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20
00020 [다섯 번째 역] 엘뷔니 디어 =========================================================================
왕과 왕비와 리건, 파르네세 공작부처와 잉그리드.
이렇게 여섯 사람이 고급스러운 찻잔이 깔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오늘의 모임은 일종의 상견례였다.
“의외로 흔쾌히 동의하는군.”
“서자라해도 폐하의 핏줄입니다. 파르네세가에는 크나큰 영광이지요.”
파르네세 공작이 공손히 대꾸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도 안 된다. 리건 에스펜서는 전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강행이 되는거냐 하고 주장했던 남자답지 않았다.
국왕도 파르네세 공작의 성정은 익히 알았으므로 굳이 그를 얄팍한 사람이라 깔보지는 않았다. 의외로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덤덤히 상황을 받아들여서, 이 자리에서 가장 리건을 고깝게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왕비 마젤리였다.
“식은 이쪽에서 준비하겠지만, 지참금의 조율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당연하단 듯 대꾸했다.
“지참금은 이쪽에서 왕실에 부끄럽지 않게 추려 보낼 셈입니다. 제가 직접 살필 터이니.”
“하지만 트리샤, 몸도 좋지 않으신 부인이.”
“한동안 쉬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덕분에요.”
왕비 마젤리는 혀를 쯧 차고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리건은 제 옆에 앉은 잉그리드를 힐끔거렸다. 초조감이 들었다.
잉그리드는 공손히 웃어른의 이야기들을 귀담다가 잠깐씩 미소 지으며 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없이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하지만 리건은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올 봄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숲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가을이 끝나기도 전,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휘말려 고속철도를 타고 고속주행을 해 세 번째 결혼이라는 골대에 골인하기 직전이었다.
“잉가, 마지막으로 물으마, 정말로 원하는 것이냐?”
“예, 폐하. 리건이, 아니 에스펜서 공께서 저를 내치지만 않으신다면.”
요망한 잉그리드는 이런 식으로 최후의 퇴로까지 막았다. 그에게는 대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리건은 최후의 최후로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결사반대를 기대했다. 그들에게 그간의 정황을 다 설명한 후 깨끗하게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피력하여 혼담을 무산시키는 것. 그런데 잉그리드 파르네세, 저 계집은 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가지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는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리건과 파르네세 가의 첫 대질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왕과 왕비의 입석하였다.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실망했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리건은 정말 이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 헤젠의 말대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거품이라도 물고 간질환자 코스프레라도 해야 하나. 그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그들 결혼을 지지할 것을 이야기 했다. 파르네세 공작부처의 의견을 다시 한 번 물었다. 적어도 불쾌한 내색을 보일 거라 생각했던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잉그리드와 리건이 나란히 앉아있으니 썩 잘 어울린다.’는 끔찍한 말을 했을 때 리건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러면 식은 봄으로 하지.”
어느 순간 대화가 훌쩍 결론으로 뛰어넘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리건이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아, 어, 아, 니.”
혀를 움직이는 방법이 기억이 나지 않아 잠깐 저능아처럼 더듬거렸다.
“왜 그러느냐.”
“아니, 그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밀로아에 계신 모친께 제대로 상황을 알리지도 못했고 단순히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보랏빛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한 쌍이었을 때도 싫었는데 파르네세 공작부인까지 합세한 두 쌍이 되니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어떻게 저떻게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그래도 살아 있는 주둥이라고 당장 결혼식의 시기를 잡는 것만큼은 막았다. 당분간 투자자들과 계약을 성사시킨 후, 잉그리드와 이런 상황을 유지하다가 득은 챙기고 혼담을 무산시킬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자꾸만 다리가 떨리고 머리가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났다.
“그러면 이만 우리는 먼저 일어나지.”
다행히 자리는 길지 않았다. 국왕 부처가 먼저 일어섰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견례였다. 무의식이 그를 버티게 했다. 잉그리드는 우아하게 일어서 한 손으로 가슴팍을 가볍게 누르며 허리를 숙여 전송했다. 리건도 홀린 듯 예를 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파르네세 공작부처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기회가 생겼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부인.”
최대한 간결하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는데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먼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무슨 말을 하든 에스펜서 공이 저지른 일의 경중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사답게 책임지세요. 내가 귀하게 기른 딸아이가 이 진탕 속에 있게 된 것이 딸아이가 바랐건 아니건 간에 결국 에스펜서 공과 엮여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내게는 같아요.”
빌어먹을 파르네세들.
“……부인께서는 저 같은 자에게 귀한 딸을 그리 선뜻 내주시겠다는 겁니까?”
“제 딸아이가 무엇이 모자라 공에게 그런 대우를 받습니까?”
“예?”
그가 까내린 것은 자신이었다.
“잉가는 귀하고 곱게 키운 아이입니다. 다재다능하고 어여쁘지요. 그런데 무엇이 모자라다 판단하셨기에 에스펜서 공께서는 내 딸아이를 볼 때 그리 못마땅한 눈을 하느냐 여쭈었습니다. 하시는 말마다 잉가를 피하고자 하시는 뉘앙스이신데, 기왕 이리 되었으니 도리 있습니까. 공의 마음에 들도록 잉가를 교육시켜야겠지요. 신부수업에 도움 줄 생각이니 말씀해보시지요.”
듣다 못한 파르네세 공작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리건은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온 사포 같은 말에 정신이 밑바닥까지 갈리는 느낌을 받았다. 적절하게 잉그리드가 무마해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눈을 뒤집고 쓰러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 제가 공을 언짢게 해드렸어요.”
“잉가, 앞으로는 네 남편 될 사람에게 순종하고 언짢은 일은 하지 말도록 하렴. 이 어미를 부끄럽게 하지 마라.”
“예, 명심할게요.”
