“그걸 정녕 몰라서 묻는 게냐?”
제갈총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자, 천기자가 원로원 쪽을 내려다보며 술을 들이켰다.
“꺼억~, 원래 자식이 남의 집 밥그릇을 깨면, 부모가 물어주는 법이니라.”
“하하하, 그럼 관주님께오서 제 자식이 되시는 겁니까?”
“아무렴. 지금은 노부가 네놈이 만든 응달 아래에 있으니 당연하지 않으냐. 흘흘.”
휘이잉-.
쌀쌀해진 추풍 사이로 흘러들던 둘의 소성(笑聲)을 바람이 흐트러뜨린다. 그에 짐짓 엄살을 피우는 천기자.
“허이고, 춥다 추워. 이 늙은이 뼈가 다 삭겠구먼.”
“바람은 이제 불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그러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놈아, 무림맹을 뒤흔들 태풍의 전초인데 노부라고 별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관주님을 제 그늘 아래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시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에잉. 이놈 이거, 이 늙은이를 얼마나 더 화살받이로 써먹으려고 그러는 게냐?”
“무림맹 전체를 일신(一新)할 때까지만 참아주시지요.”
천기자가 수염을 잠시 고르고는 처마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림대학관은 무림맹의 시작이요, 원로원은 그 끝이니……이제 개전(開戰) 초기로구먼. 어쩌면 매우 지난한 세월을 참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제갈총이 그 옆에 가만히 선 채 학익선을 팔랑거리며 원로원을 주시했다.
“그렇겠지요. 이제 막 서전(緖戰)이 시작된 셈이니까요.”
서전.
그 말에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무림맹의 개혁.
곪고 곪아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썩은 무림맹의 환부를 도려내는 일. 천기자 자신은 무림맹주일 때 엄두도 내지 못했던 대계(大計).
누가 되었건 해야 했을 일임을 알고 있었고 칼자루를 쥘 기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끝내 쥐지 못했다. 칼 한 자루로는 저기 저 건물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래된 고검(古劍)들을 모두 상대할 자신이 없었기에.
헌데,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가장 아끼던 제자가 칼자루를 쥐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검집에서 반쯤 검을 뽑아 놓고 있었다.
무겁디무거워 혼자서는 도저히 다시 꽂을 수도, 휘두를 수도 없는 칼이다.
애제자 녀석이 꽂기 싫어하니…….
이번에는 힘껏 휘두를 수밖에.
시퍼렇게 날이 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고검들을 향해.
휘이잉-.
한동안 지속되던 침묵은 한 줄기 바람에 끝이 났다.
“고작 인내하는 걸로 해결이 된다면 제자에게 이 큰 업보를, 죄 물려준 스승으로서 못할 게 무에 있겠느냐?”
제갈총의 양볼이 깊게 도드라진다.
그걸 흘깃 본 천기자가 금세 가벼운 한 마디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놈은 요즘 뭐한다더냐?”
천기자의 그놈.
아무에게나 이놈 저놈 그놈이라고 하시지만, 그 높낮이는 판이하다.
훗, 제갈총은 금세 알아듣고 미소했다.
“글쎄요. 저로서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왜?”
“백만장서관에 살더군요.”
“음? 그놈이 백만장서관에 살다시피 한다고?”
“살다시피 하는 게 아니라, 산다더군요.”
“엥? 그게 말이 되느냐? 그 무식한 놈이 게서 뭘 한다고?”
“글쎄요.”
“에잉, 네놈은 글쎄요 밖에 할 줄 모르는 게냐?”
“제가 보고받은 걸로는 그렇습니다.”
“보고? 그놈에 대한 보고?”
“네, 정확히는 일과표지요.”
“일과표라니?”
“직접 한 번 보시지요.”
부스럭, 제갈총이 품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바로 받아 펼쳐 읽는 천기자.
묘시초(새벽 5시) 경에 기상 추정.
세안 등 기초적인 준비 및 정리 후, 백만장서관 10층 외래관으로 직행.