이제 리건의 의심은 병적으로 심해졌다. 잉그리드와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처음부터 짜고 친 사기는 아닐까. 그러나 잉그리드를 보는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눈빛도 사실 썩 좋지만은 않았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자.”
“아뇨, 리건님과 잠깐만 이야기를 나누고 갈게요. 먼저 돌아가세요.”
싫다. 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걸렸는데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눈빛이 올가미처럼 그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얼마간 뜯어보듯 리건을 훑은 후 픽 웃으며 돌아나갔다. 리건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리건, 괜찮아요?”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온 근육이 아파오고, 머리가 아픈 증상이 긴장이 가신 후유증처럼 찾아왔다. 편집증 환자처럼 쫓기는 기분이었다. 잉그리드가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리건이 사납게 쳐냈다.
“치워.”
목소리가 흉하게 갈라졌다. 잉그리드의 눈썹 끝이 축 쳐지는 것이 보였다. 토끼처럼 보였다. 리건은 토끼가 싫어졌다.
벌떡 일어난 리건은 방을 나섰다.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했다. 가슴 포켓 안에 발롬을 탄 시가가 있다.
“리건.”
잉그리드가 그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도 무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엘뷔니의 디어라는 대단한 아가씨는 사슴 같은 발목을 재게 움직여 종종종 그를 쫓아왔다. 빌어먹을 파르네세들. 빌어먹을 파르네세.
빌어먹을 잉그리드 파르네세.
*
리건은 왕궁에서 자랐다. 독립한 지는 꽤 되었지만 왕궁 지리는 잘 안다. 비밀장소도 여럿 안다. 이리저리 샛길로 빠지는 리건을 쫓기 위해 종종대는 잉그리드는 포기를 몰랐다. 자꾸만 떨어지는 모자를 안 듯이 끼고서 리건의 옷자락을 잡으려다 두 번이나 무안을 당하고도.
홧김에 잉그리드를 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최후의 인내심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 빌어먹을 인내심아, 제발 꺼져라.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더워서 땀이 나는데 동시에 추웠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진짜 날씨가 개 같은 건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구역감이 밀려왔다.
잉그리드는 끈질긴 새처럼 조잘거리며 계속해서 친한 체를 해왔다. 왕궁 한가운데의 너른 공터가 있는 건물에 이르렀을 때 리건은 결국 인내를 잃고 말았다.
“리건, 너무 마음 상해있으신 것 같아서 신경이 쓰여 그래요. 죄송해요, 시작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서로 알아가다 보면……”
“씨발, 그만 좀 따라와!”
결국 리건이 윽박을 치고 말았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다가와 섰다.
“……혹시 몸이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눈 밑도 어둡고 계속 땀을 흘리시는데…….”
“안 좋냐고? 왜일 것 같은데? 왜일 것 같아?”
“제가 너무 싫어서요?”
리건은 헛웃고 말았다. 어떻게 저렇게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묻는 건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잉그리드에 대한 불호보다 금단 현상이 더 그를 곤혹케 했다.
순식간에 이렇게 상태가 나빠질 줄 몰랐다. 조금 전 국왕부처와의 만남이 있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늘에 앉아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잠깐 괜찮아지실 때까지만 옆에 있어드리고 바로 돌아갈게요. 걱정이 되어 그래요.”
리건은 무시했다. 잉그리드는 도도도 높은 굽을 신고도 잘도 따라붙었다.
“내가 그렇게 걱정스럽거든 그냥 내 인생에서 사라져.”
“리건, 미안해요.”
“미친 척 그렇게 잘 하면서, 미친 척하고 한 번 더 엎는 건 왜 못해?”
“저를 싫어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화가 나신 것도 알아요. 하지만 서로를 좀 더 알고 나면 리건도 저도…….”
무시하고 걸었다. 한쪽 면이 탁 트인 왕궁 복도에 접어들었다. 수십 개의 열주들이 햇살이 비치는 방향대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릴 적 리건이 간혹 숨바꼭질을 하던 정원으로 이어진 길이다. 왼편 야외 먼 곳에서 궁중악사들이 모여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이 전부다. 복도에는 시녀 한 명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발롬을 섞은 시가를 피우고 이 미칠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킨 후 돌아갈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왕자와 왕녀들을 마주치는 불상사는 겪지 않길 바란다. 그들은 리건의 생활태도를 꼬집으며 지금 그의 꼴을 힐난하고, 정신을 차리라는 둥의 말도 안되는 조언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1왕자인 레이먼드는 가장 큰형으로써의 책임감으로 몇 시간이고 훈계를 할 남자다.
잉그리드를 따돌리기 위해 빠르게 걷던 리건이 우뚝 멈춰 섰다. 복도를 똑딱똑딱 울리던 구두굽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본 리건은 하얀 열주의 그림자를 딛고 탁 트인 외경을 응시하는 잉그리드를 발견했다.
햇살보다 반짝이는 것 같은 백금발이 흐늘흐늘 바람에 흔들렸다. 생각에 잠긴 듯, 아니면 넋을 잃은 듯,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 본다. 무얼 보나 싶어 기둥을 짚고 섰다. 저편에 보이는 것은 왕궁의 악사들뿐이었다. 그러고보니 3왕자의 결혼식에서도 저랬다.
리건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저 계집이 얼을 빼고 있을 때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리건은 시가를 문 후에야 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비로소 의식했다.
잉그리드는 정말로 따라오지 않았다.
익숙한 약기운이 폐부를 돌기 시작하자 속이 조금 풀렸다.
햇빛이 왕궁 한켠의 하얀 벽을 비춘다. 반짝거렸다. 백금발이 떠올랐다. 씨발. 기분이 더러워져서 시가를 더욱 깊이 빨아 마셨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이제는 생각하는 것조차 지쳤다.