해시말(밤 11시) 경, 백만장서관을 나와 기숙관으로 돌아옴.
※ 특기할 만한 점
一 : 종종 정주로 외휴(外休)를 나감. 천향루를 드나드는 걸로 보아 여인을 만나는 걸로 추정됨. 그 여인이 누군지는 현재 조사 중.
一 : 주에 한 번씩 천라궁장에 들러 활을 쏨. 한 시진 소모. 시간은 반드시 백만장서관 문을 닫는 해시말 이후.
一 : 주에 한 번씩 식도락 주방을 찾아, 본인이 직접 건포(乾脯)나 환단을 제조함. 한 시진에서 세 시진 소모. 역시나 시간은 반드시 백만장서관이 문을 닫는 해시말 이후.
一 : 등하관 시간에 맞춰서 백만장서관 옥상을 찾아 천리경으로 무림맹 전망을 살펴봄.
一 : 모든 보행은 압보로 하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
一 : 손가락과 팔목에 금환(金環)이 감겨 있는데,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음.
“……무엇이냐, 이게?”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지금 노부를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게냐? 여기 보이는 대로면 묘시초에 백만장서관에 가서 해시말에 기숙관에 돌아온다. 이게 전부가 아니더냐?”
“네, 그렇습니다.”
“음!?”
“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아이는 그저 책을 읽는다더군요.”
“…….”
“마치 백만장서관에 커다란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백만장서관의 비밀이라…….
황당함에 꼬였던 천기자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돌다가, 곧 백만장서관 10층에 가서 꽂혔다.
“흘흘흘, 책속에는 언제나 비밀이 있느니라. 그리고 그 비밀은…….”
갑자기 멈추어진 천기자의 읊조림.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언제나 첫눈처럼 느닷없이 찾아오기 마련이지.”
늦가을, 예고도 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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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 시선이 간만에 책에서 창밖으로 옮겨졌다.
벌써 눈이라니.
겨울이 다 와 간다는 방증이리라.
이곳에서 벌써 두 계절이나 보냈고,
‘세 번째 계절이 임박한 건가?’
다시 눈을 아래쪽, 백만장서관 입구 부근으로 가져갔다.
쉴 새 없이 들락날락 거리는 발길들이 보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만큼 이 백만장서관에 많은 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신반의 연말평가가 임박했기에 더욱 그러했고 말이다.
뭐, 그럼에도 이 10층에서 독서하는 자는 나와 저 반대편에 어딘가에 있을 기대몽뿐이었지만.
그 때문에 여전히 기대몽이 을 먼저 발견할 확률은 항시 존재했다.
뭐, 지금은 그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
‘왠지 녀석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무슨 수든 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간 여기 틀어박혀서 내내 서책만 읽었지만, 몸이 근질거리거나 좀이 쑤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손가락 물구나무 팔굽혀펴기.
발가락 끝으로 오리걸음 하기.
이런 자세로 주야장천 책장을 넘기는 사람 몸이 근질거리거나 좀이 쑤시면 그게 더 괴상한 거지.
“여, 서괴해. 오늘도 예 있는 겐가?”
“뭐, 그렇죠.”
이젠 여상한 일이 되어버린, 사서와 나 사이의 간단인사.
서괴해(書壞孩).
계절이 2번 바뀌는 동안 새로이 붙여진 별호다.
굳이 풀이하자면, 책방 사고뭉치.
여기서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화려했던 사괴해 수괴의 이전 전적이 더해져 서괴해가 됐다. 어쩌면 책에 미친놈이라는 의미가 덧대어진 걸지도 모르고.
‘장서관의 사고뭉치라.’
인생을 두 번 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기네. 내게 책과 관련된 별칭이 생기다니. 좋든 싫든 어쨌든 재밌는 일이다.
‘천지가 개벽할 일보다 더한 일이구만.’
때론 습관이란 게 천지개벽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발끝이 이곳 10층에, 손끝이 종이에, 코끝이 서향에, 눈끝이 문장에, 생각의 끝이 독후감상에 익숙해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과가 저절로 흘러가고 있었다. 천지가 바뀌든 말든.
일어나서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먹고, 읽으면서 싸고, 읽다가 잠들고.
그러다 보니 책과 친해졌다.
친하다? 아냐, 아냐. 약해, 약해.
친하다는 표현보단……음, 그래. 사승관계.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책은 때론 엄한 사부도, 때론 따뜻한 사모도, 뭐 또 때론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나 주절거리는 대사백이나 태대사백도, 또 아주 가끔은 천소소같이 틱틱 내 입가와 가슴을 간질이는 사매도 되어 줬으니까.
양서니 악서니 그런 건 모른다. 왜 나누는지도 모르겠고.
모든 책에는 그 저자의 인생이 가로누워 누군가 넘겨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뭣 하러 좋은 책 나쁜 책을 나누겠는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뭐가 되었건 항상 배울 점이 있었다.
넘겼다고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읽고 알아가고 넓혀가고 있었다.
특히나, 이 백만장서관 외래관의 책들은 외국에서 온 서적들이 아닌가?
중원의 사상이나 무공 등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정말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지.’
그저 양의심공을 찾아왔을 따름이었는데…….
수도 없이 많은 외래검법을 접했고, 수도 없이 많은 외국도법을 만났고, 수도 없이 많은 타국부법을 읽었고…….
그 이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중원 밖의 무공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견식했다.
그럴 때마다,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드잡이질.
책 속 새외의 무인들과 내가, 뇌 내에서 맞닥뜨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식은 언제나 한 가지로 수렴되었다.
‘쌍병기술.’
회귀한 이후, 수도 없이 고민했다.
과연 어떤 무공을 주력으로 익혀야 할까?
무림대학관 와룡곡에 가면 내가 익힐 뛰어난 무공이 널려 있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도 기본체력 증진과 전생에서 배웠던 기본검술과 내공심법뿐이었다.
이 무림맹 안에 널린, 백첩반상 가운데 제일 맛이 없는 반찬.
아니, 아니다. 반찬도 안 된다. 그저 맨밥이다. 어쩌면 물만 부어놓고 무치지도 않은 콩나물 대가리이거나.
답답했다.
양의심법을 여기서 찾는들 뭐하겠는가?
좋은 양념이 있어도 밥뿐인걸.
그에 얼마 전에는 진혼진인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
..
…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술 가져왔냐?”
“끊으셨다면서요?”
“너를 보면 열이 올라와서 그런다. 도호를 외는 것만으로는 답답함이 가시질 않거든.”
“…….”
“뭐, 그건 됐고. 그래, 날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냐?”
“진인께서는 쌍병기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턱을 삐뚜름히 기울이는 진혼.
“중원 아니, 무림 정파의 고수들 중에는 쌍병기술을 익힌 사람이 없잖아요.”
“그렇지, 아마.”
“그럼 쌍병기술은 틀린 겁니까?”
“정파 고수 중에 쌍병기술을 익힌 자가 없으니 쌍병기술은 틀린 거다? 누가 그러더냐?”
“모두가요. 모두들 제가 여러 가지 무기를 들고 싸우면 그저 살기 위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이 익힌 임시방편이나 임기응변 정도로나 봐주거든요.”
“너는 어떤데?”
나는 어떠냐고?
“너는 어떠냐고.”
“…….”
“네가 그때, 적성면접 때 내게 말했었지 않나? 기고만장한 적 없다고. 지금도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온갖 쌍병기술을 동원해 나를 밀어내지 않았느냐.”
“그랬죠.”
“그럼 그게 정답이다.”
“…….”
“아무도 입고 있지 않다고 옷한테 틀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아직 그 옷에 맞는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거든.”
그러고는 내게 다가와 내 옷깃을 꾸깃꾸깃 기울인다.
“크크. 너한테는 이렇게 비뚠 게 어울려.”
탁탁, 그가 내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린다.
“명심해. 모두에게 맞는 옷은 없어. 너한테 딱 맞는 옷이면…….”
다시 가던 길을 가는 진혼.
“그냥 입어.”
…
..
.
그 덕분이었을까?
확연히 가을에 접어든 지금.
내게 많은 변화가 닿아 있었다.
뭉글뭉글 외따로 떨어진 구름처럼 상관없이 움직이던 그간의 깨달음들이 서서히 어떤 임계점을 향해 뭉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한 데 뭉쳐 천둥을 내리치거나 비를 뿌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거나.’
그렇게 가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시점.
“후-, 이제 이것만 읽으면 청구에서 온 책은 다 읽었구만.”
나는 10층 동편의 끄트머리 책장 앞에 섰다. 자연스레 다음 책을 찾아 오른쪽 맨 아래 구석으로 손을 움직였다.
“66666번째 책인가?”
그 책장 최후의 책을 뽑아들고는, 이제는 눕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물구나무를 했다.
그런데…….
‘어? 저기도 책이 있네?’
책꽂이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바닥에 받쳐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수평받침으로 써? 6만권이 넘는 책을 읽으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은 백만장서관. 당연히 책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곳이다. 서장의 수평이 맞지 않는다고 책을 아래에 받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보통은…….
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서장을 뒤로 젖히고는 발가락 끝으로 그 책을 빼냈다. 그리곤 기울어진 수평을 책 대신 등을 기대어 맞추었다.
탁탁, 빼낸 책을 가볍게 털자 묵은 먼지가 고기에 붙은 파리떼처럼 훅 일어난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이 밑에 있었던 걸까?
헤지고 헤져 너덜너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책장 아래 꽤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물구나무를 서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서책.
이윽고 먼지가 가시며 책의 겉면이 드러났다.
거기엔 아무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 그거? 청구에서 온 빈 책이다.”
지나가던 사서가 다가와, 내 손에 들린 ‘백지묶음’을 바라보며 설명해주었다.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뭔가 있어 보여서 물도 칠해보고 불에 슬쩍 그슬려 보기도 하고 그랬는데……나중에 들어보니까, 나만 그래 본 게 아니더구나.”
이내 발길을 돌리는 그.
“볼 것도 없을 테지만, 다 보면 제자리에 다시 괴어 놔.”
“…….”
빈 책. 혹은 백지묶음.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서들에게는. 그러나…….’
내게는 다르지.
보다 정확히는, 내게만 보였다.
그냥 보면 빈 종이인데, 내 시선이 닿으면 마치 그려지듯 떠오르는 글씨들.
아마도 무언가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어, 그냥은 절대 읽을 수 없게 만든 책인데, [번역/통역]이 그것을 뚫고 읽게 만든 것이리라.
본래라면, 아예 이 책을 통째로 태운다거나 특수한 독이나 약품을 바르면 내용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비밀이 있겠지만…….
내게는 문자로 된 그 어떠한 비밀도 소용이 없었다.
내 눈이 그 수상한 책의 겉표지를 훑었다.
스르륵, 살아나는 다섯 글자.
고개를 내려 손에 쥔 책을 다시 보았다.
거기서 내 머릿속 구름을 운집시키는 것은 ‘십병’이라는 두 글자였다.
열 가지 병기.
아직 펼쳐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비급 속 무공은 중원 정파의 무공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수록하고 있다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쌍병기술과 십병귀.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느낌.
왠지 그동안의 고민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끝날 것만 같은 예감적인 예감.
들쿵들쿵.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가진 채 앞표지를 들쳤다.
― 연자(緣者)여.
지워져 있던 글자들이 되살아 떠오르는 순간.
띠링-.
[새외사귀(塞外四鬼)의 첫 번째 유산, 를 발견하셨습니다!]
[새외사귀 연계임무가 개방됩니다.]
[연계임무 : 새외사귀의 유산]
새외사귀의 두 번째 유산을 찾으시오. 제한시간 : 1년
성공시 보상 : 무공 [염공(炎功)] 획득
실패시 불이익 : 화기 이상 30주야(30일)
66666번째 서적.
나는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무한 레벨업 in 무림
지은이 : 곤붕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949-9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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